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5년전 웨슬리(Wesley)를 처음 만났습니다.
첫인상은 정말 별것 아니었어요. 나보다도 작은 체구의 동양인 남자아이.
정말 그것 뿐이었는데도, 그 아이를 본 순간 저는 '친해지고 싶다' 고 생각했습니다.
백인들이 가득한 동네에서 아시안을 발견했기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정말 그것이 '첫사랑의 스파크' 라는 것이었을까요?
저는 그 날부터 웨슬리를 관찰하기 시작했습니다.
백인 동네에서만 지내던 저에게, 웨슬리를 찾는 일은 굉장히 쉬웠습니다.
(그 곳에서는) 굉장히 이국적인, 칠흑같이 검은 머리카락만 찾으면 되었으니까요.
그 아이는 항상 자기 몸보다도 큰 백팩을 매고 복도를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알고보니 웨슬리는 모든 과목을 (우열반중) 우반에서 공부하는 수재였고,
부활동도 전혀 하지 않아 저와 마주칠 일이 없었던 것입니다.
정말 첫눈에 반했기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단순한 동경에서 비롯되었던 것인지는 지금도 잘 모릅니다만,
저는 웨슬리와 말을 섞기 위해 필사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웨슬리와 같은 과학/수학 우반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그 아이와 같은 교실에서 공부할 생각에 흐뭇해하던 찰나,
저는 웨슬리가 댄스파티에 다른 여자아이를 데려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말았습니다.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그 여자아이의 이름은 카산드라(Cassandra).
소문에 의하면 웨슬리와 카스는 아주 예전부터의 친구로,
사귈듯 말듯 사귈듯 말듯한 관계인 듯 했습니다.
참 별것 아닌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만, 저는 정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웨슬리와 더 친해지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도 했는데, 왜 세상이 날 도와주지 않는걸까?' 와 같은 생각을 자주 했었던 것 같습니다.
어린 마음에는 (지금도 어리지만), 노력에 따른 댓가가 기대에 미치지 않았기 때문에, 굉장히 서운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이후로는 굳이 웨슬리에게 말을 걸거나 하지도 않고, 아주 조용히 지냈습니다.
웨슬리는 원래 낯을 많이 가려서, 저에게 따로 인사하거나 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어색한 기운 없이, 그 첫사랑은 녹아 없어져가는 듯 했습니다.
그러던 2년 뒤, 저는 웨슬리를 영어 수업에서 다시 만나고 말았습니다.
다시 만난 웨슬리는, 키도 커지고 수염도 난, 남자아이와 남자의 과도기에 서 있었습니다.
저는, '흥, 뭐야, 더 못나졌잖아,' 라면서 애써 웨슬리를 무시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웨슬리에 대한 마음은 커져만 가서,
결국은 항복하고 다시 친해지도록 노력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웨슬리도 2년전보다는 낯가림을 많이 이겨내서,
예전에는 제가 어떤 말을 해도 무표정 단답으로만 대답했었는데,
이제는 대화를 이어갈 수 있을 정도의 리액션을 해 줬기 때문에 굉장히 기뻤습니다.
우리는 같이 숙제를 하거나 하며 점점 가까워졌고,
나중에는 서로를 '친구' 라고 소개할 수 있을 만한 사이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해가 다 지나기도 전에, 저와 웨슬리는 다시 긴 시간 이별을 하게 됩니다.
웨슬리는 계속 책을 읽으며 착실히 우등생의 길을 밟고 있었습니다만,
저는 선배의 소개로 한 번 대타 베이시스트로 뛰었던 것이 계기가 되어,
공부는 뒷전으로 하고 밴드 활동에 열중해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작은 규모지만 팬들도 생기고, 오라는 곳도 많아지면서 자연스레 밴드계에서 친구도 많아지고, 하면서,
저는 그쪽 사람들만의 파티에도 많이 초대받게 되었습니다.
'그쪽' 사람들만의 파티라는 건, 결국 뻔합니다.
문란하고, 약이 돌아다니는, 광란의 파티죠.
엄격한 부모님 밑에서 자란 저는, 약이나 문란한 쪽에는 관여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런 파티들이 '어른의 일,' 또는 '잘 나가는 아이들의 비즈니스' 라고 생각해서,
여러 곳마다 얼굴을 비추는 생활을 계속해나갔습니다.
