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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신비한 종교, 명교
게시물ID : mystery_777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대양거황
추천 : 12
조회수 : 9410회
댓글수 : 9개
등록시간 : 2016/07/21 11: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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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모검걸(毛劍杰)

 

일찌기 13세기에 이미 거의 사라져버린 신비한 종교인 명교는 중국의 동남연해에서 완강하게 생존하고 있었다. 그것이 바다를 건너왔는가, 아니면 사막을 건너왔는가? 역사의 먼지는 이 모든 것을 덮어버렸다. 이제는 몇몇의 황폐한 절과 무너진 담벼락, 몇권의 낡아빠진 책들만이 남아 있다. 지금도 남아있는 독특한 풍습이 세상사람들의 관심을 끌면서, 고대명교의 천녕흥망성쇠가 빙산의 일각을 드러냈다.

 

창남(蒼南)의 독특한 풍습

 

절강성 온주 창남현의 바다에 가까운 염정, 괄산 일대에는 천여년이래로 하나의 독특한 풍속이 전해지고 있다: 하얀 색의 옷을 입고 죽은 사람을 위하여 제사를 지낸다; 일부 어민들은 매일 아침에 반드시 먼저 채식으로 백반은 세 입 먹는다. 그 후에 고기를 먹는다. 또 일부 노인은 지금까지도 아침에는 태양에 절하고, 저녁에는 달에 절한다.

 

현지인들의 조상을 따져보면, 거의 민남(복건남부)이나 민동(복건동부)이고, 보편적으로 마조(祖)를 믿는다. 그런데, 마조신앙에는 이런 풍속이 없다.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다른 종교에도 마찬가지로 이른 습속은 없다.

 

현지에 다른 사람들이 잘 모르는 어떤 이미 소멸한 종교가 유행한 적이 있었던가?

 

1982년, 절강성의 제1차 문화재일제조사때, 사람들은 민국시대 <<평양현지>>에 마을사람 공극표의 <<선진사기>>에 이런 글이 실린 것을 발견했다: "선진사, 소린국(蘇隣國)의 교인들의 집이다" 장소는 "평양 곽남으로 백십리를 가면, 산이 있는데 붕산(鵬山)이다"

 

소린국은 고대 페르시아를 가리킨다. 소린국의 종교는 바로 마니교(摩尼敎)이다. 송나라이후 중국화된 마니교가 바로 명교(明敎)이다. "평양곽남'은 당시에 이미 창남으로 편입되었으니, 금향, 염정, 괄산 일대이다. 바로 연원이 불명확한 독특한 풍속이 전해지는 지방이다.

 

하얀 옷을 입고 죽은 자를 위하여 제사지내는 것은 명교의 백의백관(白衣白冠)의 풍속이 남은 것이다. 채식으로 백반을 세 입 먹는 것은 명교의 "장재(長齋)" 풍속이 변한 것이다; 어민들은 해상의 파도와 일년내내 싸우므로 채식만 해서는 체력을 유지할 수 없다.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세 입의 백반으로 채식을 대신하는 것이다.

 

명교는 사라진지 수백년이 되었고, 일찌감치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지워졌다. 이제는 먼지구덩이 속에서 그 흔적을 찾아보아야 한다.

 

고사(古寺)의 수수께끼:

 

1988년 봄, 평양현지의 총편집인 임순도는 창남 백사의 외삼촌 장정광의 집에서 새해를 맞이했다. 그 때 이 일을 꺼냈다. 장정광 노인은 스스로 선진사를 찾아나섰다.

 

괄산의 하탕촌의 바깥에 큰 새를 닮은 작은 산이 장정광의 시야에 들어왔다. 현지인들은 그에게 산이름이 "붕산"이라고 말해준다.

 

이제 선진사를 거의 찾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붕산의 아래에 있는 여러 절들을 하나하나 조사했지만, 선진사의 종적은 보이지 않았다. 선진사는 일찌감치 사라졌는가? 아니면 기록에 착오가 있는 것인가?

 

이때, 논 한가운데 외롭게 서 있는 노란색의 담장과 단층건물이 장정광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농로를 따라서 가까이 가보니, 방문에는 큰 글씨로 "선진선사(選眞禪寺)"라고 쓰여 있었다. 절앞의 황폐한 기초와 논과의 경계지역에는 1미터 가량 높이에 이끼가 가득낀 석비가 있었다. 확인해보니 비에 새겨진 글은 바로 "선진사기"였다. 비문은 현지에 나오는 것과 일치했다.

