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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면당한 여성독립운동가 발굴하는 전 국회의원 김희선
게시물ID : military_7900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겔러거형제
추천 : 5
조회수 : 1081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7/08/06 12:56:10

매년 8월이 되면 가슴이 시린 사람이 많다. 광복절 때문이다. 독립운동가(후손)들은 더욱 그럴 것이다. 그나마 천만 다행인 것이 친일 역사교과서를 만들려는 ‘친일·유신세력’을 촛불의 힘으로 물리친 것이 조금 위안이 된다. 오래전부터 그 친일·유신세력과 맞선 ‘여장부’가 있다. 김희선 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장이다. 그는 국회의원 시절인 2001년 ‘민족정기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을 만들어 친일진상규명법, 친일파재산환수법, 징병·징용자보상법 등 일제 강점하의 진실을 규명하고 아픔을 위무하는 법안을 많이 만들었다. 요즘은 여성독립운동가를 발굴하고 선양하는 사업을 하고 있다.

“2010년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과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등과 함께 있는데, 이 소장이 ‘국민은 여성독립운동가로 유관순밖에 모르는데 이래서 되겠냐’면서 남자현 열사 책을 주더라. 그 책을 읽고 충격을 받았다. 남자현 열사는 예순넷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대한독립을 전 세계에 알린 ‘여성 안중근’이다. 윤희순 의병장은 ‘왜놈 대장 보거라’라는 격문을 써 여성 의병을 독려한 사람이었다. 화가 났다. 바로 기념사업회를 만들겠다고 해 만들었다. 기념사업회의 제일 중요한 것이 교육과 홍보라 생각해 강좌도 열었다.”

■외면당한 여성독립운동가들 발굴
기념사업회는 우선 여성독립운동가를 알리는 강좌를 열기로 했다. 이미 많이 알려진 인물 말고, 잊혀진(의도적으로 외면한) 인물을 추렸다. 그는 “주세죽은 안된다고 해서 내가… 박헌영 부인이라도 무슨 상관이냐, 독립운동한 것이 사실이면 됐다”고 일축했다. 이렇게 해서 모스크바 붉은 별 주세죽, 의열단에서 조선의용대 박차정, 한국 최초의 볼세비키 혁명가 김알렉산드라, 태항산의 백마를 탄 여장군 김명시, 1932년 상하이 홍커우 의거의 숨은 기획자 이화림, 사회주의 여성운동가 허정숙 등 6명의 ‘외면당한’ 여성독립운동가를 발굴해 강의했다.

5월 18일부터 6월 22일까지 매주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 한 강좌는 호응이 컸다. 당초 50~60명을 예상했지만 200석 가까운 강의실이 꽉 찼다. 영화배우 김혜수는 6주에 딱 두 번 빠지고 계속 참가했다. 그는 “강의에 참석해 나를 꼭 안아주며 ‘고맙다’고 하는데 얼마나 신통해…”라고 말했다.

이번 광복절에도 의미 있는 행사를 한다. 작년 가을부터 기획한 것으로, 292명의 항일여성독립운동가 초상화를 제작해 광화문광장에서 서대문형무소 역사관까지 추모대행진하는 것이다. 항일여성독립운동가 중에는 초상화가 없는 이들도 많다. 이런 인물은 최대한 문헌과 유품 등을 통해 최적의 이미지를 창작하기로 했다. 김 회장은 “강주룡의 을밀대 고공농성 장면을 머리카락 그림으로 유명한 황재형 화백이 그렸다”고 말했다.

“정신대대책위는 일제하 여성 피해자 모임이고, 우리는 여성 투쟁가들 모임이다. 둘 다 중요하다. 우리 여성들 결기 있다. 한규설(구한말 대신) 부인이 얼마나 대단한 여자인가. 한규설이 을사늑약 도장 받으러 고종에게 간다. 부인은 남편이 도장을 받지 못하거나 받으면 자결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도 죽으려 독약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남편이 고종 도장을 받고 그냥 온 것이다. 부인은 문을 걸어 잠그고 단식했다. 우리 여성들 그런 결기가 있다. 행주산성에서 이어진 결기다.”

