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입니다. 길이에 쫌 압박이 있지만, 찬찬히 여유를 가지고 읽어보면 조목조목 맞는 말이네요. 요즘 같은 세대에 이런 사상을 가지고 계신 목사님만 계시다면, 기독교도 욕 먹지 않을텐데요.. 여유를 가지고 읽어보십쇼^^ 근데 안타까운것은 이 설교를 하신 감리교의 채희동 목사라는 분이 지난주에 작고 하셨다고 하네요 젊다고 하던데.. 80년대 학번이라고 들은듯.. 아깝네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감리교 홈피에서 펌질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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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장된 예수, 교회 안에 '가득'
(로마서 10장 9~13절, 야고보 2장 14~26)
1517년 마르틴 루터와 깨어있던 종교가들은 부패한 기독교회를 개혁하고자 하였습니다. 마르틴 루터로부터 비롯된 개신교의 정신은 아마도 개혁정신일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기독교회의 개혁정신은 실종된 지 오래되었고, 자기 스스로 개혁할 힘을 잃어버려 이제는 사회와 국가로부터 개혁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은 완성된 것이 아니라 미완의 개혁이었습니다. 종교개혁은 현재 진행형이 되어야 합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제2의 종교개혁을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500년 전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한 당시의 교회 모습과 너무나 흡사하기 때문입니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을 상징하는 것 중에 하나를 꼽으라고 한다면, 아마도 면죄부 판매일 것입니다. 그 당시 기독교회는 잘 알다시피 높은 성전을 짓고 부를 얻기 위해 면죄부를 팔았습니다. 면죄(Indulgence)는 교회에 일정한 액수의 돈을 바치면 연옥에서 형벌을 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면죄를 보증하는 증서가 교황의 대사에 의해 발급되었습니다. 교황의 면죄특권은 살아있는 자신 뿐 아니라 이미 죽은 자에게도 유익하다고 가르쳤습니다.
교회는 면죄부를 구입하도록 설교하였고, 마침내 면죄부는 건축 중인 베드로 성전 앞에서 돈을 받고 면죄부를 팔아 천국 티켓을 매매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에 대해 루터는 "교황 자신은 죄를 사할 수 없다(6조)" "그러므로 면죄부를 구입하도록 설교하는 것도, 교황의 면죄부를 구입하는 것도 모두 잘못된 것이다(21조)" "면죄부에 따른 구원에 의존하는 것은 헛된 것이다(52조)"고 반박하였습니다.
요즘 한국교회에서 보여주고 있는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면 중세 기독교회에서 행했던 위험스러운 일을 보게 됩니다. 마치 면죄부의 성격을 가진 헌금을 설교를 통해서 강요하고, 교회마다 수없이 많은 각 종류의 헌금 목록을 개발해서 성도들로부터 헌금을 거두어들이고 자신들만의 높고 화려한 성전을 쌓기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성도들 또한 자기들의 죄를 헌금을 드림으로 사함을 받을 수 있다는 커다란 착각을 하며 드렸습니다.
일주일 동안 죄를 짓고 주일날 교회에 나와 거금의 헌금을 드리고 나면, 자신의 죄가 사해진다는 면죄부의 성격을 갖고 헌금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저마다 목소리를 높여 헌금의 중요성을 설교하고, 헌금을 드려야만 천국 보장을 받을 수 있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너무나 타락하고 부패한 중세 기독교회의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거둔 헌금은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데 사용하지 않고,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데 쓰지 않고 중세 기독교회처럼 교회를 살찌우는데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비대해질 대로 비대해진 교회는 엄청난 부와 막강한 권력을 갖게 되었고, 이제는 세상을 변화시켜야 할 교회가 개혁의 대상이 되었으며, 국가권력도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루고야 말았습니다.
