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잿빛 길을 걷다 - 23
게시물ID : panic_7814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Avalanche
추천 : 0
조회수 : 644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5/03/08 16:34:00
내가 가방을 멀리 치워놓고 있는 동안, 상훈이는 남은 가방을 모두 뒤져서는 쓸만한 먹을거리들을 찾아냈다.

 

김병장라면밥 여섯개, 물 네병, 초코바 여덟개정도를 찾아냈다.

 

다른 물건들은 우리 가방에 억지로 쑤셔넣기엔 힘들어서, 여기 놔두고 가기로 했다.

 

그럼 다른 사람이 집어가겠지......

 

물건을 그대로 놔두고 갈때도, 가슴 한켠에선 왠지 모를 죄책감이 조금씩 피어오르고 있었다.

 

다시 가방안에 모든 물건들을 넣어서는 그 시체 옆에 다시 두고 올까, 혹은 그냥 다 쓰레기통에 넣든지 옥상에서 뿌려버리든지 할까 하는 생각들이 수도없이 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난 조용히 눈을 감은채로 그 자리를 떠날수 밖에 없었다.

 

조금이라도 더 그걸 보고 있자면, 정말 미쳐버릴것 같았다.

 

민영이 생각에, 민영이 가족 생각에, 그리고 내가 옳은 일을 하고 있는건가 하는 내 양심의 가책에

 

 

 

우린 민영이네 가족에게서 찾아낸 물품들을 가방에 넣고는 다시 가방을 둘러멨다.

 

왠지모르게, 어깨가 더 무거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가방끈이 더 깊게 파고드는건지, 아니면 내 어깨를 무언가가 짓누르고 있는건지는 모르겠지만, 가방을 메고 움직이는것이 불편해졌다.

 

우린 상영관이 있는 최고층까지 올라왔으니, 이제 한층씩 내려가며 백화점을 돌 생각이었다.

 

아마 무기같은것이나, 더 기능성 있는 옷들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약탈당했을수도 있지만, 그 안을 뒤져보면 하나쯤은 쓸만한게 나올 것이다.

 

우리는 상영관으로 올라온 에스컬레이터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아래쪽을 보니, 먼지 한톨없이, 아주 깨끗했다.

 

우리가 여기로 올라올때, 한두놈쯤은 따라 붙었을 법 한데, 아무도 없는걸 보니 아마도 발길을 다시 돌린것 같았다.

 

혹은 쓰러진 자기 동족들을 보곤, 상을 치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상훈이와 난, 다시 모자를 눌러쓰곤 아래층으로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아래쪽 층에 발을 찍고는, 모퉁이를 넘어 놈들을 살펴봤을때, 놈들은 에스컬레이터 주변만을 서성이고 있었다.

 

우리를 뒤따라오다, 들리던 소리가 끊기곤 목표물을 잃어버려, 또다시 목적없이 이곳을 배회하는 것 같았다.

 

올라오는 방향의 에스컬레이터는 이미 놈들로 차있었다.

 

우리는 그 반대편에 있는,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5층으로 내려가기로 결정했다.

 

발소리를 죽이곤, 놈들의 근처를 조용히 돌아서 반대편 에스컬레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반쯤 몸을 숙이다 시피 하며 놈들 근처를 지나갈때, 놈들은 무슨 인기척을 느꼈는지, 우리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때마다 걸음을 멈춰서서, 또다시 고요함을 만들어줬다.

 

놈들은 마치 지능을 잃어버린듯, 고요함이 찾아온지 얼마 되지않아 자기가 가졌던 흥미를 잃고 또다시 주변을 서성대기 시작했다.

 

우린 유령처럼 6층을 배회하는 놈들을 뒤로하고, 또다른 물품들을 찾아 5층으로 이동했다.

 

 

5층에서는, 아까 소동때문에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 쪽으로 놈들이 몰려서 그런지 놈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아마 반대편 에스컬레이터에 모두 모여서는, 이리저리 뒤엉켜 있을 것이다.

 

우린 에스컬레이터를 내려오자마자 바로 보였던 골프용품점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놈들 머리통을 상대로 골프를 칠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골프공같은걸 챙겨가면 놈들 주의를 끄는데 사용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우리는 가장 가까운데 있던 매대쪽 아래 선반을 열어봤다.

 

아마 여분으로 주는 골프공을 몇개 넣어놨었나 보다.

 

대여섯개정도가 선반 바닥에서 굴러다니고 있었다.

 

내가 주머니에 손을 넣었을땐, 여섯개의 핸드폰이 굴러다니고 있었기에, 상훈이를 툭툭 치며 골프공을 가리켰다.

 

상훈이는 내가 손가락으로 골프공쪽을 찍는걸 보곤, 주머니에 골프공을 두어개 챙겨넣었다.