그가 독립운동에 매달리는 이유는 ‘시대정신’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집안 내력 요인도 적지 않다. 그는 광복군 제3지대장을 지낸 김학규 장군의 손녀다. 김학규 장군은 만주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한국독립당·임시정부 등에서 활동하다 조선혁명군 참모장, 광복군 제3지대장을 지냈다. 해방 후 한독당 조직부장으로 김구·이승만 등과 활동했다.

■광복군 제3지대장 김학규 장군의 손녀

<조선일보>를 비롯한 보수언론은 그를 ‘가짜손녀’라고 보도해 논란이 됐다. 족보가 다르다는 것이다. 전후 사정을 간단히 설명하면 이렇다. 김 회장의 증조할머니가 의성 김씨와 결혼했다가 남편이 죽자 자녀를 데리고 안동 김씨로 재가를 하면서 빚어진 일이다. 족보와 호적을 둘러싼 논란은 결국 법정까지 가 2006년 ‘김희선과 김학규는 법적으로 혈연관계가 존재한다’는 판결을 받았다.

-보수언론의 이 같은 보도는 친일 청산작업에 대한 보복 측면이 강했다.
“그렇다. 내가 만든 민족정기를 세우는 의원 모임에서 방응모·김성수·김활란 등 친일파 명단을 발표했다. 명단 발표를 하기로 한 의원은 겁을 먹고 기자회견장에 나오지 않아 결국 내가 발표했다. 그 자리에서 김삼웅 독립기념관장과 조동걸·서중석 교수는 ‘내 생전 이 명단 공개 못하고 죽을 것으로 생각했다’며 감격에 겨워 울었다. 이후 친일진상규명법(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을 만들 때 의원들과 만들면 기밀이 샐까봐 아름다운 가게를 하던 박원순 현 서울시장의 도움을 받아 몰래 만들었다.”

-보수언론은 김 회장의 부친이 만주에서 일제 특무로 활동했다고 보도했다.
“김학규 할아버지는 해방 후 북한 사람들의 남한 정착을 도와주는 정부기관 책임자였고, 아버지는 그 밑에서 일했다. 당시 같이 일하던 사람이 ‘김학규 조카’라고 다 증언했다. 아버지는 김구 선생 심부름으로 북한에 세 번이나 갔다. 일본 경찰을 했으면 김학규 할아버지 밑에서 정부 일을 일을 하고, 김구 선생님 심부름을 했겠나.”

김 회장은 1943년 김학규 장군의 고향인 평남 평원에서 태어났다. 해방 후 할아버지를 따라 서울·경기 등에서 자주 옮겨 살았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김구 암살범 안두희를 한독당에 입당시킨 책임으로 화를 당했다. 김 회장은 “초등학교 때까지 할아버지와 한 집에서 같이 살았다”면서 “그때 할아버지가 ‘오장동 버드나무집에서 안두희 입당시킨 것이 잘못’이라는 말을 자주했다”고 말했다.

대전여상을 중퇴한 그는 한전에 입사했다. 아버지와 같이 독립운동을 하던 박영준 당시 한전 사장이 그를 취직시켜준 것이다. 한전에서 남편(방국진·현 4월혁명회 공동의장)을 만나 결혼, 한전 사내커플 1호가 됐다. 그는 마을 쓰레기 처리문제로 구청하고 싸우기 시작하면서 사회·여성운동을 시작했다. 1974년 서울YWCA 주부클럽중앙회 부회장, 1976년 서울YWCA 소비자모니터 회장이 됐다. 그는 “이화여대 졸업자가 즐비한 YWCA에서 여상 중퇴 출신인 내가 부회장·회장이 된 것은 기적”이라고 말했다.

그는 1978년 크리스찬아카데미 여성사회연구회 부회장으로 강원룡 목사와 한명숙 전 총리 등을 만나 ‘의식화’가 됐다. 그는 “강원룡·한명숙을 만나 정치·여성·역사인식을 깨우쳤다”면서 “그들을 만나 ‘여성의 인간화 운동을 위해 평생 살겠다’는 맹세를 지금껏 지키며 산다”고 말했다. 여성의전화 대표(1984), 한국여성단체연합 부회장(1987)을 하다 1994년 DJ(김대중 전 대통령)의 권유로 김근태·추미애 등과 정치권에 입문했다. 그는 서울 동대문, 추 변호사는 서울 광진에서 각각 출마했지만 그는 낙선하고 추 변호사만 당선됐다. 결국 그는 2000년 제16대 총선에서 재기했다. 당시 여성 지역구 의원은 여야 통틀어 그와 추미애·박근혜 의원 3명뿐이었다.

