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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중국보다 우월하였던 한민족
게시물ID : humorbest_7880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한단고기
추천 : 59/7
조회수 : 2757회
댓글수 : 4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05/01/13 12:49:10
원본글 작성시간 : 2005/01/08 14:50:12
중국은 자아 도취적인 중화사상(中華思想)에 사로잡혀 모든 역사적 사실을 자기 중심적으로 기록하면서 유리한 사실은 과장하여 기술하고, 불리한 사실은 왜곡, 은폐하는 등의 작태를 저질러왔다.(이를 춘추필법이라 함) 이러한 행테는 일본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나라에 있어서, 자국 중심적인 역사 서술은 있지만, 우리의 주변국가인 중국과 일본은 그 정도가 아주 심하니, 우리의 역사가 왜곡되고 말살된 상태에서 주변국의 역사서에서 그 근거를 찾아야 하는 우리나라로서는 지극히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의 사료가 적고 미약하기에 중국과 일본의 문헌에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근거 자료가 심하게 왜곡되었으니 어찌 올바른 역사를 전개할 수 있을까? 일본은 임나일본부설을 날조하여 고대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으며, 신공황후가 신라를 속국으로 삼았다고 어처구니 없는 역사를 날조하고 있다. 중국 역시 고구려가 자기네들 지방정권이며, 신라와 고조선의 뿌리가 자기네 초나라라는 어처구니 없는 주장을 하고 있다. 더구나 일제 식민사학을 이은 우리나라 사학의 커다란 문제점이 있고, 그로 인해 우리의 역사는 축소, 왜곡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우리민족은 중국 본토에서 고대국가를 형성하였고, 실질적으로 지나한족(支那漢族:중국)들보다 훨씬 월등한 문화 역량으로 찬란한 고대문명의 뿌리를 이룩하여 중국의 황하문명을 이끌어내었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의 뿌리는 그 후 여러 가지 사정(중원에서 한반도로 이주, 지나 역사서에 의한 우리 민족 활동의 역사가 한족의 역사로 편입, 고구려와 백제 멸망 후 신라와 당나라에 의한 우리의 역사 소멸)으로 왜곡된 역사는 묻혀졌다. 

하지만 아무리 말살하려해도 진실은 언젠가 밝혀지는 법... 이제 중원과 만주벌판 및 일본열도에 묻혀 있는 찬란한 배달민족의 상고사를 찾아나서야 할 때이다. 


1. 중국 본토를 활동영역으로 한 우리 민족 

중국의 건국 역사를 보면, 황제 헌원(黃帝軒轅)이 신농씨의 세력을 꺾고, 치우를 격파한 후에 비로서 중국본토에 중국 漢족의 나라가 정립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원래 중국 본토에는 후에 많은 민족들로 분류되는 여러 집단들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이들 중국 민족은 원래 서역에서 침입한 이민족으로서 그들을 격퇴하고, 중국 본토로 정착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신농씨와 치우는 우리 韓민족의 일단으로 보아야 한다. 중국의 역사서인 사기 오제본기는 중국의 건국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 중 삼황오제 중 하나인 신농씨의 건국 연대는 BC3329년, 헌원의 건국 연대는 BC 2765년으로 추정된다.(서량지의 중국사전사화) 그런데 한단고기 및 규원사화를 보면 단군조선 이전의 배달나라는 BC3898년에 건국된 것으로 되어 있다. 삼황의 하나인 태호 복희는 배달나라 5세 한웅인 태우의 한웅(BC3528~3413)의 열두 아들 중 막내 아들로서, 우사 벼슬을 지내다가 지나에 건너간 것으로 되어 있다. 또한 신농씨는 제8대 안부련 한웅(BC3240~3168)의 명을 받아 지금의 중국 섬서성 기산현 서쪽의 강수에서 군대 일을 감독한 소전의 아들로서, 여와로부터 태호 복희씨의 나라를 물려받아 나라를 다스렸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이는 중국 역사서와 일치하고 있으며, 내용 역시 중국의 역사서와 부합한다. 

