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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압/팬픽] 빙과 - 뒤풀이下
게시물ID : animation_22141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bk201
추천 : 4
조회수 : 1728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4/04/19 11:46:21
현 고전부 부장인 치탄다 에루의 기합이 잔뜩 들어간 축사와 함께 뒤풀이는 시작되었다. 그와 동시에 사토시는 들고 있던 과자 봉지의 주둥이를 있는
힘껏 열어 축포를 대신하는 듯한 소음을 냈다. 물론 시끄럽다는 이바라의 제재를 듣고는 바로 깨갱거리긴 했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참으로 많다. 치탄다와 이바라가 한 요리도 있을 터인데 이 과자들을 깨작거리다간 뱃속에 요리가 들어갈 공간이 남아있을지가 의문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 사태의 주범은 이바라의 쓴소리를 들은지 1분도 채 안 되어 과자들의 봉지를 닥치는 대로 열어 제끼고 있었다. 제딴에는 
뒤풀이의 분위기에 들뜬 것이겠지만 이 녀석은 가끔 남의 눈치를 보지 않을 정도로 들뜨는 게 문제다. 

"그만 뜯고 먹어 치울 생각이나 해라"

겉에 초콜릿을 입힌 막대 모양의 과자를 부러뜨리며 삼켰다. 사토시는 그제서야 자신이 벌여놓은 광경을 보고 머쓱해 하며 아직 열지 않은 과자 봉지
들을 자신의 비닐 봉지 안에 집어넣었다. 늦게나마 상황을 수습하려 드는 건 좋은 모습이지만 내가 큰맘 먹고 산 버터 과자가 왜 네놈의 비닐 봉지 
안에 들어있는 걸까. 이바라의 날카로운 시선이 다시 한번 사토시에게 무언의 질타를 꽂았다. 

"마야카씨는 어떤 게임 도구들을 가져 오셨나요?"

치탄다는 계속 참는 내색을 보이다가 기어코 이바라에게 질문을 던졌다. 

"별 거 없어. 도둑잡기용 카드랑 보드게임 몇개가 전부인 걸"

"그렇군요.."

이바라의 별 것 없다는 말이 무색하게 느껴질 정도로 치탄다의 눈에는 특유의 호기심이 가득 담겨져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 신호는 얼마 안 가 
치탄다의 무차별 호기심 폭격이 시작될 것 이라는 경고음과도 같았지만 그 호기심의 총부리는 내가 아닌 이바라를 향해 겨눠진 것이니 이번 만큼은
방관자의 위치를 고수하면 될것이리라. 이바라의 난처한 시선이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방황하고 있었다. 이제 내 기분을 좀 알겠냐. 

사토시는 자신이 저지른 실수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 양손 가득 과자를 쥐고선 쉴 새 없이 입을 움직이고 있었다. 이를 본 치탄다며 이바라며 
사토시를 말렸지만 사토시는 과자로 가득찬 입으로 겨우 미소를 지으면서 괜찮다는 사인을 보냈다. 나야 뭐 딱히 말릴 생각은 없다. 내가 나선다고 
해서 태도를 바꿀 놈도 아니고 말이다. 

"용케도 해치웠네" 

"이 정도 쯤이야" 

사토시는 자신이 뜯어 놓았던 과자 봉지 안의 내용물들을 전부 자기 뱃속으로 쓸어 넣는데 성공했다. 얼마나 많은 양의 과자를 이 녀석 혼자서 
해치웠냐면 하나, 둘, 셋... 적어도 저녁까지는 거뜬히 버텨낼 수 있을 정도의 양이었다. 이렇게 먹성이 좋았는 지는 금시초문인데, 하여튼 쓸데없는 
분야에선 의외성을 보여주는 데에는 이골이 난 놈이다. 

"후쿠짱, 요리는 어떻게 먹을려고 그래?"

이바라의 걱정에 사토시는 평소대로의 웃음을 지으며 자신이 건재하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저러고선 어디에다 토악질이나 안하면 다행이지. 