지난 5월 항일여성독립운동가 발굴 강좌 포스터(사진 오른쪽)와 이번 8월 14~15일 항일여성독립운동가 초상화 추모대행진 행사 포스터. / 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 제공

지난 5월 항일여성독립운동가 발굴 강좌 포스터(사진 오른쪽)와 이번 8월 14~15일 항일여성독립운동가 초상화 추모대행진 행사 포스터. / 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 제공

■국회 들어가자 친일 청산작업에 매진
그는 국회에 들어가자 민족정기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을 만들어 친일 청산작업에 매진했다. 2005년 강도가 더 센 친일재산환수법(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환수에 관한 특별법) 통과에 나섰다. 그런데 김기춘 국회 법사위원장(후에 박근혜 정권의 청와대 비서실장)이 가로막고 있었다. 그는 정무위원장으로 국회 상임위원장 중 운영위원장 다음 두 번째 선임위원장이었다.

“그 ‘자식’(연배도 비슷해 김 이사장 표현 그대로 적는다)이 법사위에서 붙잡고 안 넘기는 거야. 내가 만나러 지 방에 갔더니 김기춘이 소파에 반은 누운 채 날 쳐다보는 거야. 그래도 동료의원이 왔으면 자세를 고쳐 앉는 게 예의 아냐. 눈으로 올려보며 아는 척도 안해. 내가 지 앞에 가서 똑같이 드러누우면서 ‘이렇게 앉으니 편하기는 하네’ 했지. 그랬더니 그 자식이 벌떡 일어나더라구. 치사한 자식….”

그는 이런 친일 청산과정에서 여당은 물론 보수언론으로부터 극심한 견제와 음해를 받았다. 그는 18대 총선에서 낙선한 후 이명박 정권에서 ‘정치적 보복’까지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래도 그는 친일·유신 청산작업을 계속했다. 함세웅 신부는 “2014년 10월 초부터 격주로 이해동·박재승·정동익·김삼웅·임헌영·김희선 등 10여명이 현 시국을 타개할 방안을 논의해, 국민정치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다”고 증언했다.


-왜 국민정치운동을 생각했는가.
“나는 언제나 시대정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친일을 미화하고 역사를 거꾸로 쓰는 박근혜 정권을 때려부수는 것(조금 과격한 표현이지만 역시 그대로 옮긴다)이라고 생각해 새벽모임을 했다. 옛날처럼 재야운동이 뭐가 필요하냐는 사람도 있었지만 우리가 울타리라도 돼주자는 생각이었다. 한겨울에 모임에 참석하느라 이해동 목사는 미끄러져 부상당하기도 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 강만길·백기완·김중배·이만열·이해동·이이화·함세웅·신경림·박재승 등의 원로 민주화 인사들이 참여한 ‘민주국민행동’이다. 이 모임은 이번 촛불혁명의 소중한 씨앗이 됐다.
“촛불에 참여하려고 일부러 협회 깃발까지 만들었다. 한 명이 됐든 두 명이 됐든 끌고 나갔다.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 광화문에 사람이 꽉 차 떼밀려가는데 한 여성이 ‘내 장갑’이라고 소리쳤다. 장갑을 떨어뜨린 것이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들이 길을 만들어 장갑을 줍게 하더라. 감동적이었다. 그게 촛불이다.”

그는 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의 목표를 역사교과서에 ‘항일여성편’을 넣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2019년 3·1혁명, 임시정부 100주년 때 항일여성상을 만들어 세우는 것이라고 했다. 미국 뉴욕 월가에 황소를 노려보고 있는 여성노동자상과 비슷한 아이디어로 전국적 모금을 통해 세울 계획이다.

김 회장은 “역사를 모르는 민족이 무슨 미래가 있나”라면서 “역사는 현재이고 현재를 모르는 삶은 자기 삶이 아니다”라고 단언했다. 그는 역사와 시대정신이라는 단어를 자주 썼다. 그는 “지금까지 시대정신은 친일 청산과 여성독립운동가 발굴이지만, 앞으로 시대정신은 진정한 자주독립인 분단 극복 즉 통일”이라고 말했다.



출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08061103001&code=940100#csidx570e1f4d1c51600aac020c462cad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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