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론적 창조론이란 무엇인가? 아직도 대다수의 기독교신자들이 진화론을 부정하고 창조과학이나 지적 설계론을 지지한다. 하지만 모든 기독교신자들이 진화론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며, 진화를 인정하면서 신을 믿는 신자도 있다. 이들은 거의 대부분이 진화와 창세기를 모두 받아드려서
‘하나님께서 진화를 통해 생명을 창조하셨다‘라는
’진화론적 창조론‘을 지지한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가자면, 여기서
‘진화를 통해 생명을 창조‘ 라는 표현은 적합하지 않다. 생명은 진화를 통해 창조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 진화를 통해 창조했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생물의 각 ’종’이다. 각 종대로 창조하는 것을 진화를 통해 이뤘다는 것, 이것이 진화론적 창조론의 설명이다.
차려놓은 밥상에 수저 얹는 행위 이러한 설명을 과연 합당할까? 누군가는 이렇게 말한다.
‘그렇게 설명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아, 물론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볼 때 이러한 설명은 매우 파렴치하고 꼴불견스런 끼워 맞추기에 불과해 보인다. 처음에는 성경 문자 그대로 태초에 각 종대로 다 창조했다고 떠들더니, 나중에 진화론이 등장하고 이것이 확립되자 거기에 발맞춰서 다시 설명하는 식이다. 그러면서
‘어쨌든 성경은 맞아’ 라고 한다. 진화론적 창조론을 굳게 믿는 사람들은 이렇게 반론한다.
‘어쨌든 말은 되지 않아? 끼워 맞추든 어쨌든 논리적 하자는 없자나. 뭐가 문제인데?’ 뭐가 문제일까? 일단 첫 번째 문제는 두 가지에 대해 아무런 증거가 없다는 것이다.
첫째, 진화를 통해 창조를 이루었다는 것에 대한 증거.
둘째, 그걸 이룬 존재가 하나님이라는 증거. 나는 앞선
‘무신론자는 신이 없음을 증명해야 할까’ 라는 글에서 증명의 책임은 유신론자에게 있음을 증명한 바 있다. 이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진화가 일어났다는 설명에다가 불필요하게 신을 갖다 붙이고 싶다면 그것에 합당한 근거를 가져와야 할 것이다. [
무신론은 신이 없음을 증명해야 할까? 종교적 신의 존재를 따지기에 앞서 듣는 해묵은 반론은 ‘그럼 신이 없다는 건 증명할 수 있는가?’ 이다. 그러면서, 이건 양측이 증명할 수 없으니 양측 모두 신념에 불과하고, 피차일반이라는 결론으로 도약하려 한다. 나는 이것을 일종의 궤변이라고 생각한다. 아주 쉬운, 내가 자주 쓰는 예를 하나 들겠다. 당신의 손등 위에는 투명한 딱정벌레 한 마리가 앉아있다. 물론 보이지 않겠지만 사실 그 딱정벌레는 투명해서 우리 눈으로는 절대 볼 수 없다. 당신이 만지려는 순간 그것은 당신의 반대편 손등으로 순간이동을 하고, 어떻게 해서든 관찰을 피한다. 물론 질량 따위도 없어서 무게를 잴 수 없다. 당신은 이 딱정벌레의 부재를 증명할 수 있는가? 나는 실제로 이것을 “3초 전에 세상이 창조되었어!”로 바꾸어서 친구 3명에게 실험을 해봤다. 결과는 아니나 다를까, 세 명 모두 자신은 그것이 말도 안 됨을 증명할 수 없다고 했다. 사실 여기서 중요한건 세 명이 그것이 말이 안 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주장을 꺼낸 사람이 그것의 타당성을 입증하는 것이다. 아, 물론 그렇다고 해서 어떤 상황이든지 먼저 주장을 꺼낸 측이 타당성을 입증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럼 누가 입증해야 할 것인가? 입증의 책임은 누구에게로 향할까? 그것은 무언가의 존재를 주장하는 쪽이다. 딱정벌레이든 3초전의 천지창조이든 말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없다면 부재에는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 거기에 없다는 증거를 구할 때, 그것이 거기에 있다는 증거를 찾지 못한다는 것 외에 어떤 다른 증거가 또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존재하지 않는 것에는 아무런 표시가 없다. 그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유일한 증거가 되는 것은 그 존재의 표시가 부재하다는 사실이다. 딱정벌레와 3초전의 천지창조에 대한 아무런 표시가 없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이 없다고 판단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없다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것이 존재한다고 주장한 쪽에서 증거를 꺼내오는 것이다. 따라서 신에 대한 아무런 증거가 없는 지금, 우리는 신이 없다고 판단할 수 있다(그리고 이것은 신이 있다는 주장에 비해 합리적으로 우월하다). 따라서 종교적 신의 존재 여부에 대해 논하려면 무신론이 부재를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 측에서 신이 존재함을 증거 할 수 있는 것을 가져와야 한다.] 근거도 제시하지 않은 채
‘논리적으로 말은 되잖아?’ 라면서 믿겠다는 건
‘난 생각하기 귀찮아. 그냥 믿을거야’라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는 태도다. 이러한 경우에도 순수한 진화론은 진화론적 창조론보다 합리적으로 우월하다.