산처럼 쌓여 있던 과자들의 대부분은 주인의 뱃속으로 들어갔고 남은 것들 또한 봉지에 도로 넣는 것으로 처리했다. 잊지 않는다면 사토시의 봉지에 
있는 내가 산 버터 과자는 되찾아 가야 겠다. 내가 먹지는 않을 테지만 누나한테 바칠 공물로는 안성맞춤인 물건이니까. 어디까지나 잊지 않는다면의 
전제가 붙지만 말이다. 일단 그것보다 치탄다와 이바라가 만든 요리가 뭔지 구경이나 해볼까. 

"호오.."

사토시의 뻔한 감탄사와 함께 차려지는 음식들, 배도 다 불렀을텐데 생색은... 아니다. 충분히 그런 소리가 나올만한 걸. 

넓은 탁상을 가득 채운 음식들은 다름 아닌 올해 카미야마제에 있었던 요리 대회에서 고전부를 승리로 이끈 음식들이었다. 맛은 물론이거니와 
상징성도 갖추고 있는 썩 훌륭한 선택이었다. 치탄다는 한명 한명 젓가락을 주는 수고로움을 보여주었고 이는 내 스스로가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끔 
만들었다. 동시에 느껴지는 이바라의 따가운 눈총, 확실히 사과로는 부족한 감이 느껴지니 이 정도는 감수해야겠지. 

"아무쪼록 입맛에 맞으셨으면 해요"

치탄다와 이바라의 음식 솜씨라면 저런 말은 그냥 예의 상 해주는 말이라 생각하는 게 좋겠지만 저 순진무구한 아가씨의 눈은 혹시나 하는 생각에 
긴장감을 띄고 있었다. 자신의 실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좀 눈치채 줬으면 좋겠는데. 

"맛있네" 

감자떡을 한입 깨물고 나서 치탄다를 안심시키기 위해 한마디 내뱉었다. 실제로도 맛은 훌륭한 편에 속했다. 치탄다는 이 말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고 빙긋 입꼬리를 올렸다. 

"감사한 마음으로 먹어. 오레키"

하기사 약속도 어긴 주제에 음식의 맛을 평가하려는 태도 부터가 오만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다. 일단은 치탄다도 안심 시켰으니 지금 부터라도 맛을 
음미하면서 조용히 먹어야 겠다. 다른 일에 신경 썼다가는 다른 녀석들에게 내가 먹을 몫을 빼앗길 것 같다는 기분이 들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 


상에 차려진 요리들이 전부 바닥을 보일 때가 되어서야 고전부원들의 젓가락질이 종료되었다. 간략하게 소감을 말하자면 음식이 맛있었다는 것과 
치탄다의 식탐이 예상 외로 대단하다는 점, 마지막으로 내 감이 의외로 괜찮은 면모를 보여줄 때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토시는 
자신의 뱃속 형편을 고려하지 않은 채 막판 스퍼트를 올려 상에 차려진 음식들 중 3분의 1에 달하는 양을 먹어 치우는 기염을 토해냈다. 그 덕분에 
현재 사토시는 이바라의 간호를 받으며 마루 너머로 보이는 정원의 모습을 보면서 누워 있는 상태였다. 저래선 집에나 제대로 돌아갈 수나 있을런지. 

"마셔보세요. 효과가 있을 거에요"

사토시의 상태를 확인하고 부엌으로 달려 갔던 치탄다는 유리잔에 진한 갈색 액체를 담아서 가져왔다. 사토시는 좀 처럼 볼 수 없는 핼쑥한 얼굴을 
한 채로 치탄다가 건넨 잔을 받기 위해 겨우 겨우 일어나 잔을 받아들었다. 

"미안해. 나 때문에 흥이 깨져버렸네" 

"그런 말 하지마 후쿠짱.." 

시종일관 사토시를 휘어잡는 이바라가 저렇게 약한 모습을 보일 정도니 사토시의 상태가 조금은 진지할 정도로 심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래도 사토시 본인이 옅게나마 미소를 놓지 않고 있으니 너무 진지하게 반응하지 않는 것이 사토시를 도와주는 일일 것이다. 

"숨쉬지 마시고 단번에 들이키세요"

치탄다의 메뉴얼에 따라 사토시는 고개를 꺾어 유리잔에 담긴 액체를 목구멍으로 흘려보냈고 그 액체가 뱃속으로 흘러갔을 즈음 격한 반응이 
사토시의 뱃속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웃"하는 소리와 함께 벌떡 일어난 사토시는 치탄다에게 화장실의 위치를 물어 보고는 방금까지 뻗어 
있었다는 사실을 잊게 만들 정도의 힘 있고 빠른 걸음으로 방을 빠져나갔다. 

