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방 / 이이체
나는 너를 아는데 네가 없다
요컨대 이건 네가 내게 말해주는,
최루성의 이야기들
남겨지지 않는 촉각으로 목소리로
혼자 잠들 수 없는 밤, 방에서
빛이 나간 전구도 흔적만큼은 갖고 있지
얼마나 더 해야 할까
전하기 위해 하는 말들, 전하려는 말이 아닌
나는 무디지 아니, 더디지
아니, 무디고 더디지
충분히 망가졌고 충분히 망했다
모서리마다 희끗희끗 빛나는
전구가 남기고 간 이야기들
들을 수는 없는데 듣느라 잠들지 못한다
너는 내게 너조차 남기지 않았고
나는 왜 아직도 살아서 이 참담을 듣는 거냐
짧은 필라멘트가 길었던 기억들을 보고 있다
이 방을 모두 빛내려고
그만큼 없어졌던 거지
사랑이라면 그렇게 남겨두어야 하는 걸까
남아야만 하는 걸까
사각으로 갈라진 바닥이
깊이 병들어 어둡다
너는 나를 아는데 내게 너를 두지 않는다
빛은 만질 수 있는 목소리야,
들리지 않아도 만질 수는 있는
나의 사인 (死因) 은 너와 같았으면 한다 / 박 준
창문들은 이미 밤을 넘어선 부분이 있다 잠결이 아니라도 나는 너와 사인(死因)이 같았으면 한다
이곳에서 당신의 새벽을 추모하는 방식은 두 번 다시 새벽과 마주하지 않거나
그 마주침을 어떻게 그만두어야 할까 고민하다 잠이 드는 것
요와 홑청 이불 사이에 헤어 드라이어의 더운 바람을 틀어넣으면 눅눅한 가슴을 가진 네가 그립다가
살 만했던 광장(廣場)의 한때는 역시 우리의 본적과 사이가 멀었다는 생각이 들고
나는 냉장고의 온도를 강냉으로 돌리고 그 방에서 살아나왔다
내가 번듯한 날들을 모르는 것처럼 이 버튼을 돌릴 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아서 맥주나 음료수를 넣어두고
왜 차가워지지 않을까 하는 사람들의 낯빛을 여관의 방등은 곧 잘 하고 있다
“다시와, 가기만 하고 안 오면 안 돼”
라고 말하던 여자의 질긴 음성은 늘 내 곁에 내근(內勤)하는 것이어서
나는 낯선 방들에서도 금세 잠드는 버릇이 있고 매번 같은 꿈을 꿀 수도 있었다
장례미사 / 박태일
슬픔에는 방향이 있어 더 슬프다
여섯 개 촛불이 데우는 슬픔
흔드는 슬픔
나를 향해 쓰러지는 그대 슬픔에는
내가 가보지 못한 그대가 있어 더 슬프다
기억의 자리 / 나희덕
어렵게 멀어져간 것들이
다시 돌아올까봐
나는 등을 돌리고 걷는다
추억의 속도보다는 빨리 걸어야 한다
이제 보여줄 수 있는 건
뒷모습뿐, 눈부신 것도
등에 쏟아지는 햇살뿐일 것이니
도망치는 동안에만 아름다울 수 있는
길의 어귀마다 여름꽃들이 피어난다
키를 달리하여
수많은 내 몸들이 피었다 진다
시든 꽃잎이 그만
피어나는 꽃잎 위로 떨어져내린다
휘청거리지 않으려고 걷는다, 빨리
기억의 자리마다
발이 멈추어선 줄도 모르고
예전의 그 자리로 돌아온 줄도 모르고
코르크 / 김경후
울음을 참는 자의 성대는 커다랗다
똬리 튼 뱀만큼 커다랗다
찌그러져 일렁대는
목그늘을 보지 못하는 그만이
울지 않았다고 웃음을 띠고 있다
울음을 참는 자의 성대는
똬리를 틀고 겨울잠을 자는 뱀만큼 커다랗다
이대로 커진다면
곧 성대 위에 이오니아식 기둥을
세울 수도 있으리라
그는 자신에게 '안녕?'
인사도 참고 있는 게 틀림없다
코를 씰룩이며 입꼬리를 올리기
미소와 웃음의 종류가 그의 인생의 메뉴
오래 참는 것이
크게 울어버린 것이라고
말을 건넬 수 있을까 그건
갈라진 뱀의 혀를 깁는 것보다 위험한 일
무엇을 그는 버려야
그를 견디지 않을 수 있을까
울음을 참는 자의 성대는 커다랗다
꼬챙이에 찔려 죽은 줄도 모르고
겨울잠 자는 뱀의 꿈처럼 커다랗다
들썩이는 성대는
한번도 거미줄에 걸리지 않았지
음파탐지기는 물론 흰수염고래의 수염에도 걸리지 않았어
그뿐이다
울음을 참지 않았다고 외치는
울음을 참는 자의 성대는 커다랄 뿐이다
그리하여 어느날 사랑이여 / 최승자
한 숟갈의 밥, 한 방울의 눈물로
무엇을 채울 것인가,
밥을 눈물에 말아 먹는다 한들.
그대가 아무리 나를 사랑한다 해도
혹은 내가 아무리 그대를 사랑한다 해도
나는 오늘의 닭고기를 씹어야 하고
나는 오늘의 눈물을 삼켜야 한다.
그러므로 이젠 비유로써 말하지 말자
모든 것은 콘크리트처럼 구체적이고
모든 것은 콘크리트 벽이다.
비유가 아니라 주먹이며,
주먹의 바스라짐이 있을 뿐,
이제 이룰 수 없는 것을 또한 이루려 하지 말며
헛되고 헛됨을 다 이루었다고도 말하지 말며
가거라, 사랑인지 사람인지,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죽는 게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살아,
기다리는 것이다.
다만 무참히 꺾여지기 위하여.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내 몸을 분질러다오.
내 팔과 다리를 꺾어
네 꽃병에 꽂아다오.
무화과 숲 / 황인찬
쌀을 씻다가
창 밖을 보았다
숲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그 사람이 들어갔다 나오지 않았다
옛날 일이다
저녁에는 저녁을 먹어야지
밤에는 눈을 감았다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이었다
2014. 04. 16
유난히 눈물이 많은 밤이 있다.
나의 눈물, 남의 눈물, 너의 눈물.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떤 방식의 이별조차 품을 자신이 없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