 

선진사는 중국의 절이 산을 뒤로 하고 세워졌던 것과 전혀 다르게 서 있다. 그것은 일찌감치 불사(佛寺)로 바뀌었고, 규모도 아주 작았다. 겨우 단층짜리 3칸이었고, 스님은 한 사람이 있었다. 절에서 마니교의 품격을 지닌 건물이나 옛물건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엇따. 그저 아홉개의 기둥만이 옛날 물건이었다.

 

그것은 누가 지었는가? 그것은 어떤 곡절을 거쳤는가?

 

<<선진사기>>의 낙관시간은 원나라 지정11년(1351년)이다. 당시 현지 팽씨일족인 팽여산이 선진사를 증축한 일을 기록하고 있다.

 

<<선진사기>>는 반복적으로 팽여산이 선조의 유언을 실현했다는 말을 적었다: "절은 나의 조상이 창건한 것이다" "나는 다행히 선조의 유언을 지킬 수 있었다."

 

1997년 1월, 임순도는 선진사에서 4킬로미터 떨어진 팽가보촌에서 1919년에 중수된 <<팽씨종보>>를 발견한다. 이 족보에도 <<선진사기>>가 실려 있다. 그리고 팽여산의 집안내력도 적고 있다.

 

팽씨의 선조인 팽신(彭信)은 후진 천복5년(940년)에 복건 하포에서 창남 금향 붕산으로 이주했다. 팽씨의 8대손인 팽중강(彭仲剛, 1143-1194)은 건도2년(1166년)에 진사가 되어 국자감승의 관직을 지낸다. 팽씨가족은 이때부터 흥성하여 이후 관직에 오르는 자가 적지 않았다.

 

선진사를 처음 지을 때는 "옛날 방식대로 낡고 소박했다" 이는 팽여산이 증축하려한 직접적인 원인이다. 선진사는 팽씨가족이 발전하기 전에 만든 것이다. 그리고 팽여산도 이 절을 어느 조상이 만들었는지를 몰랐다. 이를 보면 선진사를 지은 조상이 이름을 잘 아는 선조는 아니었던 것같다.

 

가족이 발전하기 전이고, 팽여산의 가까운 선조가 살았던 연대이전이고, 북송선화때 명교를 금지하기 이전이라는 세 가지 요소를 합쳐서 추단해보면, 선진사의 건축연대는 아무리 늦어도 북송 선화이전인 것으로 보인다.

 

연원의 수수께끼

 

한 지방에서 대규모로 신흥종교가 흥기하면, 그것은 두 가지 원인때문이다. 하나는 조직적으로 전도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민이 유입된 것이다.

 

지방문헌과 관련사료에서는 모두 명교 전도사가 온주에서 활동했다는 기록을 남기지 않고있다. 그러므로 이민이 온주명교가 일어난 유일한 원인일 것이다.

 

명교는 페르시아에서 불원천리 온주까지 왔다. 여기에는 두 가지 경로밖에 없다. 하나는 비단길을 통하여 중원에 들어오고 다시 남쪽으로 흘러 온주까지 온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해상비단길을 통하여 천주로 들어와서 복건에서 온주로 북상한 것이다.

 

온주역사상 대규모의 이민은 세 차례 있었다: 당말오대에 민동(복건동부)의 이민물결, 남송건도2년(1166년) 온주홍수이후 관청이 조직적으로 복건사람들을 대량 유입받은 것, 명말청초 민남(복건남부)의 이민이 절강으로 들어온 것.

 

팽씨선조는 당말오대의 민동이민이다. 그들의 조상은 복건 하포일대에 살았다. 당시 이곳은 마니교가 유행했던 곳이다. 팽씨와 같은 시대에 창남의 임, 온, 채, 진, 서씨등의 일족이 들어온다. 그들의 족보에서도 모두 조상들이 명교를 신앙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명나라때 하교원이 쓴 <<민서>>의 기록에 따르면, 당무종의 "회창멸불"에서 연대하여 마니교도 금지한다. 명교승려인 호록법사는 난을 피해 복건으로 가서 계속 전도한다.

 

당시 해상비단길은 이미 번성했고, 많은 페르시아인, 아랍인들이 천주로 왔다. 민절일대의 명교는 계속 흥성하였는데, 이들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선진사가 소재한 팽가산은 오늘날 금향진의 서쪽에 위치한다. 고대에 금향은 민절교통의 주요도로인 횡양고도에 놓인 중요도시였따. 바다에도 가까웠다. 역대이래로 "양절의 인후에 해당하고, 팔민의 입술과 이빨에 해당한다'는 곳이다. 그리하여, 명교가 해로를 통해서 왔건 육로를 통해서 왔건 모두 이 일대를 교두보로 삼아서 북으로 발전해갔을 것이다.

