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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리크 쥐스킨트-향수를 읽고....
게시물ID : readers_78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If
추천 : 12
조회수 : 1301회
댓글수 : 9개
등록시간 : 2007/11/01 19:46:24
저는 이 책을 나름대로 철학적이라고 생각하면서 읽었습니다^^
물론 책을 보는 관점이야 책을 읽는 사람의 수만큼이나 다양하겠지만은 일단 제 관점은 이렇네요...

 향수는 생각할거리가 많은 책이었죠... 
다른 말로 하자면 이 책의 중심 초점이 어느 것인지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다는 말도 되겠죠. 
어떤 관점에서 책을 읽느냐에 따라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올 수 있었고, 그만큼 흥미로운 책이었죠. 
  우리는 여러 가지를 통해서 사물을 인식하죠. 시각과 청각, 후각, 촉각 등등. 우리는 무엇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나는 존재할 수 있는 것이죠. 
  그리고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을 통해서 나는 어떤 사람인지를 정의 내릴 수 있죠. 하지만 소설의 주인공 그루누이에게 있어서 세상을 인식하는 방법은 오로지 ‘향기’ 하나뿐이었던 것이죠. 
  향기에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났기에 다른 감각들은 그 중요성을 잃고 오로지 향기로만 세상의 모든 것을 인식하고, 오로지 향기라는 하나의 방법을 통해서만 세상을 볼 수 있을 뿐이죠. 그에게 있어서 ‘향기’는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창이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비극적이게도 그루누이 자신에게는 아무런 냄새가 없죠. 
이것이 왜 비극인 것인가?
 만약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도 않고 아무런 소리도 낼 수 없다면, 또한 무엇을 만질 수도 없다면.......한마디로 유령과 같은 상태라고 한다면 우리는 존재하는 걸까요? 그건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요? 세상과 아무런 관계를 맺을 수도 없는 그런 상태를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루누이에게는 냄새가 없을 뿐이지만 그에게 있어서 냄새가 없다는 것은 냄새만으로 세상을 인식하는 그에게는 충분히 존재성에 대한 위협이 될 수 있는 것이죠. 왜냐하면 그가 세상의 모든 것을 인식하는 방법은 바로 냄새를 통해서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나의 존재를 확립해 나가기도 합니다. 나는 하나이지만 하나가 아닌 것이죠. 나는 나인 동시에, 대한민국의 한 시민이기도 하고, 부모님에게는 아들이고, 누군가의 친구이기도 하며, 누군가에게는 오빠나 형이 되기도 하는 거겠죠. 이렇듯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투영된 자신의 모습에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기도 하죠. 문득 생각나는 시가 있는데, 이 시가 이런 점을 잘 표현하고 있죠.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그런데 그루누이가 만났던 사람들은 어떠했죠? 
  위의 시에서처럼 그의 ‘이름’을 불러 준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었던가요? 그의 존재를 알아봐준 사람은 누구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단지 그루누이에게서 자신들이 취하고자 하는 것들만을 취했을 뿐이죠.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모습대로의 그루누이를 보았을 뿐 그루누이의 진가를 보아준 사람은 누구도 없었습니다. 계몽 켐페인을 위해 필요한 존재로, 혹은 향기 제조에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어서 자신에게 부와 명예를 안겨줄 존재로, 혹은 노예와 같은 존재로만 보았을 뿐 그루누이 그 자체를 보아준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그루누이는 마치 사람들이 보고 싶어하는 모습만을 보여주는 마법의 거울과도 같은 존재였죠. 그랬기에 더욱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는 혼란을 느낀 것이겠고요. 
 
  남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찾아내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자신 스스로도 자기 자신을 인식할 수 없었던 그루누이는 결국 한 가지 결심을 하게 됩니다. 자신의 존재성을 스스로 만들어 내기로....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 아닌가요? 사람은 누구나 살아가면서 자신의 존재성에 대해 확신을 가지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존재성에 대한 확신이 없는 삶이란 허무할 뿐이기 때문이죠. 즉,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기에 그루누이의 결정은 당연한 일인 것이죠. 위의 시에도 언급되어 있듯이 사람들은 누구나 무엇이 되고 싶은 것이죠.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 그것은 그루누이 역시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는 것이죠. 자신의 존재성을 찾아가는 것이 잘못일까요?

