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과 일제시대를 주름잡은 전범에게 굽신굽신~ 거릴때 알아 봤지요.
국장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썰렁함이란...
증거가 없다고 해서 아래 글 더 합니다.
도요다다이쥬 센세이(슨상님)가 선거를 위해 전라도 지역감정과 종북반미를 유발하기 전 행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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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이는 한국전쟁이 나자 그간의 좌익행적으로
학살위기에 벗어나더니
부산으로 도주하여 정경유착으로 떼돈 벌고 나중에 감투를 돈 주고 사서
의병활동을 일으켰다고 사기쳤다.
김대중은 정부산하기관인 금융조합연합회(현재의 농협)와 비료․구호 양곡의 전국해상운송계약체결에 성공하여 거액을 벌었다. 이것은 대부분 미국의 원조 물자였으므로 김대중은 미국 덕에 부를 쌓은 것이다. 다음은 김대중이 1980년 5월 계엄사령부에 연행되어 쓴 자필 진술서에서 이를 기술한 부분이다.
본인은 1951년 초부터 회사를 새로이 창립하여 木浦商船주식회사라 하고 일본서 정부가 구입한 선박 3척을 은행융자로 사서 해운업을 확장시켰음. 한편 금융조합연합회와의 곡물 및 비료 등 수송을 직접 계약하게 되자 1952년부터 회사를 부산으로 옮기고 상호를 興國海運주식회사라 하며, 회장에는 당시 海南 출신 국회의원(2대)尹泳善씨가 앉고 본인은 사장이었는데 사실상 본인 개인회사였음.
본인은 부산서 당시의 農工銀行 본점에서 1억 환을 융자해서 사업을 확장했으나 크게 성공을 거두지 못함. 결국 1954년 경부터 당시 흥국해운의 군산출장소장인 ○成烈(편집자 주 : 원본불량으로 확인불가)에게 회사를 인계하고 본인은 해운업에서 손을 뗌.
김대중은 부산으로 사업근거지를 옮긴 시기를『나의 삶 나의 길』에서는 1951년이라 했으나 이 진술서에서는 1952년이라 주장하고 있다. 김대중 경력은 김대중이 스스로 밝힌 것이나 타인이 기술한 것이나 시기가 조금씩 차이가 나는 부분이 있다. 이는 기억의 착오로 간주하고 무시할 수도 있지만 김대중의 경력을 석연치 않게 보는 입장이라면 대강 넘어갈 수 있는 사항이 아니다.
정경유착을 잘 하는 기업들은 정치인이나 고위관료 출신들을 영입하여 회사 대표 자리 주기를 잘 한다고 하는데 김대중은 이 분야에서 선구자요 개척자인 듯하다. 김대중이 국영 기업과 대규모 계약 체결에 성공했다고 하여 뇌물 등의 부정한 방법을 썼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당시 해운공사, 조선공사, 조선운수주식회사 등 3개 국영기업체는 매우 부패하여 3대 국회가 개원한 1954년의 국정감사에서 큰 문제가 되었다.
『인동초의 새벽』과『金大中, 그는 누구인가』에는 번창하는 김대중의 사업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전쟁은 소강 상태에 들어갔으나 육상 교통은 곧 복구되지 않았다. 도로 사정이 엉망인데다 공비의 출몰을 우려하여 상대적으로 해상 교통의 번창을 가져왔다. 이러한 상황은 해운에 대해 웬만한 식견이 있는데다, 한 번 손을 대면 뿌리를 뽑고야 마는 왕성한 투지를 가진 청년 실업가 김대중에게는 돈을 벌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청년 실업가로
그는 6․25 그 이듬해 봄 재빨리 목포 해운 회사를 일으켜 사장 자리에 앉는가 하면 전남 해운 조합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한국 조선 조합 이사 자리도 곁들여 굴러 왔다. 거기에다 목포 지구 해상 방위대 부대장이라는 자리는 해군 또는 해안 경찰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거기에다 목포 형무소에서 처형당할 뻔한 위기를 겪은 것은 그의 반공 사상을 보증하고 있었다. 그는 당시 금융 조합(오늘의 농협) 연합회와 전국의 비료 및 양곡의 운송 대행 업무를 맡음으로써 임시 수도인 부산 출장이 잦아지고 그의 당좌 거래 통장에는 몰라보게 많은 동그라미가 그어졌다. 돈 벌기가 그렇게 쉬울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1971년 당시 김대중 후보 경호 실장으로 일한 박성철 장군을 만난 것도 이 무렵이었다. 그는 당시 해군 목포 헌병 대장이었다는 것이다. 부산의 고급 호텔에 묵으면서 정치인과 고급관료들에게 자기의 위세를 보이는 것도 청년 실업가 김대중으로서는 즐거운 일이었다. 미남인데다가 부지런하고 공손하여 거기에다 지난 날 목포 일보 사장으로서 언론을 경영하고 직접 논설을 휘두르기도 한 그의 식견은 26~27세라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성숙되어 있었다.