 

흥성의 수수께끼

 

팽씨와 같은 가족이 대대로 명교신앙을 전승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온주명교신앙이 흥성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축소판이다. 신중국성립전까지, 평양, 창남등지에는 소수의 농민들이 명교를 여전히 신봉했다.

 

사료의 기록에 따르면, 온주명교는 북송때가 전성기였다. 계통적인 교리와 규범적인 숭배의식이 있었다. 당시 온주의 12만호의 인구중에서 정규 명교사원이외에 "재당"만 40여곳에 달하였다. 소위 "재당"은 주민의 집안에 설치한 신도들의 집회지이다.

 

이미 확인된 명교의 정규사원은 선진사와 겨우 십리 떨어진 곳에 하나가 있다. 이미 사라져서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는 곳은 더욱 많다.

 

원나라사람 진고의 <<죽서루기>>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온주의 평에는 염정이라는 곳이 있다...잠광원(潛光院)이라는 것은 명교의 부도가 있는 집이다." 그런데 잠광원은 민국초기에 쓴 <<평양현지>>에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염정진 홍가촌의 91세된 노인 홍문광은 그도 이 절을 본 적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성과 현에서 사람들이 찾아왔었다고 한다. 전문가들은 일치하여, 홍가촌 독저자연촌 대강산록의 대나무숲이 있는 곳이 바로 잠광원의 유지라고 본다. 앞은 민방이고 뒤는 청나라때의 고묘가 있다.

 

<<죽서루기>>는 상세하게 잠광원의 주변에서 명교가 전파되는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당시, 잠광원 안에는 명교의 상층 승려인 석심상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하루종일 현지의 사대부들과 "하늘을 광활함을 바라보고 계곡의 그윽함을 내려다보았다" 아주 풍류적이었던 것같다. 현지 사대부들은 석심상인을 아주 높이 평가했다. 그리고명교신앙에 대하여도 긍정적이고 숭상하는 뜻을 나타냈다. 당시 명교는 "복건성사람들이 많이 믿었다" 그리고 명교의 교도들은 계율이 아주 엄격했다. 절대로 채식을 해야 하고, 매일 1끼를 먹으며, 낮에는 태양에 절하고, 밤에는 달에 절한다. 매일 저녁 정시에 마니광불을 참배해야 한다.

 

선진사와 잠광원 유지가 확인되기 전까지, 학계에서 공인된 마니교사원은 복건 진강의 화표산 초암뿐이었다.

 

규화(葵花, 해바라기)의 수수께끼

 

하나의 사원은 면모가 완전히 바뀌었고, 하나의 사원은 이미 사라졌다. 명교사원의 건조양식은 시종 알 수가 없다.

 

이때, 세번째 유지가 사람들의 시야에 들어온다. 그것은 평양의 북쪽에 있는 서안조촌진 허독촌에 있고, 절이름은 "명교사(明敎寺)"이다. 서안시에서 24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비록 "명교사"라는 세 글자만으로는 그것이 명교사원이라고 확정하기 힘들다. 그러나 허독명교사의 산문에는 두공(斗拱)식의 서양식 구조를 가지고 있다. 문에는 "명교사"라는 세 글자를 쓰고 위에는 태양과 광선을 도안했다. 이는 명교가 광명을 숭상하는 것에 부합된다. 절강남부에 유일하게 명교의 특징을 간직한 종교건축물이다.

 

현지의 기록에 따르면, 명교사는 904년에 건립되었다. 당나라말기 "조애 형제가 복건 장계에서 조촌으로 이주하여 정착하였고, 쌍룡계의 곁에 명교사를 지어 널리 포교했다"고 되어 있다.

 

이 절은 여러번 무너지고 새로짓기를 반복했다. 32년전에 현재 주지인 명여사태가 절로 들어올 때는 산문과 모옥 1칸만이 남아 있었다. 나중에 모옥도 비바람에 쓰러진다.

 

또 명교사원임을 증명할 수 있는 물건이 있을까? 명여사태는 파격적으로 기자들에게 보물을 보여주었다. 그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두 개의 해바라기 조각이었다. 모두 산문의 위에서 떨어진 것이다.

 

해바라기와 명교는 직접적인 관계가 있을까? 임순도에 따르면, 그도 본 적은 없다고 한다. 그러나 상식으로 추측하면, 태양숭배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한다. 만일 확인된다면, 이 절은 확실히 명교의 절이라고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쇠퇴의 수수께끼

 

선진사이건, 잠광원이건, 명교사이건 불문하고 모두 오래전에 사라져버린 쇠퇴의 기운이 느껴진다. 명교는 온주에서 어떻게 흥성하고 어떻게 몰락하였는가?