두 번째 문제는 ‘논리적 하자가 없다면 문제없는 것‘ 이라는 태도다.
‘말은 되잖아?‘ 식으로 말하면서 그것을 정당화한다면 우리는 세상이 3초 전에 창조되었다는 주장도 논리적 하자가 없으므로 상당히 정당하고 나아가 검토해볼 가치가 있다고 여겨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나가자면 우리는 무수히 많은 창조론을 만나게 된다. 적어도 ’진화론적 창조론’과 ’3초전 창조론’ 만 봐도 그렇다. 뭐가 진짜인가? 둘 중 하나는 분명히 거짓이다(둘은 논리적으로 양립 불가능하다). 둘 다 말은 된다. 그럼 여기서 필요한건 무엇일까? 그건 앞에서도 말했듯이 합당한 근거이다. 아무런 근거 없이는 3초전도, 4초전도, 5초전도 가능하다. 필요한 건 근거다.
세 번째 문제는 설계의 불합리성이다. 적어도 우리가 아는 하나님은 자애롭고 전지전능하며 절대선이다. 따라서 그의 설계는 전지전능하며 자애롭고 현명하다는 명성에 맞아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복잡성은 분명 뛰어나지만, 설계는 당장 살기 바빠서 미래를 내다보지 못한 것 마냥 땜질해댄 자국의 연속이다. 시신경은 망막을 뚫고 자리 잡고 있으며, 생물들은 불필요한 기관들을 몇 개는 갖고 있다. 인간은 설계와 맞지 않는 행동 때문에 디스크에 고생하며 비만에 허덕인다. 기술적 문제만이 아니다. 적어도 자애롭다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맵시벌과 같이 다른 개체의 몸속에 자리 잡아 신선한 고기를 얻기 위해 마취를 시킨 채 죽을 때까지 갉아먹는 녀석을 창조했다고 한다. 이게 말이 되는가? 만일 진화론적 창조론이 정말 맞다면 신은 ‘싸이코패스적 성향을 가진 저급 설계자’일 것이다.
진화를 통해 종을 창조한다? 진화론적
‘종‘이란 필수 요소이다. 왜냐하면 진화를 통해 각 종대로 창조했다는 것이 진화론적 창조론의 기초 설명이고, 하나님이 인간만을 특별히 여긴다고 보았을 때 인류라는 종이 반드시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물학적으로 보면 어떨까? 종은 실체할까? 나의 성급함에 결론부터 말하자면 종은 실체하지 않는다. 그것은 생식을 기준으로 한 분류학적 잣대에 불과하다. 물론 나는 단순히 인간의 기준으로 나누었기 때문에 실체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종은 명확하게
‘실체 불가능’하다. 종의 분화, 즉 대진화란 소진화의 연속된 누적의 결과이다. 커다란 생수통에 물을 한 방울씩 떨어뜨리다보면 어느덧 생수통이 다 차듯, 세대간의 변화가 누적되다보면 나중엔 결국 서로 교배가 되지 않을 정도로 달라져버리는 것이다.
(위 그림은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에 나온 표를 보고 만든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그림에서 X와 Y는 서로 교배가 가능한 동종이다. 이 두 개체는 서로 다른 지역에 떨어져 살게 되었고, 서로 다른 두 지역은 환경 또한 다르다. 자연선택에게 있어서 환경은 선택압을 조장하는데, 둘은 서로 다른 환경에 놓여있으므로 서로 다른 ‘선택압A’와 ‘선택압B’를 받게 될 것이다. 환경이 바뀌지 않는 한(바뀌어도 상관없다) 선택압은 한쪽으로 지속될 것이고, 이러한 상태로 각 개체로부터 1만세대가 지난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그림과 같이 돌연변이가 일어나는 과정에서 개체들은 선택압에 따르는 쪽이 더 잘 살아남아 번식하게 된다. 각 개체들에겐 세대를 거듭할수록 선택압에 따르는 방향으로 작은 돌연변이들이 누적된다. 그리고 1만세대가 지난 후 X′과 Y′은 각각의 선조 X와 Y로부터 상당히 멀어졌고, 교배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종은 이렇게 분화하게 된다, ] 여기서 중요한 것은 X′과 Y′을 어디서부터 선조 X, Y와 ‘다른 종‘ 이라고 분류해야 하는가이다. 다른 종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서로 교배가 불가능함을 일컫는 말이다. 즉, 종이라는 개념이 실체한다면 어느 순간부터는 부모세대와 교배가 불가능해야 한다 (그래야 부모세대와 다른 종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유성생식의 경우 불가능하다.