"너 대체 사토시한테 뭘 준거냐"

"저희 집에서 직접 담근 매실청을 드렸어요. 할머니께서 배탈이 났을 땐 매실청이 효과가 좋다고 말씀하셨거든요" 

...뭔진 몰라도 효과가 바로 오는 걸 보면 대단한 것 같아 보인다. 그나저나 나도 지난 번에 길을 잃어버려서 헤맨 적이 있었는데 하물며 뱃속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사토시가 길을 똑바로 찾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휴~ 큰일날 뻔 했네" 

사토시는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와 같은 가벼운 어투를 구사하며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래도 저런 여유를 보일 수 있다는 건 문제가 전부 
해결 되었다는 얘기겠지. 매실청이라.. 호농 치탄다가가 가지고 있는 여러 비법 중 하나인가. 

"하마터면 엄청난 실례를 저지를 뻔 했지 뭐야. 그나저나 치탄다, 방금 내게 줬던 건 뭐야?"

농담까지 지껄이는 걸 보니 확실히 문제가 해결된 게 맞나 보다. 

"매실청이라고 하는 거에요"

"그렇구나. 난 또 뭐라고.."

어라, 사실은 그렇게 대단한 게 아닌가 보다. 

"..."

매실청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궁금한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질문을 하게 되면 왠지 내 지식의 바닥을 드러내는 것 같아 보여서 관두기로 했다. 
이바라는 이런 나를 가소롭다는듯 입꼬리를 히죽 올린 채로 보고 있었다. 들키는 건 괜찮다만 하필이면 이바라냐. 

뭐 어쨌든 사토시가 정상으로 되돌아 왔으니 끊겨 있던 뒤풀이를 다시 즐길 때가 되었다. 진수성찬이 가득했던 탁상에는 이바라가 가져 온 각 종 
게임 도구들이 너저분 하게 올라와 있었고 우린 그 중에서 치탄다가 그나마의 룰을 알고 있는 게임을 고르느라 꽤나 고심했다. 그렇게 해서 고른 
게임은 바로 도둑잡기. 하필이면 내가 제일 못하는 게임이었다. 

"아!! 다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패를 잡고 서로의 카드를 뽑기를 기다리던 차 치탄다는 갑작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어디론가 달려갔다. 그리고선 오른쪽 허리에 고급스런 상자를 
끼고 돌아왔다. 처음 상자를 봤을 때는 상자의 정체가 무엇인지 긴가민가 했지만 치탄다가 우리 앞에 상자를 올려 놓았을 때 나는 이 상자를 올해 
여름, 2학년 F반에서 한번 보았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이건.."

"치짱 이거.."

사토시와 이바라도 이 상자의 정체를 깨달은 듯 당혹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유일하게 웃음기를 잃지 않은 사람은 치탄다 밖에 없었다. 

"이걸 왜 여기서 꺼내는 거냐" 

"벌칙용으로 쓰면 괜찮지 않을까 해서요" 

벌칙용이라, 나쁜 생각은 아니다만 이 상자 안에 들어 있을 내용물들에게 가장 큰 피해를 입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라는 걸 알고 있을텐데.그새 주량이 늘기라도 한 건가. 치탄다는 사토시와 이바라의 의견은 듣지 않고 그대로 상자의 뚜껑을 조심스레 열었다. 불안한 예상은 언제나 잘 
들어 맞는 다는 사실을 증명하듯 상자 안은 양주 병의 모양을 한 초콜릿들이 가득 늘어서 있었다. 상자 안의 내용물이 공개되자 치탄다를 제외한 
고전부 일동은 꿀먹은 벙어리가 되어 버렸다. 물론 나도 포함해서 말이다. 

"..평범한 벌칙은 없냐?" 

곤란하다. 정말로 곤란하다. 저 위스키 봉봉에 들어 있는 술의 양이 적기라도 하면 모를까, 가뜩이나 자신없는 게임이 첫 종목으로 선정된 이상 저 
위스키 봉봉을 내 입에 들이는 일은 필히 막아야 될 일이다. 

