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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조선에 대한 외세간섭에 대해.
게시물ID : history_1534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푸쉬킨
추천 : 14
조회수 : 1167회
댓글수 : 10개
등록시간 : 2014/04/13 15:35:57
논란이 많은 주장이지만 개인적인 의견을 쓰면
 
흔히 구한 말 조선이 개항을 하며 외세에 의존하고
 
일본, 청나라, 러시아 등 외세의 침탈이 문제였다고
 
거론하지만
 
실제 면면히 보면 그 위협이라는 외세는
 
단 하나 일본 밖에 없었고 실제 일본에 의해 나라가 망했습니다.
 
 
청나라의 개입은 붕괴 되고 있던 조공질서 체제 속에서
 
베트남이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이탈하자
 
마지막 남은 주변국에 대한 최후의 간섭이었고
 
지구상 마지막 남은 식민지 중국에 대한 열강의 쟁탈 속에
 
망조가 들며 해체단계를 진행 중이던 청나라의 사정상
 
장기간 지속 될 체제도 아니었습니다.
 
 
러시아의 경우 역시 중요 쟁점은 만주의 확보 구체적으로
 
부동항인 여순항의 보호였고 이를 바탕으로
 
거대 시장인 중국으로의 진출이었지
 
한반도의 이권이란 애초 만주에 비하면 무의미한 수준이었으며
(압록강 벌채권이니 실행되지도 못하 울릉도 벌채권이니도 일본이 그동안
침탈한 이권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이죠)
 
여순항과 블라디보스톡 태평양 함대의 취약한 해군력으로는
 
삼면이 바다인 한반도를 지배할 여력도
 
아니었기에 대한해협의 안전만 확보 된다면
 
한반도 정권의 안정과 우호가 더욱 중요한 사안이었죠
 
때문에 황실이 통채로 공사관에 거주하며 의존하게 된 시점에서 조차
 
러시아는 일본에 제의 한 것이 러시아, 일본의 동시 한반도 철군과
 
중립화였습니다. 니시-로젠 협정이죠
 
바로 이때 개항 이후 단 한차례 주어 진 기회  
 
외세의 간섭이 없던 5년간 시절이 도래했을 때
 
조선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광무개혁을 추진했으며
 
군비 증강과 회사설립 철도 건설을 시도했습니다.
 
 
반면 일본의 경우 중국이 아니기에
 
자원도 시장도 보잘것 없는 국가입니다.
 
한반도를 식민지화 하지 않으면 근대화를 추진하기 위한
 
시장, 자원의 확보는 물론 식민지 확장도 불가능했죠
 
 
이런 절박한 상황을 알았기에
 
이미 메이지 유신 이전 부터 일본 지식인들 사이에 정한론이 유행하였고
 
일본 고무라 외상의 언급처럼 한반도는
 
일본의 사활이 걸린 문제로 여기고 또 상정하여
 
근대화 추진과 함께 지식인, 민간단체, 상업단체 등
 
국가가 동원할 수 있는 역량을 총 동원해
 
식민지화에 열중했습니다.
 
일본의 조선 침략은 서구의 침략과 달리 매우 독특한 사례로
 
흑룡회를 통한(야쿠자 전신) 민간 단체의 한반도 정보 수집은 물론
 
지식인들에 의한 한반도 지식인의 포섭, 상인들에 의한 경제 침투등
 
이전 서구의 사례에서는 전례가 없는 국가적으로 총력을 다한
 
또한 지속적이고 장기적인 침탈 과정이었습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전체 예산의 절반 이상을
 
군비 증강에 쏟아 넣은 것도 무역액의 대다수가
 
군수물자였던 이유도 오직 하나의 목표
 
한반도 식민지화를 국가가 상정했기에
 
가능했으며
 
청일전쟁, 러일전쟁 모두 5년 주기의 국가적인 총 전쟁준비 뒤에
 
전쟁 준비 완료 후 일본의 선제 공격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무슨 청나라의 간섭이니
 
조선의 근대화를 위한 내각의 개혁이니 하는 것은
 
그저 일본이 먹기 좋게 하기위한 사전 정지작업일 뿐이죠.
 
 
입헌군주제가 언급이 되는데
 
조선을 개항 한 뒤 지식인을 포섭하며
 
조선 왕실에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내각을 개편하라 요구한 일본조차도
 
메이지 유신 이후 입헌군주제를 통해 권력을 분산하지도 않았으며
 
메이지 헌법 역시 전제군주권을 명시한 흠정헌법입니다.
 
