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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영웅 혹은 폭군 - 스탈린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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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리볼버오셀롯
추천 : 4
조회수 : 846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1/04/18 13:28:08
7. 시베리아 유형

일단 중앙 진출후 활약한 스탈린은 신인 볼세비키로 그 이름을 서서히 알려가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 시간을 길지 못했다. 정부 당국의 눈길을 끌었기 때문이다. 결국 스탈린은 다시 1913년 감옥을 나온지 1년만에 다시 잡히는 신세가 된다. 만약 그가 붙잡히지 않았다면 좀더 유명한 혁명가가 되었을 테지만 불행히 그는 중요한 시기에 잡혀서 허송세월을 하게 된다. 결국 10월 혁명 당시에는 스탈린은 주요 혁명가 명단에 들지도 못했다. 

정부는 이번만큼은 탈옥의 달인 스탈린도 빠져 나오기 어려운 곳으로 유배를 시킨다. 저 멀리 북극권에 가까운 시베리아의 오지, 예니세이 지방의 투루한스크였다. 이 지역이 빠져 나오기 힘든 이유는 철조망이 높거나 감시가 삼엄해서가 아니었다. 150만 평방 킬로미터에 달하는 곳에 사람사는 마을이라곤 손에 꼽을 정도 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탈출해도 갈곳이 없을 정도의 광활한 오지였다.

 여기에다 러시아 당국은 친절하게도 스탈린을 아름다운 오로라가 더 잘보이는 북쪽의 쿠레이카로 다시 이동시킨다.  보통 1년 만에 탈출하던 스탈린도 이번만큼은 4년이나 수감될 수 밖에 없었다. 

혹자는 이렇게 중요한 시기에 스탈린이 유배 생활을 했기 때문에 그가 오흐라나의 이중 첩자일 가능성은 떨어진다고 말하기도 한다. 사실 그가  이중 첩자라면 러시아 혁명 이전에 유용하게 쓰일 수도 있는 상황이었는데도 그냥 수감된 점은 분명하다. 

그동안 러시아는 세계 대전에 소용돌이에 휘말리지만 스탈린은 과거 마차 사고 장애로 인해 징집도 피해갈 수 있었다. 오히려 전장에 끌려간 수많은 러시아의 젊은이들은 빈약한 보급과 무능한 지휘관 때문에 많은 고통을 당하던 시기였다. 

이 시기 혹한의 추위를 지닌 오지라는 점을 제외하고는 지낼만한 유형지에서 스탈린은 그럭저럭 동료들과 지내면서 유배생활을 했다. 워낙 오지인 관계로 별로 감시의 눈길도 심하지 않아 스탈린은 낚시를 즐기거나 담배를 피우면서 유형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낚시를 통해 소일 거리도 되고 식사의 질도 높일 수 있으니 일석 이조였다. 그러나 이런 엘레강스한 유형 생활은 스탈린 본인의 집권시절에는 결코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 앞서 포스트에서 설명했듯이 스탈린은 러시아 제국처럼 느슨하게 반대파를 다루지 않았다. 

8. 10월 혁명

4년간 시베리아에서 휴식 (?) 을 취하던 스탈린에게도 봄이 찾아왔다. 러시아에서 2월 혁명이 발생한 것이다. 당시 수도 상트페트로부르크에서 빵을 달라던 여성들의 시위가 커지고 이를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은 병사들까지 가담하면서 결국 혁명이 발생한 것이다. 

레닌은 4월 테제를 발표하고 당시 부르조아 세력과 멘세비키 세력을 공격한다. '임시 정부 타도,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고 외치는 볼세비키들에 대해서 당시 러시아 임시 정부는 계속되는 전쟁으로 말미암아 제대로 혼란을 수습하지 못했다. 케렌스키 임정 수반은 군대를 불러들여 이를 진압 하려했지만, 계속되는 전쟁과 혁명 이후의 혼란을 잠재우기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1917년 11월 7일 (러시아력으로 10월 25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볼세비키 군사 혁명위원회 위원장 트로츠키에 의해 최초의 소비에트 정부 수립이 선언되었다. 10월 혁명이 발생한 것이다. 이 글이 10월 혁명에 대한 것이 아니기에 10월 혁명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여기서 오히려 주목해야 하는 점은 스탈린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 다는 것이다. 후세에는 레닌, 트로츠키, 스탈린이 같이 비교되지만 아직 1917년에 러시아인들에게 스탈린이라고 하면 '그게 누구?'라는 답변을 듣게될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비록 스탈린이 집권 이후 많은 조작을 가하긴 했지만 훗날 발혀진 바에 의하면 스탈린의 귀환은 금위환양은 아니었다. 1917년 3월 12일 카메네프 (앞서 포스트에서 본 동료)와 함께 기차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한 스탈린 일행은 비록 꽃다발을 든 소녀와 군악대를 바라지는 않았더라도 환영은 받을 줄 알았다. 그래도 스탈린은 한 때 볼세비키 중앙위원회 위원이지 않았는가? 그러나 기차역에 도착한 스탈린이 목격한 건 썰렁하기 짝이없는 승강장에 버들가지로 짠 여행가방을 든 자신뿐이었다. 