"그래 치짱, 치짱도 저번 일로 꽤나 고생했잖아.."

그렇지 이바라, 마지막으로 사토시의 호응만 있으면 제 아무리 치탄다라 할지라도 한 수 접고 들어가겠지. 

"어.. 재밌겠는데?"

사토시는 내 기대를 무너뜨리는 대답을 한 것도 모자라 급기야는 이바라를 설득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그러고보니 저 녀석은 내가 도둑잡기에 
쥐약이란 걸 알고 있는 유일한 놈이었지. 사토시와 연결된 길고 긴 인연의 끈이 원망스러울 뿐이다. 

"그렇다면 나도 찬성. 너는 어때 오레키?" 

결국에는 이바라마저 사토시의 꾀임에 넘어가 버렸다. 수적으로도 불리하고 명분 상으로도 치탄다 쪽이 득세에 있는 상황이다. 침을 꿀꺽 삼키고 
고급스럽게 포장되어 있는 위스키 봉봉들을 내려다 보았다. ..될대로 되라지. 한번 부딪혀 보자. 다른 건 몰라도 사토시 녀석의 입 속에 위스키 봉봉을 취할 때 까지 넣어주고 말겠다. 

....

"뭘 그렇게 망설이는 거야 호타로?"

그럼 그렇지. 옛날하고 달라진 게 전혀 없다. 내 딴에는 분명히 감정 조절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린 것이라지만 다른 녀석들이 보기에는 '도둑 카드는 
여기 있습니다' 하고 얼굴로 말해주는 성 싶다. 거울이라도 있으면 내 표정이 얼마나 바보같아 보이는 지 확인해 보고 싶은 걸. 

"보채지 마"

떨리는 손으로 위스키 봉봉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윽, 그 때 보다 들어 있는 술이 더 독해진 느낌인데. 발효라도 된 건가. 

내가 위스키 봉봉 안에 들어 있는 술에 의해 미간을 일그러 뜨리자 다들 재밌다는 듯 웃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다들 똑같은 웃음의 형태지만 
유독 사토시가 보여주는 웃음은 어느 때 보다도 악랄하면서도 사악해 보였다. 

"괜찮으세요 오레키씨?"

유일하게 이런 말을 해주는 건 치탄다 뿐이지만 이 일의 주동자가 누군지를 생각하면 치탄다의 위로도 달갑게 들리지는 않는다. 나는 탁상에 올려져 
있는 음료수로 입을 가신 다음 바닥에 놓인 카드들을 모아 재빠르게 섞었다. 이런 곳에서 승부욕을 불태운다는 건 에너지 절약을 명백히 위반한 게 
되겠지만 그렇게 따지자면 이 뒷풀이에 참여한 것 자체가 에너지 절약을 포기한 것이 된다. 내 좌우명을 어긴 일은 매우 유감스럽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방금 전의 일을 설욕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 

"얼른 뽑으세요 오레키씨"

카드 두장 중 하나를 뽑아야만 하는 마지막 차례, 이 패의 주인인 치탄다 에루는 수도 없이 보여줬던 화사한 미소로 내 결심을 혼들어댔다. 아까 카드 
패를 살짝 옆으로 옮긴 것을 보아하니 왼쪽의 카드가 도둑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과연 이 천진난만한 소녀가 그 정도의 트릭을 쓸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상대가 이바라나 사토시 였다면 선택지가 확실하게 갈렸을 테지만.. 여러 모로 힘든 상황에 놓였다. 

"휴.."

이런 상황에서는 자신의 운을 믿는 것이 가장 현명한 답이다..라고 생각은 해도 내 운이 썩 좋은 축에 드는 건 아니다. 그저 이 두가지 갈림길에서 
어서 벗어나고 싶을 뿐이다.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오른쪽에 있는 카드에 손을 뻗었다. 

"...."

"아쉽게 됐네요. 오레키씨" 

..그렇게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치탄다가 벌칙을 받게 될 지라도 내 기분이 크게 기쁘지 않은 것이 이유였다. 내가 위스키 봉봉을 먹이고 싶어 하는
대상은 치탄다의 뒤에서 비겁한 미소를 흘리는 (물론 내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것이겠지만) 후쿠베 사토시였다. 

"꽤 맛들렸나봐 오레키?" 