개항이후 지속적인 개혁이니 내각 개편을 요구한 것을 생각해 보면
 
마치 일본의 정치 근대화가 빠른듯 하지만
 
실제 메이지 헌법이나 대한제국 헌법이나 고작 10년 차이일 뿐이죠
 
일본은 자신들 조차 하지 않은 권력의 분산을 조선에 요구하고
 
입헌을 운운하였지만 실제 목적은 조선의 식민지화 과정에서
 
유일한 걸림 돌인 왕권을 약화 시켜 친일 내각으로 하여금
 
식민지화에 동조하도록한 정지 작업이었을 뿐이죠.
 
 
조선의 개항기 개혁 과정에서
 
가장 큰 걸림 돌은 사실 무능한 권력이 아닌
 
국가적으로 사활을 걸로 지식인, 관료층을 포섭하며
 
근대화를 방해한 일본의 역할이 가장 컸습니다.
 
실제 이권의 대다수는 일본이 가져간게 가장 많았고
 
경의선의 자력 개통을 위해 프랑스 차관을 도입하고 할 때
 
방해하여 일본 차관으로 돌리고 이권을 가져간 것도
 
이런 맥락이죠.
 
차관을 다원화 시키고자 할 때 방해 하고
 
천일은행등의 설립을 방해 하며 경제 자립을 방해 한것도
 
일본이었죠.
 
 
근대 개항기 조선과 일본의 차이점은
 
양국가 모두 지구상 마지막 남은 자원의 보고이자
 
거대 식민지 시장인 중국으로 세계 열강이 집중함에 따라
 
열강의 침탈에서 제외되었던 국가로
 
먼저 개항을 한 일본은 외세의 간섭 없이
 
근대화를 지속적으로 진행한 반면
 
조선의 경우 세계정세에 먼저 눈을 뜬 일본에 간섭을 받았다는 점이죠
 
 
일본의 메이지 일왕이 유능한 군주였던 것도 결코 아니며
 
근대화 과정에서 일본도 저항이 없던게 아니죠
 
메이지 유신 이후로도 장장 30년을 내부적으로 삽질하며
 
투쟁한게 일본의 사정이기도 합니다.  
 
단지 일본의 근대화를 추진한 지식, 관료층들의 경우
 
조선의 침략이란 국가적 목표와 직결되는 이권으로
 
단결하며 근대화를 추진하였고
 
조선의 경우 지식인과 관료층은 세계정세 속에서
 
탈아론과 정한론을 외치는 일본이란 존재를 바로 보지 못하고
 
오판하여 같은 아시아인이지자 근대화의 조력자로 착각했다는 점입니다.
 
 
초기 개항기 명성황후가 그러했고
 
김옥균이 그러했으며 김홍집이 그러했고
 
이완용이 그러했죠
 
 
국가를 이끄는 관료층들이 국가의 존립과 발전을 가로막는
 
주적이 누구인지 확실하게 보지 못하였고
 
한반도에서 벌어지는 일본에 의한 주기적인 전쟁과 친일 내각에 의한 정쟁에
 
놀아나면서도 국력을 결집시키지 못한 것이 크다고 봅니다.
 
사실 1870년대 개항하고 1890년대 20년만에 흠정헌법 및 근대 개혁을 도입할 정도면
 
메이지 헌법제정까지 40년 걸린 일본과 비교했을 때 그렇게 큰 삽질을 한것도 아닙니다.
 
일본 침략의 속도가 좀 더 빨랐을 뿐이죠.
 
 
아관파천으로 러시아에 주도권이 아예 넘어가 버리고
 
러시아가 일본과 한반도 공동 철군을 협정하며
 
개항이래 최초로 일본이 한반도에서 영향력을 잃어버린
 
단 5년간 대한제국의 유명한 광무개혁이 진행되었죠.
 
 
군대가 정비되고, 전차가 부설되고, 은행이 설립되고, 발전소가 설립되었으며
 
의회설립 시도, 우체국, 경찰제 실시, 사법제도 시행, 근대적 초등교육 시행 등
 
다행한 개혁이 짧은 기간 진행되었습니다.
 
 
이를 초조하게 본 일본이 러시아에 도박에 가까운 전쟁을 기습으로 걸어
 
러일전쟁이 발발한 것이고 다시 일본이 한반도에 영향을 끼친 결과
 
이번에는 더이상 한반도 정부에 시간을 주는 것 없이 바로 식민지화가 단행 되었습니다.
 
 
 
개항기 구한말의 한반도 역사를 보면
 
과정과 결과는 명확합니다.
 
 
단순히 외세의 간섭이라 한다면
 
너무 추상적으로 표현하는게 아닌가 합니다. 
 
구한말 진정 위협을 준 외세는 단 하나 그냥 일본이었죠.
 
 
일본의 간섭으로 한반도는 개혁에 방해를 받았고
 
궁국적으로 일본에 의해 나라가 멸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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