또 당시 중세 기독교회에는 막강한 부와 권력이 집중되었습니다. 성직자와 교회법은 천하의 법이어서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과 직접적인 계시가 주어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오직 성직자와 교회에만 그 권위가 주어지며, 하나님의 말씀까지도 독점을 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루터는 만인사제직을 말했습니다. 모든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받고 전할 수 있는 만인사제임을 역설하였습니다. 그 당시 기독교회는 부패할 대로 부패했고 오만할 때로 오만해 졌습니다. 썩어서 고름이 터져야 새살이 돋듯이 심각하게 부패한 기독교에 마르틴 루터라는 한 개혁가를 통해 새살이 돋아나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 성직자들의 모습을 보면 중세 기독교회의 성직자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자기 자신을 교회와 동일시하면서 교회의 모든 권한을 자신이 홀로 독점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중세에도 없던 성직의 세습은 이제 당연시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오만과 독선, 세속 권력에 대한 집착은 중세 기독교회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시청 앞에서 낯부끄럽게 예수님 찬양이 아닌 미국 찬양을 부르게 되었고, 한국교회를 더욱 어둠 속에 몰아넣고 있습니다. 이제 저들의 안중에는 하나님도 계시지 않는 듯 합니다.
며칠 전에 KBS에서 '한국 사회를 말한다'라는 프로에 한국교회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프로가 방영된 적이 있었습니다. 이 프로에서 목사와 평신도 간의 분열, 성직 세습, 헌금 유용, 수백억 원을 드려 건축 중인 교회의 모습, 시청 앞에서 미국 성조기를 들고 미국 찬양가를 부른 교회 지도자들, 세상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세상을 어둡게 만드는 교회의 모습이 보여졌습니다.
이 프로에서 교회가 본래 간직하고 있어야 할 모습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모두 버려야 할 못된 것들만 보여졌습니다. 이 프로를 본 교회 지도자들은 크게 반발했지만 많은 이들은 공감을 했고, 또 교회도 개혁의 대상이 되어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해 주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 예수가 계시기나 합니까. 예수는 계시지 않고 거대한 교회 건물과 성직자들의 권위, 그리고 값싼 은총과 축복, 자본주의 메시지와 무당 못지 않은 주술로 포장된 교회 안에 예수께서 자리할 수 있는 곳은 하나도 없습니다.
죽재 서남동 목사는 "나는 한국에 있는 95%의 근본주의자들과 싸우기 위해 신학을 한다"고까지 말했습니다. 성서 속에 담겨져 있는 예수의 말씀과 삶은 없고,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는 교리와 교회법과 성직자의 권위로 똘똘 몽친 한국교회와 그 지도자에게 예수 정신이 살아날 수가 없으며, 그래서 오늘날 이러한 95%의 교회 지도자들을 개혁하지 않으면 이 땅에 교회는 아무런 의미를 찾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저들은 저마다 예수를 현대 자본주의의 옷으로 갈아입히고 하나의 상품으로 만들었으며, 갖가지 다양한 이벤트를 열어 예수를 팔아 장사를 하고 있습니다. 중세의 면죄부가 오늘날 한국교회에서도 판매되고 있습니다. 성전에 드리는 예배는 장사꾼들의 시장 터 못지 않습니다. 사업적인 마인드로 철저하게 무장된 대형교회들은 설교도 사업적 메시지요, 교회운영도 기업적이며, 교회 지도자도 최고경영자와 같습니다.