그런데 헌원과 싸웠다는 치우(蚩尤)는 누구인가? 
'치우'는 중국 漢나라 때까지 제사가 치러지는 등 그 위력이 엄청났으며, "황제헌원과 치우와의 싸움은 역사상 유례가 없었으리라"고 중국의 역사가들이 극찬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후대에 軍神으로 추앙받던 치우는 어떤 사람일까? 『한단고기』를 보면 치우가 배달나라 14세 자오지 한웅(慈烏支桓雄"BC 2707~2599)이라 기록되어 있다. 치우는 헌원과 73차례나 싸워 모두 승리했다고 전해지는 불패의 제왕이었다. 그런데 사기를 보면 "헌원이 치우를 잡아죽이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쪽 사서에는 "치우비(치우천왕의 수하)가 사로 잡혀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14세 한웅인 치우천왕이 죽은게 아니라 그의 신하 한 사람이 죽은 것인데, 중국 역사서에는 고의로 혼동 처리하고 있다. 또한 중국 사서인 『상서』 「공전」에는 치우가 구려국 군장, 『사기』 「정의」에는 "구려의 군주는 치우라 했다",『사기』 「집해」에는 "蚩尤古天子"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요즘 중국 및 일본 학자들도 '치우는 구이(九夷:중국 본토에 거주한 9개의 동이족)의 군주'라 하여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이처럼 중국 세력과 우리 세력의 다툼을 중국 사서는 오로지 중국내에서의 역사로 편입, 왜곡하였으나 우리 역사서는 漢族과 우리 배달민족을 구분하여 서술하는 등 중국 사서보다 더 소상하고 역사적 사실에 부합되게 서술하고 있다. 

우리 한민족은 황제헌원이 이끄는 漢族과의 투쟁에서, 일단 승리했으나 치우천왕의 붕어 이후, 그들의 잦은 침략으로 결국 중국 본토에 거주하던 여러 집단들과 함께 북쪽 및 동쪽으로 이주하였다. 단군의 조선 건국이 이를 뒷받침한다고 할 수 있다. 당시 배달나라의 도읍지는 청구로, 오늘날 산동성이었는데, 단군왕검이 건국한 조선의 도읍지는 아사달로 오늘의 허얼빈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한족들의 잦은 침략으로 결국 우리 민족이 중국 본토에서 만주와 요서 일대로 이동했다는 것을 뜻한다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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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주의할 점은, 이 때의 민족 개념을 지금의 민족 개념으로 이해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즉 소수민족으로 분류된 시기는 고조선 멸망 후 민족이동이 있은 후로 보는 것이 학계의 공통적인 의견인 바, 고대, 중국 본토 및 동북부에 거주하던 집단 세력들은 우리민족의 세력 아래에 있던 집단으로 사료된다 그러므로 당시 중원대륙에 살던 동이족을 우리 한민족으로 분류해도 별 무리가 없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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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하자면, 중국 본토에 살던 우리 민족이 한족들의 대거 유입으로, 쟁패에서 밀려나 중국 동북부로 이주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중국 본토 전체가 한족들의 것이 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비록 엄청난 격전을 치르고, 한민족이 나라의 근간을 중국 동북부로 옮기게 되었지만, 중국의 동부 및 북부 해안에는 여전히 우리 한민족의 여러 세력이 존재하여 중국 본토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었으며, 중국 동북부와 동부 및 남부 해안 지역은 아직도 우리 동이민족의 영토였다. 이들 지역은 춘추전국시대 서언왕의 서국이 되어, 지나(중국) 36개국으로부터 조공을 받아 동이족의 기상을 떨쳤으며, 훗날 백제의 해외 경영에 절대적 힘의 원천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후 당나라 시대 大齊가 55년간 중원을 호령하게 하는 발판을 마련했으며, 장보고의 해상 제패 및 고려 왕건(고려 왕건의 뿌리는 산동성 일대에 있던 재당신라인이라 함)의 바탕 세력이 되었다. 