 

주머니마다 두개씩 있는지, 뭉툭한 알 두개가 양쪽 주머니마다 들어있는 듯 했다.

 

난 혹시나 또 쓸만한게 있나 싶어 주변을 둘러봤다.

 

껍질을 벗기지도 않은 아이언들이 가득했다.

 

이것들중 하나를 가져가서는 놈들 머리를 냅다 후리고 싶었지만, 그렇게 내구성이 좋지는 않았던터라, 깔끔하게 고개를 젓고 포기했다.

 

다른 층들도 크게 다를것은 없었다.

 

놈들로 가득 차 있던게 대부분이었다.

 

게다가 왠만한 물품들은 약탈당한지 오래였다.

 

상훈이와 차를 타고 오면서 생각했던게 그대로여서, 왠지 모를 소름이 올라왔다.

 

정말 날 무섭게 했던건, 3층인 여성복 매장에서 봤던 놈중 하나였다.

 

감염된 채로 여길 들어왔는지, 혹은 여기에 들어왔다가 감염이 된건지 어느쪽인지는 모르겠다.

 

나와 상훈이가 에스컬레이터를 따라 내려가며, 3층즈음에 도착했을때였다.

 

상훈이가 날 툭툭 치면서, 3층의 안쪽을 가리키면서 '저거 한번 봐라.' 라며 나의 시선을 끌었다.

 

상훈이의 손가락은 한 여자를 가리키고 있었다.

 

화장실의 근처에서 서성거리고 있던 여자는, 이 지옥속에 들어왔다가 감염당한 또다른 불쌍한 희생자였던것 같다.

 

하지만, 불쌍한 여자 희생자라고 하기엔, 그 모습이 너무나도 소름끼쳤다.

 

한쪽 팔에는 구찌 핸드백을 걸고 있었고, 걸음이 불편한걸 보니 하이힐이나 킬힐 종류를 신고 있었던것 같다.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온 몸을 두르고 있는 모피코트와, 팔에 주렁주렁 걸어놓은 진주목걸이들, 그리고 머리를 뒤덮고 있는 그 큰 모자까지...

 

도대체 무엇때문에, 무엇에 미쳐 이 지옥같은 곳으로 들어왔을까 싶었다.

 

정말 그 한량한 욕심과 욕구때문에 자기 목숨을 버려야 했을까 하는 생각도 머리속을 스치고 지나갔었다.

 

난 머리를 몇번 저어서 그 이미지를 지우려고 했지만,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우린 모든 층들을 다 포기하곤, 바로 지하에 있는 홈플러스쪽으로 이동하려 에스컬레이터를 걸어 디큐브 백화점의 1층으로 내려왔다.

 

우리가 1층에 내려오자 마자 느낄수 있었던건, 고요함이었다.

 

아무런 울음 소리도 들리지 않고, 바스락대는 걸음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나와 상훈이는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에스컬레이터쪽에서 발을 떼선, 주변을 둘러봤다.

 

1층을 가득 메우고 있던 놈들은, 모두 머리가 깨지고 머리와 몸통이 분리된채로 1층을 나뒹굴고 있었다.

 

놈들의 갈린 머리를 살펴봤을때, 반수 이상이 둔기같은것에 머리가 뽀개져서는 죽어 있던게 대부분이었다.

 

아마도 야구 배트나 각목같은걸로 그대로 후려 쳐버린 것 같았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놈들중 반수는 뇌수가 흘러 나올정도로 강하게 얻어 맞고는 바닥에 그대로 쓰러져 버린 듯 했다.

 

그 위로는, 누군가가 놈들의 검은 피를 밟고 지나갔는지, 홈플러스쪽으로 향하는 에스컬레이터쪽으로 피를 가득 머금은 발자국들이 수십개 정도 이어져 있었다.

 

아마도 한둘이 모인게 아닌듯 했다.

 

대충 예상 해봐도, 예닐곱명정도가 그룹을 지어 모여다니며 주변에 있는 가게들을 몽땅 털고다니는게 뻔하다.

 

아마 홈플러스안에 남아있는 모든 물건을 가져가려고 이곳을 찾아왔을것이다.

 

가는 길에 보이는 놈들이 걸리적대니, 여기 있는 놈들을 전부 없애버리곤 아래쪽으로 내려간것 같다.

 

아마 놈들에게는, 걸어다니는 시체들따위는 눈엣가시에 불과할것이다.

 

 ", 이거 만만치 않을거 같은데... 어떡하냐?"

 

난 상훈이를 쳐다보곤 말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포기하기도 그런데..... 근데 지금 얘네 죽은거 보면 보통놈들은 아닌거 같다."