저는 한국교회의 대안은 농촌교회와 같은 작은 교회가 그 대안이라고 생각합니다. 거대 자본에 밀려 죽어 가는 농촌사회에서 텃밭을 일구며, 자기 식량은 자기가 얻으며 사는 소농들이 그 대안이듯이, 작은 사랑의 공동체가 한국교회의 대안입니다. 서로 주님의 말씀으로 모여 다시 주님의 사랑을 들고 세상으로 흩어지는 공동체, 아픔도 슬픔도 경험할 수 있고 그것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랑의 공동체, 이러한 교회 공동체는 아주 작아야 가능합니다. 이 작은 사랑의 공동체만이 이웃을 섬기며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살아날 수 있는 길은 예수에게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예수의 영을 회복하고 예수의 삶을 재현하는 것입니다. 목사가 교회의 주인이 아니라 예수께서 교회의 주인이 되셔야 합니다. 예수가 살아난 교회, 그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구원이 있고 하나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예수의 삶을 재현하는 기독교인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저 자신도 예수의 삶을 재현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하면서 야고보서를 버리고 바울만을 택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문서라고 폄하했던 루터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롬 1:17)라는 로마서 말씀만을 강조했습니다. 복음서 기자들이 예수님의 생애를 통한 예수의 삶을 재현했다면, 바울은 행함을 믿음으로 대치시켰습니다. 오늘 봉독한 말씀처럼 바울은 마음으로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입으로 예수의 이름을 부르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했습니다. 행함을 믿음으로 대치시켰습니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은 미완의 개혁이었습니다. 마르틴 루터 이후, 아니 바울 이후 오늘날 기독교회는 예수를 믿기만 하지 예수를 살지는 않습니다. 예수는 마음으로, 입으로 믿을 뿐, 그 예수를 자기의 삶 속에서 재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단지 믿음의 대상이 되고, 예수께서 사셨던 사랑과 희생의 삶은 그저 예수 자신의 삶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러한 마르틴 루터의 신앙관을 이어받은 한국교회는 머리만 있고 손과 발이 없는 기형적인 신앙관을 갖게 되었습니다. 엊그제 병원에 입원해 계신 이순임 집사님을 뵙고 왔습니다. 집사님께서 입원해 계신 병실에는 모두 세분의 할머니들이 입원해 계셨는데, 그중에 몸짓이 좀 크신 할머니께서 제가 목사라는 사실을 안 순간부터 제가 듣거나 말거나 저를 향해 혼잣말로 무언가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가만히 그 할머니의 말씀을 들어보니, 당신은 42세에 남편과 사별하여 혼자 6남매를 키웠는데, 고생하여 키운 자식들이 늙은 자신을 돌보-지 않는다는 서운한 말씀이셨습니다.
그중에 큰아들은 당신이 입원한 뒤에 한 번도 찾아오지 않고 전화를 해서는 '어머니 교회에 꼭 나가세요. 제발 교회 다니세요'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병상에 누워 저를 향해 하신 할머니의 말씀이 제 가슴에 꼭 박혀있습니다.
"도대체 목사님, 자식 도리 제대로 못하면서 교회 다니면 무엇합니까? 교회라는 곳이 그런 곳이라면 제가 왜 갑니까?"
할머니의 말씀을 듣고 저 자신이 부끄러웠을 뿐만 아니라, 이것이 한국교회의 신앙관이요, 현실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회는 예수를 믿되 입으로 고백하고 마음으로 믿을 뿐이었습니다. 예수의 예수, 우리의 길이요 진리와 생명 되시는 예수가 아닌 2000년 동안 내려오면서 옷 입혀지고, 포장된 예수가 오늘날 교회 안에 가득하고, 그 포장된 예수를 참 예수라고 믿고 기도하고 헌금하고 예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회는 예수를 단지 입으로 고백하고 마음으로 믿는데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삶을 오늘 자신의 삶 속에서 재현하는데 진정한 의미가 있습니다. 니체의 말처럼 "십자가 위에서 죽은 자가 살았던 것과 같은 삶만이 기독교적일 뿐"입니다.
저도 아직 예수가 어떠한 분이지 잘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 분의 삶을 재현하는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입으로 고백하고 마음으로 예수를 믿을 뿐만 아니라 제 삶을 통해 예수를 살아가도록 힘쓰고 싶습니다. 그래야 제 삶에 구원의 빛이 빛나고 교회가 교회다울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제 한국교회는 예수에게로 돌아가는 개혁을 해야 합니다. 예수의 말씀을 마음으로 믿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삶 속에서 살아가야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로, 축복지상주의로, 바알신으로, 맘몬신으로 넘어가 물질축복과 교회 건물 중심지상주에 빠진 한국교회는 성서가 가르쳐준 예수, 그 분이 사셨던 삶을 재현함으로써 하나님나라와 그 의를 이 땅에 온전히 이루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