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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의 성립과 관련해서 쓰는 글
게시물ID : history_1544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콜라캔
추천 : 5/4
조회수 : 749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4/04/20 19:00:08

이 글은 14년 3월 18일 네이버 카페 및 블로그에 쓴 글입니다. 우연히 들렀다가 고조선 관련해서 글들이 많이 올라와있길래 도움이 될까해서 올립니다.


고조선 관련해서 댓글 다는 걸 보고(역개루), 갑자기 생각나서 하는 말이지만, 애초 고조선을 B.C 7세기로 잡는 것도 높게 잡는겁니다. 요령지방의 청동기문화의 시작을 교과서에서 기원전 15세기로 잡지만은, 이건 청동기문화의 시작이라는 거지 이것이 곧 청동기의 사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무문토기의 사용 유무 + 아주 간단한 소형 청동용구들의 사용유무에 청동기시대의 시작이라고 하는 거지요. 물론 청동기가 발견이 없고, 무문토기의 시작 그 자체를 청동기시대로 잡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어쨌든 제쳐두고, 기원전 15세기는 엄연히 따지면 청동기시대의 시작이라 할 수도 없어요.


본격적인 시작은 기원전 1000년기 전반이고, 이 시기나 되야 본격적인 청동기시대의 돌입이라고 학계에서 입을 모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절대적인 연대가 아니에요. 요령지방 그 중에서도 더 선진적인 요서지방에서의 비파형동검문화의 시작을 일반적으로 기원전 9~8세기 사이로 잡기는 하지만, 이건 절대편년에 의거한 것이 아니고, 상대편년에 의거한 연대이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저 연대가 맞는지는 확실하게 알 수가 없어요.
 
비파형동검문화의 상대적 편년은 어떻게 구했냐면은 노로아호산 이북에 있는 하가점상층문화 남산근유형의 남산근M102호 무덤에서 나온 유물조합에 의거한 상대편년입니다. 남산근 M102호는 은말주초의 청동예기가 출토되기 때문에 그 절대적 편년을 알 수가 있죠. 그리고 남산근M102호에 나오는 유물이 조양 십이대영자 유형에서도 그대로 나오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죠. 하지만 꼭 유물조합이 같다고 그것이 같은 시대라고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십이대영자에서 나온 유물들이 후대에 이 곳으로 오면서 묻힌 것일 수도 있기에 꼭 확실하다고 말할 수 없는 거죠.
 
본론으로 들어가서 일반적으로 국가 형성은 청동기시대 이후라고 하지만은, 그렇다고 청동기시대라고 무조건 국가라는 것이 성립되는 것은 아니죠. 마찬가지로 고조선이라는 국가가 본격적인 청동기시대에 들어선 B.C 9~8세기경에 꼭 성립됐다고 볼 수는 없는겁니다. 기원전 2333년은 당연히 터무니 없는 소리고, 누구는 관자의 기록을 근거로 해서 관자가 살았던 시대이니 기원전 7세기경에는 적어도 고조선이라는 실체가 존재했다고 주장하지만은, 애초 관자가 전국시대에 지어진 책이고, 관자 이외에 다른 어떠한 문헌에서도 고조선이 이 시기에 존재하였다는 기록은 없으므로, 이것도 꼭 백퍼센트 신뢰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또 관자 이외의 책에서는 고조선이 전국시대에 들어가서야 그 기록이 보이므로, 오히려 기원전 4세기경이나 되야 고조선이라는 실체가 등장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거죠. 물론 이것은 중국의 지리적 관념이 아직 요동 또는 한반도 서북 지방에까지 미치지 못하였을 때이므로, 이전에도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지만, 이것도 하나의 가능성일 뿐 근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좀 더 심화해서 고고학적으로도 보자면은, 분명 요령지방에는 비파형동검문화라는 꽤 발달한 청동기문화가 있었음은 맞습니다. 그러나 이 문화간에는 서로 공통적인 점도 있으나, 지역마다 그 지역성이 매우 뚜렷하고, 어떤 지역은 거의 이질적이다 싶을 정도로 같은 문화 안에 다른 문화를 형성한 곳도 있습니다. 과연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서로 토론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을 합니다.
 
물론 저는 고조선이 기원전 7세기경에 중국 동북지역 또는 서북한 지역 어딘가에 어느 정도 실체가 있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흔히 고조선이 성립 시기부터 거대한 왕국 또는 제국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전제를 깔고 있기 때문에 무리하게 고조선의 연대를 올리는 것이 아닌 가 합니다. 저는 이 시기에 고조선이 어느 정도 실체로서 있다고 보고 있지만은, 이것이 국가로서 성립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건 아닙니다.  이 시기는 고조선이 국가로서 성립을 했다고 보기에는 그 유물적 조합이 매우 조악하며, 한정된 지역에서만 문화적으로 공통성을 띌 뿐 지역성이 너무나 강합니다. 고조선이 초보적이나마 국가로서 성립한 시기는 B.C 5~4세기 전국연문화가 요서지역을 넘어 요동지역으로의 침투하는 시기로 보고 있습니다. 그 근거로서 이 시기가 되면 요서 지역은 거의 연문화의 침투로 이전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며, 요서 지역의 문화가 요동지역으로 넘어오면서 새로운 문화가 형성되는 시기가 됩니다.
 