이바라는 아무렇지도 않게 위스키 봉봉을 먹어치우는 나를 보며 조롱의 말을 던졌다. 내가 이 독한 위스키 봉봉을 먹고도 표정에 어떠한 변화가 
없다는 건 맛에 익숙해져서가 아니라 그만큼 맘을 독하게 먹었다는 증거다. 

"너무 열심인 걸 호타로"

누구 덕분에 말이지. 이젠 이유고 뭐고 없다. 어떤 수를 동원해서라도 네놈의 입 속에 위스키 봉봉을 넣어주고 말테다. 일단 그러기 위해선..

"종목 변경이다" 

"어째서?"

"기회를 균등하게 배분하기 위해서다"

내가 뭐라고 말한 건지는 몰라도 다들 내 말을 납득하는 분위기 였다. 나는 카드 뭉치를 탁자에 올려놓고 다른 게임은 적당한 게 없나 살펴보았다. 
치탄다가 하는 방법을 알고 있으면서도 내게 불리하지 않은 게임이 뭐가 있을까나. 

"풉"

"뭐가 웃기냐" 

"뭐랄까, 가장 호타로다운 선택인 것 같아서 말이야" 

내가 고른 게임은 오크통 안에 든 사람이 튀어 나올 때 까지 여기 저기에 칼을 꼽는 게임이었다. 이 정도로 쉬운 게임을 치탄다가 어려워 할 리도 
없었고 어느 누구에게도 불리함을 주지 않는 공평한 게임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마 사토시가 이 선택을 가장 나 답다고 말한 이유는 이 게임의 간결성 
때문일 것이다. 그 능글맞은 웃음이 언제까지 계속될 지 두고 보자고. 사토시와 내가 판을 준비하는 사이, 이바라는 치탄다에게 게임의 룰을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고 치탄다는 입을 가리며 놀란 뒤 재밌겠다며 싱긋 웃었다. 그나저나 이런 게임도 여태껏 해보지 못했다니 유서 깊은 가문들의 자제들은 
다도나 꽃꽂이라도 하면서 노는 걸까. 

"그럼 이제 순서를.."

"저,저기!"

번쩍 손을 드는 치탄다. 

"제가 먼저 해도 괜찮을까요?"

적어도 한바퀴는 돌아야 벌칙자가 나올 테니 맨 첫번째 순서를 치탄다에게 내주어도 딱히 문제될 일은 없어 보였다. ..너무 냉정하게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다. 치탄다는 그저 처음 접해보는 게임에 대한 기대감이 부푼 것 뿐인데 말이다. 

"그럼.. 갈게요"

사토시와 이바라도 치탄다에게 첫번째 순서를 양도했다. 치탄다는 자그마한 플라스틱 칼을 살펴 보고서 조심 스럽게 구멍에 맞추어 칼을 끼워 넣었다. 

"...?"

"어..?" 

오크통 밖으로 머리만 삐죽 내밀고 있던 사람이 높게 용솟음쳤다가 이내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다들 어안이 벙벙해진 상태였고 당사자인 치탄다는 
더더욱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초심자에게도 자비가 없는 오크통이군. 

"자"

나는 내 손으로 직접 위스키 봉봉을 벌칙자인 치탄다에게 건네주었다. 치탄다는 방금 상황에 대해 여전히 놀라워 하면서도 내가 준 위스키 봉봉을 
넙죽 받아 고맙다는 말과 함께 입에 넣었다. 정말로 주량이 늘기라도 한 건지 치탄다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이 오독오독 씹는 소리까지 내면서 
위스키 봉봉을 먹어 치웠다. 

"다음 판, 얼른 시작하죠"

..강적이다. 

...

현재 스코어를 말하자면 오레키 호타로 : 4개, 치탄다 에루 : 5개, 이바라 마야카 : 3개, 후쿠베 사토시 : 3개로 도둑잡기에서 깨지는 모습만을 
보여줬던 나로써는 상당한 선전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었다. 총갯수를 따지자면 2등에 위치하고 있었지만 이번 게임으로만 다른 녀석들에게 십수개의 
위스키 봉봉을 먹이는데 성공 했으니 내가 먹은 위스키 봉봉 2개 쯤은 감수할 수 있었다. 아, 그리고 이 오크통 룰렛을 계속 하게 만들어 준 고전부 
부장 치탄다 에루에게 감사의 뜻을 표한다.