(김진배 지음, 김대중 비서실 편『인동초의 새벽』도서출판 동아, 1987, P56~57)
젊은 사장은 팔 소매를 걷어붙이고 돈벌이에 나섰다. 아무튼 요새 돈으로 수십억원을 벌었을 것이다. 재수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흥국해운은 당시 금융조합연합회(농협의 전신)와 구호양곡이나 비료 따위의 전국 해상수송 계약을 체결하고 그 일을 도맡아 했으니 돈벌이는 땅 짚고 헤엄치기였던 것이다.
목포의 유지들이, 일취월장하는 이 풋내기 부르조아에 대해 주목하게 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6․25후, 김대중 사장에게 목포일보를 맡아 운영해 보라는 청이 들어온 것이다. 이 신문사는 목포 역전 근처에 있는 아담한 2층 빌딩인데, 원래는 일본인이 경영하고 있던 것을 김 모씨가 이를 불하받아 그동안 운영해 왔었다. 그러나 이 경영자는 정미업에 종사하는 이 고장의 부자이기는 했으나, 언론기관 따위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 매일 신문을 발간하기에는 적이 힘겨운 노릇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편집국 기자들의 쥐꼬리만도 못한 월급조차도 제대로 지급하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 젊은 그는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인수하는 청을 쾌히 승낙한 것이다. 그리하여 돈과 시간이 넉넉해진 김대중씨는 곧장 스스로 사설을 갈겨쓰곤 했다. 그의 사설은 특히 농민이나 근로자, 혹은 실업자 구제 문제에 있어 일가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었다고 한다. 또 돈과 시간이 넉넉한 사람에겐 감투를 씌워주기를 좋아하는 계층이 있는 법으로 해운상사의 사장이자 신문사 사장인 그에게 이번에는 쟁쟁한 대한청년단 목포해양부 부단장 직함을 주겠다고 간청해 왔다. 이 감투에 무슨 꿍꿍이셈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사양하는 법 없이 받아들였다. 그의 인생은 바야흐로 순풍에 돛을 달고 쾌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내 생애 최고의 해였을지도 모른다.
(김형문,『金大中, 그는 누구인가』서울: 금문당, 1987, P45~46)
김대중 말로는 ‘6․25 직전 목포에서 우익단체인 대한청년단 해상단원’이었다는데 실제로는 6․25 종전 후에 대한청년단 목포해양부 부단장 감투를 쓴 것이다. 김대중은 한국전 당시 군복무를 한 적이 없고 돈벌이에 바빴다(대한청년단은 1953년 휴전 발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해체되었는데 정확히 언제 해체되었는지는 애매하다. 해체될 무렵 대한청년단 간부들이 감투 매매를 했던 모양이다).
김대중의 생애를 다룬 책은 김대중과 추종자들이 쓴 것만도 수십 권이 된다. 정치에 입문하기 이전의 김대중의 행적에 대해서는 조금씩 그 기술에 차이가 있다. 특히 쟁점이 되는 행적에 대해 그러하다. 왜 이런 차이가 발생했는지 각자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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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도요다 다이쥬 센세이(김대중 슨상님)가 우리나라의 군복무 했다고 믿는 사람이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