[어느 한 순간부터 부모세대와 교배가 불가능한 상황이 만들어지려면 그 개체는 부모세대와는 엄청난 유전적 차이를 보여야 한다. 하지만 유전자 하나가 돌연변이를 일으키는 확률을 따져봤을 때, 이것은 천문학적 확률의 경우가 된다. 그리고 문제는 그렇게 부모세대와 교배가 불가능해지면 번식을 할 수 없다. 따라서 그림2와 같이 모든 개체는 부모세대와 교배가 가능해야 하고, 이것은 실질적으로 어느 순간부터 새로운 종이 생겨나지 않음을 증명한다. 물론 동시대에 사는 근연 개체와는 교배가 가능하면서 유전적으로 약간의 변이만을 갖는 식으로 소진화가 누적되면 어느 순간부터는 먼 조상과 확연한 차이를 갖게 된다. 나는 종이 역사적으로 어느 순간 분화되지 않는다고 줄곧 얘기해왔지만, 결국 종은 분화된다. 교배되지 않는 두 개체가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상당히 단편적인 시각에서 나오는 판단에 불과하다. ]
[A종끼리, B종끼리는 교배가 가능하다. 하지만 A종의 개체와 B종의 개체가 만나 서로 교배하기에는 너무 멀어져버렸다. 마지막 세대에서 보자면 둘은 서로 다른 종이 된 것이다. 하지만 세대를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각 개체들은 모두 부모세대와 교배가 가능하다. 즉, 종이란 어느 순간 분화되는 것이 아닌, 특정 세대를 기준으로 한 구분인 것이다. 얘기가 너무 지저분하게 흘러온 것 같다. 아주 가깝고도 친근한 인류와 침팬지를 예로 들어 설명해보겠다. 현재 인류와 침팬지는 서로 교배가 불가능하다. 그래서 둘은 서로 종이 다르다. 하지만 그렇다고 어느 순간 공통선조에서 ‘인간‘ 이라는 종이 생겨나고, ’침팬지‘ 라는 종이 생겨난 것은 아니다. 소진화의 연속선상에서 각 개체들은 동시대의 근연개체와 교배가 가능했으므로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럼 어디서부터 인간이라고 봐야할까? 답은 인간이라고 볼 수 있는 지점 따윈 없다는 거다. 이건 앞에서도 말했지만 아주 단순한 시대적 관점에 불과하다. 우리는 지금 이 시대에서 바라보기 때문에 침팬지와 인간을 분류하고, 둘을 다른 종으로 나누지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진화적 연속선상을 이해한다면 인류라는 개념은 지극히 허구임을 깨닫게 된다. ]
신이 사랑해줄 인간은 어디에? 나는 앞에서 어느 순간부터 인간이라는 종이 출현했다고 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했다. 따라서 신이 진화를 통해 인간을 창조했다는 말은 말이 되지 않는다(이해가 안된다면 내 글쓰기 솜씨가 모자란 탓이다. 당신에게 <눈먼 시계공>을 추천한다). 적어도 하나님이라는 분이 인간에게만큼 특별하다면 특별하게 여겨줄만한 인간이 있어야 하는 게 맞지 않을까? 그런데 아쉽게도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인간이라고 규정짓는 것이 불가능하고, 조금 더 나아가서 모든 개체들은 서로가 다를 뿐이지, 본질적으로는 갈라져 나온 진화적 연속선상 위의 한 점으로써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인간을 사랑해줄 신은 어디에? 그럼 인간을 창조했다는.. 자신의 자식을 사랑한다는 신은 도대체 어디 있는 걸까? 그가 심판해야할 인간이 없는 마당에서, 없는 존재를 심판할 존재는 과연 존재하는가? 나는 이런 무의미한 질문들의 끝엔 결국 부정적 대답만이 속출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울러서 그것은 기독교적 신 하나님에 대한 부재로 나아가서, 진화론이 인간을 사랑해줄 신 따윈 존재하지 않음을 ‘입증‘ 해준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의 생각에 허점이 있고,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비판받을 일이고, 지금으로써는 내 주장을 펴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한다. 아주 간단히 나의 주장을 정리하자면 ’진화론은 기독교의 창세기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없음을 입증할 수 있다‘ 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했고 사랑한다는 전제가 사라지지 않는 한, 나의 입증 또한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출처]한국 무신론자 모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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