과거 스탈린은 독단적이고 급진적, 공격적인 성향으로 인해 주위 혁명가들로 부터 견제를 자주 받긴 했다. 실랴프니코프와 몰로토프 아래있던 러시아 사무국은 같이 귀환한 무라노프는 사무국에 쉽게 자리를 내주었으나 스탈린의 경우는 말할 수 없는 '개인적인 기본 특성' 에 비추어 고문으로 모시기로 했다. 아마 그의 성향과 과거 독단적 행동을 문제 삼았을 것이다. 그나마 같이온 카메네프는 아예 외면을 받았다는 게 위안이었다. 

 이들은 자신의 과거 성향을 어느 정도 반성하고 나서 당에 다시 받아들여 질 수 있었다. 특히 스탈린은 처음에는 그 답지 않은 비교적 온건한 계획을 들고 나왔다가 레닌의 4월 테제를 접하고 난 후 자신의 노선을 레닌의 노선에 맞추는 작업까지 해야 했다. 그러나 레닌은 자신의 충실한 추종자를 내버리진 않았다. 레닌의 후원 속에서 스탈린이란 나무는 성장할 수 있었다. 

레닌의 지지 속에서 스탈린은 다시 중앙위원회에 선출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 '스탈린' 이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대의원은 별로 없었다. 심지어 레닌이 그의 더 잘알려진 필명 중 하나인 '코바' 동무라고 말해 주어야 할 정도였다. 아무튼 레닌의 지지 연설덕에 그는 당선될 수 있었다.

스탈린은 레닌이나 레온 트로츠키 처럼 뛰어난 연설가는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트로츠키 처럼 주목받지는 못했다. 그는 글로 쓰는 것을 더 선호했고, 겉으로 들어나는 일보다 배후에서 일을 조정하기 원했다. 이는 이후에도 통치 스타일로 그대로 이어지게 된다. 하지만 이 때문에 스탈린은 혁명 기간 중 전혀 눈에 띄지 못했다. 

그러나 레닌의 그늘에서 스탈린은 충실하게 자신의 입지를 굳히고 있었다. 비록 '혁명을 놓친 남자'라는 평가를 받긴 했지만 말이다. 레닌 또한 이미 너무 커버린 트로츠키등을 견제하기 위해 스탈린 같은 실무형 인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혁명 이후 스탈린은 자신이 소수 민족인 그루지야 인 점을 강조하며 인종적으로 복잡한 러시아 제국의 민족 문제 전문가로 행세했다. 특히 레닌이 1918년에 제 3차 소비에트 대외에서 '모든 민족은 자기 문제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 뿐 아니라 러시아에서 완전히 분리 독립할 수 있는 권리' 가 있다고 선언한 이후 러시아 제국에 속한 여러 소수 민족에 대한 민족 문제 인민위원으로 스탈린의 주가는 높아질 수 있었다. 나중에 소수 민족을 잔인하게 다룬 점을 생각하면 의외긴 하지만 말이다. 

한편으로 권력에 자리에 앉자마자 스탈린은 그 특유의 잔인성을 보에주기도 했다. 혁명 후 에스토니아의 볼세비키가 반혁명 분자를 뿌리뽑는 일을 상의하자 스탈린은 그들의 계획에 두말없이 찬성하는 답변을 보냈다. ( "강제 수용소는 아주 훌륭한 생각입니다" 라는 답변을 보냈다. ) 그러나 스탈린의 한계를 모르는 폭력성은 집권 전까진는 누구도 잘 몰랐을 것이다. 