 

상훈이는 앞에 쓰러져있는 놈들의 시체를 이리 저리 살펴보곤, 몸을 일으켜서 말했다.

 

난 살짝 고개를 끄덕이곤, 말을 이어갔다.

 

 "아마 홈플러스쪽에 있는거 싹 긁어가려고 왔겠지. 분명 혼자 온건 아닐거야. 예닐곱명씩 떼지어서 다니는거 같고.... 아마 이동수단은 지하주차장쪽이나 물류창고쪽 근처쯤에 대놨을거야."

 

상훈이는 앞쪽에 좀비를 살짝 발로 밀어 찼다.

 

예전부터 상훈이는 뭔가를 고민할때 바닥을 차든지, 뭔가를 꼭 차댔다.

 

마치 지금처럼 말이다.

 

아마 상훈이도 지금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분명히 들어가면 놈들과 마주칠게 뻔했고, 아마도 놈들과 충돌이 생길게 뻔했다.

 

시체놈들을 이렇게도 냉철하게 쓸어버린걸 보면, 아마 눈엣가시들은 전부 죽이거나 없앨게 뻔했다.

 

행여나 그게 같은 인간이라고 해도...

 

행여나 그게 같은 종족이라고 해도...

 

난 팔짱을 끼고는, 놈들이 걸어들어간 입구쪽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정말 저쪽으로 들어가도 괜찮은건지, 확신이 도저히 서지 않았다.

 

괜히 들어갔다가 시체놈들이 아니라 인간에게 맞아 죽을수도 있다.

 

그리고 얼마나 다칠지도 모르고, 얼마나 잃을지도 가늠할수 없었다.

 

옆에서 들려오던 퍽퍽대는 소리가 뚝 그쳤다.

 

그리곤, 내 시야에, 홈플러스를 향해 걸어 들어가는 상훈이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난 흠칫 놀라 팔짱을 풀고는, 상훈이의 어깨를 붙잡았다.

 

 ", 너 진짜 갈라고?"

 

난 상훈이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 그럼 어떡할라고? 여기까지 왔는데 손가락만 빨고 그냥 나가?"

 

상훈이는 내 손을 뿌리치고는, 안쪽으로 성큼성큼 걸어들어가고 있었다.

 

 ".. 진짜 저 미친새끼...."

 

난 모자를 푹 눌러쓰고는, 에스컬레이터 모퉁이에서 안쪽을 둘러보던 상훈이 뒤에 바싹 붙었다.

 

상훈이는 에스컬레이터 너머로 지하 1층을 둘러보다, 내가 뒤쪽에서 붙는걸 보곤 나를 돌아봤다.

 

 "새끼... 안올거처럼 하더니 그래도 따라 오네."

 

상훈이는 등 뒤로 손을 빼서는 내 어깨를 몇번 쳐주곤, 다시 모퉁이쪽을 살피고 있었다.

 

 "니가 그랬잖아 임마. 10년지기 친구 드립친게 누군데..."

 

난 크로우바를 몇번 털어서는 덕지덕지 붙어있던 뇌수들과 피를 털어냈다.

 

그리곤 안주머니쪽으로 손을 넣어, 리볼버가 무사히 내 주머니속에 자리하고 있는지를 살펴봤다.

 

손을 넣어서 안주머니쪽을 더듬었을때, 서슬퍼런 쇠의 느낌이 내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

 

난 리볼버의 방아쇠에 손가락을 살짝 걸어보며, 바이더웨이에서 마주쳤던 밴딧들을 다시 떠올려봤다.

 

그땐 두명이어서, 이런 가벼운 총으로도 쉽게 위협이 됐지만, 이번엔 상황이 달랐다.

 

한놈이 잘못 경고를 한다면, 온 마트를 뒤지고 있는 놈들이 한쪽으로 몰려버릴수도 있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6:2의 상황이나 7:2인 상황에서 고작 리볼버 한쪼가리에 쪼는 놈들이라면, 이런 약탈도 시작하지 않았을것이다.

 

난 방아쇠에서 손을 빼고는, 다시 지퍼를 잠궜다.

 

난 상훈이의 뒤에서 옆으로 빠져서는, 상훈이와 나란하게 에스컬레이터 앞에 섰다.

 

마치 우리가 페르시아 군을 막아내던 스파르타의 전사들처럼, 에스컬레이터를 굳게 막고 있는것처럼 보였을것이다.

 

 "내려가자. 뭔일인지는 봐야지."

 

상훈이는 마스크를 더욱 세게 조이곤, 모자를 푹 눌러쓰며 말했다.

 

난 그런 상훈이의 뒤를 따라, 도살장의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내심 걱정됐다.

 

아니, 궁금했다.

 

누가 도살자이고, 누가 고기덩어리인지....

 

내심 알고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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