그러다가 저는, 난생처음 남자친구도 사귀어 보게 되었습니다.
제 공연을 자주 보러 와주던, 장신의 금발 백인 기타리스트의 고백을 받아,
친구들의 부러움 속에 첫 연애를 시작했지요.
그러나, 얼마 안 가 그 남자아이가 파티에서 맛이 가버리는 모습을 보고,
'아, 내가 정말 잘못된 세계에 발을 들여놓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저는 모든 밴드 활동을 접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1년간은, 정말 누구와도 말 섞지 않고, 조용히 우울하게 지냈습니다.
학교에서 유명인이 되고 싶어서 노력하던 모습도 다 버리고,
학교-집-학교-집 만 반복하며, 죽은듯이 지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고등학교를 졸업 할 때 즈음, 저는 다시 친구들을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고,
웨슬리와 재회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 저는 정말로 눈물이 날 정도로 반가웠습니다.
여태까지는 깨닫지 못했던 그리움이 밀려왔고,
(정말 어린애 같은 이유로) 웨슬리 없이 지내왔던 시간들이 너무나도 아깝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약 4년전에 했던 그대로, 다시 웨슬리에게 다가가기 시작했습니다.
오랜 시간 말을 하지 않아서인지, 웨슬리는 처음 만났던 때처럼 '안녕' 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을 정도로
저에게 낯을 가리고 있었습니다만,
저는 웨슬리가 대답을 해 줄때까지 "하이ㅣㅣㅣㅣㅣㅣㅣㅣㅣㅣ" 하며 쫓아다닌다던지,
정말 유치하고 바보같지만, 단도직입적인 방법으로 그 마음의 벽을 부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랬더니 점차 예전의 친했던 기억들도 돌아오고, 하면서
둘도 없는 친구가 되고,
데이트? 라고 하긴 뭐하지만 집에서 영화도 같이 본다던가 하며 잘 지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금새 저희는 졸업했고, 웨슬리는 부모님을 따라 대륙 건너편으로 이사하고 말았습니다.
웨슬리가 이사한 뒤에도 저희는 매일 스카이프 통화를 한다던지 하며 좋은 관계를 이어나가고 있었습니다만,
이젠 너무 거리가 멀기 때문에, 웨슬리쪽에서 자꾸만 뒤로 빼는 것 같습니다.
그저 한가할때 같이 수다떠는 스카이프 친구? 정도 쯤에서 선을 그으려는 것 같아요.
전화는 커녕 문자도 하지 않으려 하고, (정확히 말하면 번호를 알려주지 않는 것이지만...)
관계를 발전시키려는 내색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스카이프란게
언제든지 잠수타버리면 그만이잖아요...
서로 대학 학기 시작하고 하면 바빠질꺼고... 그러다가 스카이프도 뜸해지고...
그러다가 정말 영영 잊게 되는 건 아닐까 두려워서,
지금 어떻게든 연결고리를 많이 만들고 싶은게 제 심정인데, 저쪽은 또 그렇지 않은 것 같아 가슴이 아프네요.
정말 여기까지 읽어 주셔서 너무 감사드려요.
술을 마셨더니 얘기가 구구절절 길어져 버렸네요...
이 이야기는 제 이야기가 맞아요. 제가 설명같은걸 잘 못해서 이해하기 힘드셨을지도 모르겠네요...
결국 포인트는, 5년동안,
관계가 좋아질듯 하면 꼭 어떤 사건이 일어나서 저희를 갈라놓는다는 거에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서로 좋은 감정이 막 싹튼 지금, 이젠 정말 현실적인 장거리 문제에 직면했네요.
어제 얘기하다가 스카이프에 대놓고 제 휴대폰 번호 올려놓고, '문자해줬으면 좋겠어' 라고 말해두기는 했는데,
여태까지 웨슬리의 반응으로 봐서는 문자해줄것 같지가 않네요...
Out of sight, out of mind 라고 하는 말,
정말 아무것도 아닌 줄 알았는데,
맞는 말은 맞는 말인가봐요...
장거리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선을 긋는다는게...
이해가 되면서도 참 가슴이 아프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