치탄다가 칼을 꼽는 족족 오크통은 안에 들어 있던 사람을 뱉어내기를 반복했었고 우리는 이 확률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바라와 사토시는 
치탄다를 적당히 구슬려 다른 게임을 하도록 설득 시키려 했고 나조차도 게임의 종목을 바꾸자고 제안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치탄다는
호승심이 생긴 건지 평소에는 좀 처럼 볼 수 없는 독단적인 모습을 보였고 결국에는 게임의 종목을 변경하지 않은 채 계속 이어 나가기로 결정했다. 
그 결과..

"헤.. 다들 준비는 되신 건가요...?"

이로써 치탄다가 먹게 된 위스키 봉봉의 갯수는 총 7개. 그 사이 이바라와 사토시도 위스키 봉봉을 하나씩 먹어 4개가 되었지만 머리 위로 스멀스멀 
취기가 올라오고 있는 치탄다에겐 상대가 되지 않는 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여름 때에도 이 정도를 먹고 취해서 쓰러지지 않았었나. 어쨌든 여러가지로
인과응보다. 자신이 제안한 벌칙에 자신이 가장 호되게 당하고 있는 상황이니. 

"그만하고 좀 쉬는게 어떠냐"

상자 안에 든 위스키 봉봉도 거의 다 해치웠으니 이쯤에서 게임을 끝내는 게 이상적인 헤피 엔딩이겠지만 승부욕과 취기가 더해진 치탄다를 누가 
감히 막는단 말인가. 내가 한 말도 거의 예의 상 해준 말에 불과하다. 

"히.. 겁먹으신 거에요오?? 오레키...씨" 

아예 성격이 바뀌어 버렸다. 상태가 저번 보다 심한데. 사토시와 이바라도 곁눈질로 치탄다의 상태가 좋지 않아 보인다는 신호를 전달했다. 그런들 
뭐하나 딱히 좋은 방법이 없는 걸. 

"아니, 계속하자"

치탄다는 내 말에 얄미워 보이는(좋은 의미로써의) 함박웃음을 지었다. 양 볼이 붉게 상기된 게 더더욱 어울려 보였다. 이바라는 치탄다가 보이지 
않게 입을 가린 채로 "오레키 제정신이야?!" 라고 작게 말했다. 유감스럽지만 제정신이다. 조용히 폭주하고 있는 치탄다를 멈추기 위해선 제 풀에 
쓰러지기를 기대할 수 밖에 없다. 어차피 장소도 치탄다 본인의 집이기 때문에 부축의 수고를 할 필요도 없다. 

..솔직히 말하자면 누구 한명이 술기운에 쓰러져야지 이 뒤풀이가 끝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시간이 제법 지나기도 했고 말이다. 늦게나마 나의 
신조를 지키려는 것 뿐이니 다른 녀석들의 비난을 듣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얼른.. 히끅.. 꼽으세요! 오레키씨이이"

이중인격이라고 해도 믿겠다. 아니면 치탄다가 여태껏 우리에게 보여줬었던 조숙한 숙녀의 모습이 가짜였던 걸까. 뭐, 농담은 여기까지. 아무쪼록 
내 순서가 지나면 치탄다의 순서가 찾아오므로 적당히 넘기기만 하면 될 것 같다. 치탄다의 칼이 빗나갈 수도 있을 테지만 현재까지의 전적을 봐서는 
빗나갈 확률이 더 적을 것 같았다. 

"와~ 오레키씨 당첨~!"

내 칼이 오크통의 칼집 안으로 들어감과 동시에 안에 들어 있던 사람은 삐죽 튀어 나와 바닥을 굴렀다. 치탄다는 마치 복권에 당첨된 걸 축하해 주는 
종업원 같은 멘트를 내뱉었다. 사토시의 안타깝다는 시선이 내 눈에 들어왔다. 생각해 보니 내가 이 게임에 뛰어든 이유는 저 녀석 때문이었던 것 
같았는데..나도 참 일관성 없는 놈이다. 

어찌 되었든 이번 벌칙을 받아야 되긴 한다. 이러다간 내가 치탄다처럼 변할지도 모르겠는... 뭐 하는 거냐 치탄다. 