 

마니교는 원래 불교의 교의를 흡수한 후에 창립되었다. 전파과정에서 중앙아시아와 동아시아의 마니교 전도사와 경전번역자들은 마니교의 교의와 의식을 다시 불교화했다.

 

694년, 페르시아 승려인 불다탄(拂多誕)이 마니교 경전 <<이종경(二宗經)>>을 가지고, 중국으로 온다. 명교가 정식으로 공식유입된 것이다.

 

마니교가 중국에 전래된 초기에는 적극적으로 불교와 도교에 의탁하여 생존했다. 돈황문서 <<노자화호경(老子化胡經)>>은 바로 노자가 서쪽 페르시아로 가서 마니로 화신했다는 주장이다. 마찬가지 주장이 중국도교경전에도 기록되어 있다.

 

마니교는 적극적으로 도교에 의탁한다. 도교도 적극적으로 마니교를 흡수하여 그것을 도교의 한 갈래로 하고자 한다. 다시에 조정은 명교 경전을 <<도장(道藏)>>에 편입시킨다.

 

당나라때 "회창멸불"이후 마니교는 중국화된 명칭으로 다시 등장한다: 명교(明敎). 명교는 바로 완전히 중국화한 민간마니교이다. 교의는 이종삼제이론에서 "청정광명대력지혜(淸淨光明大力知慧)"의 여덟글자로 바뀐다.

 

불교에 대한 의탁과 자신의 교의를 간명하게 함으로써 명교는 민간에서 널리 전파된다. 송나라때부터 원나라때까지, 관청은 금지하기도 하고 풀어주기도 했다. 그러나 명교가 끊어지지는 않았다. 그저 복건, 절강 일대의 바닷가에서 살아남았을 뿐이다.

 

원나라때 명교는 합법적으로 전도할 권리를 획득한다. 그리하여 다른 민간종교와는 거리가 멀어진다. 전통적인 비밀활동형식의 "결사"에서 공개 혹은 반공개로 전환된다.

 

원나라때 명교교도의 또 다른 활동방식은 바로 세상과 다투지 않는 사원식 수행이었다.

 

<<죽서루기>>에 나오는 명교도는 내렴(內斂), 경건(敬虔), 엄근(嚴謹)하다. 오랫동안 명교도의 행적은 궤이하고, 선동적이라는 이미지를 지니고 있었는데, 그것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그들은 사원식 수행을 하는 명교도였던 것이다.

 

역대이래로 농민반란에 참여하고, 관청에 반항한 명교도는 주로 민간비밀결사였다. 이들 민간비밀결사는 왕왕 도잇에 다른 민간종교신앙도 흡수한다. 역대 봉건왕조의 통치자들이 보기에, 비밀결사의 민간종교신도는 반란분자와 같았다. 모조리 "흘채사마(吃菜事魔)"의 모자를 씌웠다.

 

최근 들어 어떤 사람이 이런 의견을 내놓았다. 방랍(方臘)의 반란과 명교도는 전혀 관계가 없다. 그 중요한 이유는 명교도는 흰색을 숭상하는데 방랍은 붉은 색을 표지로 삼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사회과학원의 마서사, 한병방 두 교수는 <<중국민간종교사>>라는 책에서, 방랍군이 홍건을 맨 것은 바로 거기에 미륵교등 다른 민간종교가 융합된 결과라는 것이다. 이후 원말의 백련교의 난도 마찬가지이다.

 

명나라초기에 이르러, 복건, 절강의 두 지역은 이미 중국에서 유이하게 남은 명교유행지가 되었다. 이때 온주의 명교는 여전히 활발했다. 그리하여 관청이 주목을 하게 된다. 절강안찰사 웅정은 핑계를 잡아서 명교를 금지한다. 명나라황제도 어지를 내린다: "...명교, 백운종회등의 우두머리는 교살형에 처한다" 명문으로 명교를 금지한 것이다.

 

공개활동권리를 박탈당한 명교는 마침내 명나라 중엽이후 점차 불교와 다른 종교에 섞여들어간다. 겉으로는 구분이 잘 되지 않게 된 것이다.

 

명교가 불교, 도교에 의탁하였기 때문에 완강한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결국은 바로 불교와 도교에 의탁했기때문에 몰락의 길로 들어선 것을 되돌릴 수가 없었기도 하다.

출처 http://m.blog.daum.net/shanghaicrab/16152771?categoryId=76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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