이를 흔히 정가와자 유형이라고도 부르는데, 이 시기도 아직은 지역마다 그 지역성이 남아있지만은, 어느 정도 문화적으로 통합되는 양상을 보입니다. 그리고 정가와자 6512호묘는 최고 수장층 무덤 답게 무덤 안에서 엄청난 양의 유물이 나오는데, 안에서 정치적 지배자를 상징하는 무기류와 제정적 지배자를 상징하는 유물이 함께 출토됩니다. 이는 정치권과 제사권의 결합인 제정일치적지배자로 볼 수 있으며, 이것이 곧 국가가 형성되었다는 하나의 상징적 요소로서 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물론 이것도 약점인 것은 이 무덤 외에는 중국 동북지역이나 서북한 지역에서 이와 관련한 유물조합이 발견된 예가 없기 때문에 단편적인 사례를 확대해석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만 반대로 이러한 유물조합이 똑같은 유적이 나온다면 수장층으로서 무덤이 여러곳에 존재한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으니 오히려 통합되지 못한 정치체라고도 볼 수 있겠죠.
 
결론은 고조선이 기원전 7세기경에 있었을 가능성도 매우 높지만은, 이것은 가능성일 뿐이지 확실한 근거는 없습니다.
고조선이 초보적이나마 국가적으로 형성된 것은 기원전 5~4세기경 쯤이 아닌 가 사료됩니다. 말이 길어졌지만은, 참고하면 좋을 거 같아서 처음 짧게 쓰려다가 길게 쓰게 되었습니다.

좀 더 첨언해서 적자면은, 밑에 고조선 관련 글들을 보면 고조선의 물질문화로서 '비파형동검 + 고인돌 + 미송리형토기' 3Set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3Set는 서로 조합될 수 없는 위치상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좀 더 부가설명을 하자면은, 고인돌에서는 애초 유물이 거의 출토된 적이 없고, 특히 수장층의 무덤으로서 지적되는 탁자식(북방식) 고인돌에서는 단 한점의 유물도 출토된 적이 없습니다. 또한 고인돌은 요동 남부 지역에서 유행한 무덤양식이고, 미송리형토기는 요동 북부지역에서 유행한 토기양식입니다. 서로 지역간 출토지점이 전혀 일치하지 않으며, 요동 북부 지역에서 유행한 무덤양식은 고인돌이 아닌 석관묘입니다. 마찬가지로 미송리형토기도 석관묘에서 출토되었지 고인돌에서 출토되는 유물이 아니라는거죠. 물론 요동 남부 지역의 보란점시 쌍방 6호 무덤이나 봉성 동산 유적 등에서 출토된 예가 있긴 하지만은, 이는 고조선의 수장층의 무덤으로서 지적되는 탁자식 고인돌이 아닌 하부구조는 석관묘의 구조를 가진 개석식 고인돌에서 출토된 것들이며, 그 수도 소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즉 고조선의 물질문화로서 위의 3조합은 이루어질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동 지역은 비파형동검문화권으로서도 외연 지방에 해당되는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비파형동검문화의 중심지로서 떠오르는 것은 요서지역의 비파형동검문화가 쇠퇴한 이후에 요동 지역에서 정가와자유형이 성립된 이후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전에는 그 문화권이 요동 북부, 요동 남부, 요동 남단, 요동 동부 지역으로 몇개의 문화권으로 나뉘는데 이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요동 북부 지역은 마성자문화의 전통을 이어받은 지역으로서 태자하~혼하 일대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지역에서는 기원전 1000년기 전반에는 미송리형토기가 유행하였고, 돌대각목문토기(조상부가퇴문토기), 노성형호, 대화방형관, 수교이호 등의 토기가 공존하거나 이전에 사용되었고, 무덤양식으로는 석관묘가 사용되었습니다. 
요동 남부 지역은 문화의 교차로같은 지역으로서 요동남단지역과 북부 지역의 사이에 있어 두문화의 영향을 조금씩 받는 지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토기로는 이중구연심발형토기가 유행하였고, 고인돌이 주무덤양식이었습니다.
요동 남단 지역은 요동지역 중 가장 지역성이 강한 지역으로서 쌍타자문화의 전통을 이어오는 지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지역에서 토기로는 강상형토기라 불리어지는 목이 긴 장경호에 무늬가 있는 것이 사용되었고, 무덤으로서는 강상묘 누상묘로 잘 알려진 적석묘가 사용되었습니다. 
요동 동부 지역은 후에 초기고구려가 성립되는 지역으로서 요동 북부 지역의 강한 영향을 받고 성장하여 토기문화가 요동북부지역가 유사하여 돌대각목문토기, 노성형호, 대화방형관, 수교이호와 이 지역만의 특색인 절연심발형토기 등이 사용되었습니다.

뭐 이를 쉽게 얘기하면 같은 요동지역 안에서도 문화적 특색이 뚜렷한 이 지역에서 과연 저 3유물 조합 Set라는 간단한 조합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지 애초에 의문이며, 과연 이 지역이 하나의 문화권 또는 국가라는 걸로 단정지을 수 있는지 많은 생각이 들게 하지요.
고조선 문제는 생각보다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흔히 쉽게 비파형동검 가지고 왈가불가하지만은, 그건 이 문화에 대해 너무 간단하게 보는 데에서 나오는 착오일 뿐. 이 복잡한 문화현상을 어찌 해석해야할지 고민하는 글은 한번도 본 적이 없던 거 같군요.
어쨌든 첨언하는 글도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글이 너무 길어졌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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