2. 황하문명의 주역은 우리 한민족 - 고조선 

황하문명은 漢族이 이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현 중국 학자들은 황하 일대가 동이족의 주요 활동 무대였다고 인정하고 있는 만큼, 황하문명은 우리 동이족, 아니 한민족이 주역이었으며, 설사 황하 문명의 후계자가 지나 한족(중국민족)이었다고 해도, 황하 문명은 우리 한민족의 절대적인 영향을 받아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황하문명의 대표적인 것으로 '한자'의 발명을 꼽는다. 한자가 갑골문자에서 유래한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갑골문자로서 최고(最古)의 것은 황하강 유역에서 발견되었으나, 황하유역에서 발견된 것보다 오래된 갑골문자가 발해만 지방에서 발견되었다(이 발해만 유적을 홍산문명이라 함) 황하유역은 물론이거니와, 발해만 지역 역시 유사 이래 우리의 영역에서 벗어난 적이 없으며, 이는 고구려, 백제와 발해가 멸망할 때까지 우리 민족이 유지해 온 강역이었다. 한자는 원래 중국 민족이 갑골문자에서 스스로 발전시켜 온 것이 아니라, 고조선의 갑골문자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처럼, 한자는 중국민족의 독창적인 문자가 아니라 우리 한민족의 문자가 그 생성의 근간이 되는 것이다. 이는 발해만 지방에서 발굴된 갑골문자를 중국 당국 및 학계에서 쉬쉬하고 발표를 꺼리고 있다는 것만 봐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한단고기를 보면 제3세 단군인 가륵이 '가림토'를 만들어 사용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기록의 신빙성이 요즈음에 활발히 조명되고 있다. 이 가림토에 근거하여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었다는 학설이 제기되고 있다. 그런데 일본은 고대국가 성립시기 이전부터 스스로 창제하여 써왔다고 주장하는 신대문자(神代文字)가 있었는데, 세종대왕이 이 글자를 모방하여 한글을 만들었다는 어처구니 없는 주장을 하고 있다. 하지만 신빙성있는 증거는 하나도 없으며, 오히려 철저히 조작되었다고 보고 있는 실정이다. 일본에 신대문자가 존재하는 이유를 분석한 바에 의하면 두 가지로 설명될 수 있다. 하나는 한글 창제 이전에 신대문자가 존재하였는데, 한글이 이 글자를 모방한 것이라는 일본측의 주장과는 반대로 고조선의 가림토가 전래된 어떤 서적을 보고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했으며, 조선통신사가 일본을 왕래할 무렵 한글의 우수성에 경외를 한 나머지 일본이 이를 모방하여 놓았다가 고대 국가 성립 이전에 신대문자가 존재한 것으로 조작하였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가림토가 존재했는데, 고조선인들이 일본 열도로 건너가 정복하면서 이 글자가 전래되었던 것으로 일본인들이 주장하면서 내어 놓은 유물 및 유적 등이 규슈 등 한반도와 일본 열도 정복 경로 및 한반도와 관련이 깊은 곳에서만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에서 두 가지를 살펴볼 수 있다. 하나는 가림토 문자의 신빙성과 다른 하나는 일본의 역사 왜곡성이다. 