  그루누이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연쇄살인을 저지르게 됩니다.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그의 모습은 차라리 천친스러워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는 살인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지도 못하고 살인이 잘못이라는 인식조차도 없는 그야말로 천진하기까지 한 상태죠.
  로마시대의 카이사르(시저..^^)는 자신에게 칼을 들이대던 포로들까지 모두 석방을 시키곤 했다고 합니다. 간혹 석방된 포로들이 다시 그에게 칼을 겨누기도 했지만 카이사르는 이런 말을 했죠.  “내가 무엇보다도 나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은 내 생각에 충실하게 사는 거요. 따라서 남들도 자기 생각에 충실하게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신념에 따라 행동할 자유가 있습니다. 그루누이의 행동은 자연스런 일이라 할 수 있겠죠. 자신의 존재성이 달린 문제로 그에게는 세상의 종말만큼이나 중요한 문제인 것이죠. 

  그런 그를 우리의 잣대를 가지고 비난한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강아지가 공원에 볼일을 본 이유로 노상방뇨로 경찰서에 데려가는 것과 같은 일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살인을 저지르도록 방치해야 되느냐하면 그건 또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그의 정의가 있듯이 우리에겐 우리의 정의가 있기 때문이죠. 각자 자신의 정의와 신념대로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정의와 신념 하에서는 살인이 용납될 수 없기에 우리는 우리의 법대로 그를 대하면 되겠죠. 

  그가 그의 정의대로 살인을 저지르듯이 우리는 우리의 정의대로 그를 잡을 뿐입니다. 거기에 있어서 누가 옳고 그르다는 판단 자체는 무의미할 것이 되겠죠. 대립되는 두 개의 정의가 만나게 되면 둘 간의 대결이 일어나고 어느 한 쪽에게는 승리가 다른 쪽에는 패배가 있을 뿐 거기에 선과 악의 판단은 우스운 일이겠지요. 

  결국 그루누이는 붙잡히지만 그의 처형이 이루어지는 날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그가 광장에 나타나자마자 광포해져 있던 사람들이 갑자기 무아지경에 빠져 든 것이죠. 그가 지금껏 죽였던 여인들에게서 채취한 향기로 만든 향수를 바르고 나타났기 때문이죠. 
  죽음은 면했지만 순간 그는 절망에 빠집니다. 


  그토록...그토록 노력해서 만든 향수지만 결국 그것은 가면과도 같은 것이었던 것입니다. 
  가장 무도회에서 멋진 가면을 쓴다고 해서 실제로 멋진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듯이 말이죠. 
그리고 가면을 벗으면 그 효과 역시 없어지지 않던가요? 향수 역시 마찬가지였던 것이죠. 
그는 결국 깨달은 것이죠. 
향수로 인해 다른 사람들을 속일 수 있을지라도 자기 자신까지 속일 수는 없음을...

 그리고 향수도 영원할 수는 없는 것이죠. 그는 오히려 향수에 속아 자신을 경배하는 이들에게 일종의 혐오감마저 느끼게 됩니다. 자기 자신의 모습은 제대로 알아보지도 못하고 자신이 쓰고 있는 가면에 속아 자신을 멋진 사람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한 경멸과 비슷한 것이죠. 가면을 쓰고 맺은 사람들과의 관계는 거짓일 수밖에 없듯이 향기를 이용해 얻게 되는 사람들의 사랑 역시 결국에는 거짓일 수밖에 없는 것이죠. 사람들은 화려한 가면에 속아 결국 자신의 본질을 봐 주질 않게 되고, 결국 그루누이는 좌절하게 됩니다. 한없이 외로움을 느끼는 그루누이...

  결국 존재성의 획득에 실패한 그루누이. 
  다른 사람 같았다면 다른 방법을 통해 자신의 존재성을 획득할 수 있었겠지만 향기에 대해 너무나도 천재적인 그루누이는 그 재능으로 인해 냄새 이외에는 세상을 인식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의 천재성으로 인해 오히려 그는 자신의 존재성을 잃게 된 것이죠. 그루누이가 이런 말을 했을 법도 하지 않은가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라고 말이죠. 

  불행히도 이 모든 것에 실패한 그는 다른 자들에게 먹힘으로써 자신의 생에 종지부를 찍습니다. 마지막에 다른 사람들에게 먹히는 죽음은 그에게 썩 어울리는 죽음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 사람에게 먹힘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요?
  우리 모두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인생을 살아야겠네요. 겉모습에 현혹되어 가면을 쓰면서 스스로의 본질을 가리는 것이 아닌 진정 내 자신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평소에도 많은 생각을 통해 나란 누구인지를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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