9. 적백 내전

볼세비키 혁명은 아직 성공이라고 말 할수 있는 단계는 아니었다. 특히 구러시아 군부와 러시아 혁명을 두려워한 외부 세력이 손을 잡고 '백군'을 형성하여 전쟁을 일으키자 '적군'또한 이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쟁의 초기엔 보급에서 우세한 백군이 유리했다. 그래서 트로츠키를 비롯한 많은 볼세비키 지도자들은 적군을 이끌고 이들과 싸웠다. 

그러나 스탈린 동무의 경우는 다소 이야기가 달랐다. 스탈린이 맡은 일은 바로 식량 징발이었다. 사실 나중에 집권후에 드러나긴 하지만 스탈린은 거의 강탈에 가까운 식량 징발에 특별한 재능을 가진 인물이었다. 특히 그 재능을 우크라이나 등지에서 유감없이 발휘한다.

비록 공산당은 식량 부족이라는 심각한 문제에 직면 했기 때무에, 그를 카프카스 지방과 볼가강 유역에 '식량을 발견하면 어디서든 징발할 수 있는 권한'을 주어 파견한 것이지만 스탈린은 얌전히 식량만 징발할 위인이 아니었다. 

일단 그와 나중에 깊은 인연을 갖게 되는 차리친 (볼고그라드라고도 불리고, 한때 스탈린그라드로 불렸다가 다시 볼고그라드가 된 도시) 에서 사령부를 차린 스탈린은 식량을 강제로 징발하는 한편 자신의 권한을 확대 해석하여 군사 지휘권까지 가져려 했다. 스탈린은 레닌에게 식량 징발을 위해 군대의 지휘권일 절실히 필요하며 대의를 거스르는 사령관들과 인민위원이 있다면 가차없이 처단하겠다는 요청을 한다

스탈린은 일단 급한 상황을 이용해 뭔가 권한을 잡아보려 한 것이다. 트로츠키 같은 당 지도부가 폼나게 군대를 이끌로 싸울 동안 자신은 욕만 먹는 식량 징발만 하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비록 군대 경험도 없긴 했지만 스탈린은 자청해서 중책을 맡았다. 

 이 직위가 중요한 이유는 스탈린이 자리잡은 차리친이 볼가강의 주요 도시로 카스피해와 북러시아를 잇는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나중에 독일군이 이 도시를 점령하려 했던 이유도 단지 스탈린의 이름을 딴 도시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스탈린은 이 도시와 주변 지역을 장악하고 식량을 징발해서 신생 소비에트의 식량난을 해결하려고 했다.

차리친에서 그는 나름대로 성과를 냈다. 비록 카프카스 지방에서 붉은 군대가 승리한 것은 그의 군사적 재능과는 별 관련이 없긴 했지만 훗날 그가 정권을 잡았을 때 스탈린은 차리친에서 러시아 혁명을 구한 것으로 칭송됐다. (그리고 같은 내용이 러시아 인민들에게 반복 세뇌되었다.)

내전 기간 중 스탈린은 레닌보다 태도가 확고했다. 레닌은 농민들로 부터 식량을 징발하면서도 그들에게 지지를 받기 희망했다. 그러나 스탈린에게는 그런 모순이 없었다. 스탈린에겐 힘이 곧 정의 였고, 지지가 아닌 복종을 원했다. 그는 마을들을 복종하게 만들기 위해 마을에 불을 지르는 일도 서슴치 않았다.

내전이 마무리될 무렵 스탈린은 점차 당내에서 크게 성장하고 있었다. 당 중앙위원으로 여러 분야에 영향력을 행사했었고, 당내에서 레닌 다음으로 강성해진 트로츠키를 견제하려는 움직임이 있을 때 여기에 적극 동참하면서 점차 실권을 잡아가기 시작했다.

 한편 스탈린에게는 그것 말고도 기쁜 일이 있었다. 자신을 오랬동안 도와온 비서 나댜 알릴루예바와 결혼한 것이다. 알릴루예바 집안은 오랬동안 같은 혁명 동지인 스탈린을 도와왔고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돌아온 후에 스탈린은 아예 알릴루예바 집에서 지내기도 했었다. 사실 그들은 1917년 부터 거의 부부나 다름없었다고 한다. 

1.유형지에서 친구와 함께 찍은 사진
2.레온 트로츠키.
3.대중 앞에서 연설중인 레닌. 우측 하단에 군복차림의 트로츠키도 보입니다.
4.적백 내전 당시의 스탈린. 의외로 젊은 시절엔 군복이 잘 안어울리는군요.
5.두번째부인 냐다와 함께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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