"특별 상~! 자 아~ 하세요 오레키씨" 

치탄다는 어느새 내 눈 앞으로 다가와 위스키 봉봉을 직접 입 안에 넣어주려 하고 있었다. 자신이 궁금해 하는 일에 매료 되었을 때에도 이 정도의 
적극성을 띤 모습은 보여준 적이 없었던지라 당황스럽기 그지 없다. 사토시와 이바라도 상당히 놀란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아무렴 나만큼이나 할까. 
대체 이걸 어떻게 받아줘야 한단 말이야. 식은땀이 이마를 타고 흘러 미간을 스쳐 지나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알아서 먹을게"

치탄다의 손에 들려 있던 위스키 봉봉을 낚아채 입안에 넣었다. 이런 상황 자체가 썩 달갑지도 않고 치탄다와는 앞으로도 계속 봐야하는 사이이기 
때문에 이런 창피한, 훗날 회상하면 얼굴을 붉힐 기억을 남겨봤자 좋을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당돌한 아가씨는...

"반칙! 그러는 게 어딨어요!!"

"!@%!^%!@$#!"

위스키 봉봉의 단맛과 함께 짭짤한 맛이 느껴졌다. 치탄다는 내 입 속에 손가락을 넣어 이리저리 휘저은 다음 살짝 녹은 위스키 봉봉을 내 입 안에서 
도로 꺼냈다. 행동 자체가 말도 안될 정도로 터무니 없어서 그런지 난 눈만 껌벅 거리고 있었고 사토시와 이바라도 숨죽인 채 치탄다를 보고 있었다. 
정신을 한참이나 놔버린 치탄다는 낮게 깔린 웃음소리를 내더니 다시 한번 내 입에 위스키 봉봉을 넣으려 들었다. 

"이번엔 제대로 아~ 해주세요"

말과는 다르게 이미 치탄다는 다물고 있는 내 입술 사이를 비집어 위스키 봉봉을 집어 넣고 있었다. 정상적 이라면 당장에라도 발버둥 쳤을 테지만 
어째선지 그럴 수가 없었다. 사지가 마비된 것만 같았다. 움직일 수 있는 건 오로지 두 눈이 전부였으며 위스키 봉봉이 서서히 입 속으로 들어가는 
장면을 보고 있었다. 그렇게 위스키 봉봉이 다시 내 입 속으로 들어오고 치탄다의 손가락이 내 입술에 다은 순간, 치탄다는 정신을 잃은듯 비틀거리다가 내 품을 파고들고 말았다.  

......

"안녕하세요 오레키씨"

카미야마제의 여운을 씻은 주말을 넘어 되돌아온 평일, 여느 때와 같이 들른 고전부 부실 안에는 치탄다만이 주황색 노을을 받으며 다소곳이 앉아 
있을 뿐이었다. 

"..너 그 때 일은 어떻게 됐냐"

"네?"

"...뒤풀이 말이야"

치탄다는 어색한 웃음을 흘리다가 몇분 뒤에야 입을 열었다. 

"그때 일은 정말 죄송했어요"

치탄다는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90도로 접어 정중히 사과했다. 

"그 때 일이 자세히는 기억이 안나지만 폐를 끼쳤을 게 분명해요.."

예상 외로 치탄다는 그 때 일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게 말로만 듣던 필름이 끊긴다는 현상인가. 어쨌든 천만다행이다. 이 사실을 몰랐으면 
적어도 내가 치탄다를 대하기 어려웠을 게 분명했다. 당사자가 기억하지 못한다는데 나 혼자서 그 때의 기억에 매달려 어색하게 굴 필요가 없었다. 

난 이제서야 안심하며 평소처럼 의자에 앉아 미리 준비해 둔 페이퍼 백을 읽기 시작했다. 치탄다는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

페이퍼 백을 거의 다 읽었을 즈음, 치탄다가 무얼 하고 있나 살펴 보니 자기 오른손의 엄지 손가락과 검지 손가락을 마주대어 비비고 있었다.
별 특별한 의미도 없는 행동 같았지만 치탄다의 눈은 빛을 내고 있었다. 뒤풀이 때 보여준 모습도 그렇고, 여러 모로 얽히고 설힌 수수께끼 같은 
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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