중국의 나라 변천은 당(요), 우(순), 우, 하, 은, 주, 춘추, 전국, 진, 한 등으로 이루어지는데 호아하 문명 및 갑골문자의 주인공은 은나라이다. 그런데 은나라 및 그 이전의 나라들은 지나 한족이 아니라 동이족이 세운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그러나 현재 왜곡된 상태에 있기 때문에 정립이 되어 있지 않으나, 이 동이족은 고조선이 확실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중국의 동부 해안 지방인 산동성 가성현에 무씨사석실이 있는데, 그 곳의 화상석 그림에는 동이족의 신화가 담겨 있다. 놀랍게도 그 내용은 우리의 단군신화와 완벽하게 일치(한웅의 天降)하고 있다. 또한 황하강 하류의 선사 유적들은 중국의 다른 유적들과는 다르고, 오히려 한반도 및 만주 지방의 유적과 같은 성질의 것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황하강 하류 지방에 전해오는 물의 신은 단군의 장인이자. 우리의 고구려 건국신화에 나타나는 것과 같은 '하백'이다. 그런데 우리의 찬란한 상고사가 이렇게 터무니 없이 변하게 된 것은 중국이 고구려 및 그 이전 시대의 역사를 왜곡, 말살하고, 자기들 역사서를 꾸밀 때 우리 민족의 활동사를 중국에 편입하여 왜곡 편찬하였던 까닭이다. 그러나 한심한 것은 후기 신라(통일신라는 적절치 못한 표현) 이후 지속적으로 사대모화사상에 젖어, 공자가 지은 춘추 등에 쓰인 대로 중국 문명을 동양 최대의 문명으로 여겨 이를 숭앙한데 비해, 오히려 중국보다 더 찬란한 문명인 우리 고조선의 역사를 비하시키고 마침내 없애버리는데 급급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춘추시대 이전 중국 문명의 태동기는 그야말로 그들이 나중에 동이족, 산융으로 비하한 우리 고조선의 영향이 없었다면 성립조차 할 수 없었던 역사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중국의 우왕(우임금)이 치수법으로 대치수 사업을 완성했다고 그를 치켜세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사서인 『규원사화』를 보면 "단군조선이 개국한 지 30년만에 대홍수가 일어났다"고 됭 있는데, 단군조선 30년은 BC2303년으로 송화강 유역에 대홍수가 일어났는데, 이는 중국 요나라 70년(BC2301년)과 일맥 상통한다. 순임금으로부터 치수 명령을 받은 우는 그 치수법을 선진 문화국인 단군조선에서 배우기 위해 단군조선의 거수국(제후국)인 도산국의 왕녀에게 장가를 들어, 단군의 아들 부루에게서 치수법을 전수받아(도산회의) 이른바 동양 최고의 대치수 사업을 완성하였다. 『서경』「주서」를 보면 "나 듣건대, 옛적에 곤(鯤)이 홍수로 인하여 곤란을 받고 있을 때 오행의 법을 어겼으므로 제(帝)가 노하여 홍범구주를 주지 아니하니 법도가 어그러졌습니다. 곤이 참을 당하고 우가 그 뒤를 이어받아 천제(天帝)¹가 이제 홍범구주를 주시니 법도가 자연스레 되었습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제(帝) 또는 천제(天帝)는 단군을 일컫는 것이며, 『서경』에 "부루가 우(禹)에게 준 치수의 비법인 금간옥첨이 홍범구주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때 홍범구주는 단군조선의 법전이었음이 분명하다. 한서 외척열전에는 "하나라는 도산국의 은덕으로 일어섰다"고 하여 단군조선의 절대적 영향 아래 중국 민족의 국가가 성립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이는 고조선의 문화가 중국 민족보다 한단계 높은 문화로 그 당시 중국 문화 태동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는 명확한 역사적 근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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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흉노족은 자신들의 군장을 하늘에서 내려준 천자라는 뜻으로 ‘선우’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 ‘선우’라는 말에도 ‘단군’의 뜻이 담겨져 있다. 우선 ‘선’은 ‘단’으로도 읽힌다. ‘단檀은 하늘에 제사올릴 선’과 같으며 선禪과도 통하는 글자이다. 그래서 단군을 선군이라고 호칭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즉 흉노족의 군장인 선우는 단과 같은 의미인 선이 그 어원임을 알 수 있다. 이는 그들의 뿌리가 조선이며, 상국인 조선의 제왕 호칭을 직접 쓰지 못하고 우회적으로 사용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를 통해 단군이 당시 천자, 天帝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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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도 중국 문헌에는 항상 구체적으로 기록하지 않고 『서경』 등에 교묘하게 혹은 산발적으로 혹은 신화처럼 취급하여 표현해 놓았다. 또한 역사학적으로 국가의 태동기가 청동기 시대의 개막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일제시대 내지는 그 이후 얼마까지도 우리 한반도에는 구석기 시대가 존재하지 않았으며, 단지 중국으로부터 전파되었을 뿐이라는 식민지 사관을 그대로 답습하여 왔었다는 것이 우리 역사의 현실이었다. 그러나 여러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유적의 발굴로 그러한 역사관이 뒤집어지자 겨우 기원전 7세기 정도만 인정하여 왔으며 , 그것도 시베리아 계통의 것으로서 그곳에서 유입된 것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의 발굴로 인하여 이러한 모든 것이 새로 정립이 되어야 할 시점에 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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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황하문명이라 불리는 중국 청동기 문화의 추정 연대는 BC2500년 경으로 지금의 요서지역인 요령성 조양시 용성구 역전돈의 '풍하문화'가 가장 오래된 청동기 문화로 간주된다. 이 지역은 소위 한사군이 설치된 지역으로, 그 이전까지 우리 고조선의 영역이었고, 한사군이 잠시 설치되었다가 고구려 등 우리 한민족에게 탈환된 이후 신라의 통일 시기까지 우리 한민족의 영역이었다. 또한 이 지역 외에도 지금의 요동 지방 및 전남 영암군 장천리 주거지 유적의 청동기 추정 연대는 황하문명보다 앞선 BC2600년 경의 것으로, 그 지방의 청동기보다 앞서며, 그 특성 또한 중국과는 전혀 다르다. 그리고 이곳의 유적은 시베리아 계통과도 다른 독특한 것으로 시대가 앞서며 독특한 자생적인 청동기 유적으로 보아 오히려 고조선의 청동기 문화는 스스로 자생하여 중국 및 시베리아 계통에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이것은 다른 여러 유적과 함께 우리 고조선의 문화가 황하문명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다는 입증 사실이 되며, 고조선의 입국 연대인 BC2333년의 실제적 정확성을 입증하여 준다. 

현재까지의 유적 발굴 결과 고조선 고유의 동검인 비파형 동검은 북경 남서 지방인 망돈에까지 분포되어 있다. 또한 이 곳은 후에 고구려의 영역으로, 고구려의 유적이 발견되기도 한다. 이러한 입증은 만주 및 중국 발해만 지방의 유적 발굴 결과에서 나온 것으로, 더 많은 발굴조사가 이루어지면 이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나오리라 예상한다.


왜곡된 역사를 배워서,많은수의 우리민족이 우리가 중국보다 늦게 정착한 민족,중국의 일부였다가

떼어져 나온 민족으로 알고 있습니다..진실을 압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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