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이글은 무게와 어울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흥미 위주로 짧고 강렬하지도 않거니와 비문이 없는 까닭에 읽기 지루 하실 수도 있습니다.
몇 해 전 방배동에서 생긴 일 이라는 글을 쓰며 '이거 나중에 장편으로 제대로 써야겠다' 고 생각했었는데, 요즘 다른 습작들을 쓰는 틈틈히 시간이 날 때 마다 머리도 실힐겸 조금씩 써 나가고 있습니다.
그 중 서두에 관한 부분만 올려 봅니다.
인터넷 어느 곳에도 올릴 생각이 없었는데 작금에 조금 왁자지껄해진 짱공도 좀 식힐겸 올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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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누구나 살면서 한 두 번 쯤은 상식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을 겪지 않을까?
논리적으로 결코 설명되지 못 할 일들 말이다. 너무 현실과 어긋나서 ‘어차피 말을 해도 믿지도 않을텐데 뭐’ 라고 자포자기 하게 만드는 이야기들. 실제 그런 경험들은 스스로 빛을 잃고 사그라지는 경우가 많다. 분명 선명하게 각인된 기억인데, 너무 비상식적인 탓에 시간이 흐를수록 어딘가 잘못 보관된 기억이라고 스스로 단정한다.
예를 들자면,
나는 초등학교 2학년 여름 방학 때 포항에 위치한 구룡포로 3박4일로 피서를 갔다. 피서라는 단어를 써도 될지 모르겠다. 어떻게, 누가, 그곳으로 데려다 줬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삼촌’ 네 집이니 즐겁게 놀다 오라고 말을 들었다. 내 또래 아이들이 많았고 우리는 금세 친해졌다. 바다에서 놀아 살이 온통 까맣게 타있던 아이들은 살결이 하얀 나를 보고 샌님이라고 놀렸다. 아이들은 정박해 있는 배에 올라가 다이빙을 한다던지, 수영을 해서 누가 제일 멀리까지 다녀 오는지를 경쟁했다. 지금 기준으로 생각하자니 위험하고 아찔하지만, 확실히 이천년대 아이들 위험 개념과, 80년대 아이들 위험 개념은 달랐다. 아이들은 위험하다고 말하는 나를 두고 낄낄 거렸고, 내 말을 비웃기라도 하듯 더 높은 뱃전에 올라가 손 쉽게 다이빙을 했다. 수영을 못 한다는 나의 말에 삼촌이라는 사람은 자신의 등에 나를 태우고 바다를 헤엄쳐 갔다. 낮에는 바다에서 놀았고, 밤이 찾아오면 묵고 있던 삼촌집 평상에 모여 앉아 수박을 먹으며 귀신 이야기를 했다. 80년대 시골집이 그렇듯 삼촌집 화장실도 마당에 위치했다. 저녁에 먹었던 수박 때문에 새벽에 화장실에 가고 싶어 일어나게 되면 무서움에 곤욕을 치뤘다.
기억하는 사건은 그곳에 내려가서 이틀째 되는 날 벌어졌다.
아이들과 어울려 해수욕장에 몰려갔던 나는, 바다에 들어가지 못 하고 모래사장에 앉아 아이들이 바다에서 뛰어 노는 모습을 바라만 봤다. 어쩐 일인지 하늘은 쨍쨍 맑은데 굉장한 너울이 쳐대던 날이었다. 나는 집채만한 너울 모습에 압도되어 바다 속으로 뛰어 들지 못 했다. 그 때 백사장 뒤편으로 있던 웅덩이 쪽으로 내 시선이 향했다.
그곳은 밀물 때 바다에서 밀려 왔던 물들이 썰물 때 빠져나가지 못 하고 갇혀지게 만들어진 곳이다. 웅덩이라고 표현하기엔 너무 크고 깊었기에, 차라리 저수지라는 표현이 맞을 듯 하다. 처음 구룡포에 도착한 날 삼촌이 그렇게 말했다. 바다에 들어가는 건 상관 없는데 저 웅덩이 쪽 물로는 절대 들어가지 말라고. 왜요? 라고 묻자 삼촌은 당황했다. 그저 위험하니 들어가지 말라고 했다. 삼촌 뿐만 아니라 같이 어울리게 된 아이들도 그런 말을 했다.
“저는 절대 들어가지 마래이, 희한하게 관광 온 사람들이 바다에서 멀쩡하게 놀다가 저서 빠져 죽더라.”
또래 친구 중 대장격인 아이가 처음 해준 말이었다. 하지만 수영을 못 하던 내 눈에는 그곳이 더 안전해 보였다. 일단 그곳은 파도 없이 잔잔했고 물은 따스했다.
아이들이 노는 것만 하릴없이 바라보던 나는 가만 일어나 웅덩이 쪽으로 향했다. 발목께 오는 곳까지 조심조심 들어가자 오후내 햇살을 받아 따스해진 물의 감촉이 심상하게 찌르르 올라왔다. 발을 통해 느껴지는 물은 바닷물 보다 밀도가 높게 느껴졌다. 주위에서 단단히 들은 주의 사항 때문에 나는 더 들어가지 않고 그 자리에 가만 서 있었다. 그렇게 햇살을 받으며 따스한 물의 기운을 받으며 서 있던 것 까지.
딱,
그 부분까지 기억난다.
정신을 차리자 나는 물속에 있었다.
당황하여 위를 바라보자 머리 한참 위쪽으로 수면이 보이고 수면 너머로 태양이 물속으로 햇볕을 내려 보내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물을 벌컥벌컥 무의식적으로 삼켜 버렸다. 밋밋하고 느끼한 물 맛을 아직 생생히 기억한다. 그리고 그 때 분명 물속 내 옆에 나 말고 누군가 한 명이 더 존재했다. 아마 여자일 것, 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제대로 보지도 못 했으면서 왜 여자라고 단정지었을까? 생각 하지만 확실히 여자라는 느낌이 들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동네 아이들이 나를 빙 둘러싸서 내려다보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아이들 중 한 명이 어쭙잖은 인공 호흡을 실시한다고 내 가슴을 펑펑 치고 있었는데, 그 덕분인지 정신이 돌아왔다.
아이들은 바다에서 놀다 내가 사라진 걸 발견하고 불안한 예감에 백사장으로 나왔다고 한다. 그 때 한 아이가 저수지 한가운데 둥둥 떠 있는 내 모자를 발견했고, 여러 명이 물에 뛰어 들어 나를 건져 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모자가 둥둥 떠있던 그 아래, 일자로 서 있었다고 했다.
우리는 그 이야기를 어른들에게 비밀로 했다. 시골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나와 같이 놀되 안전하게 놀아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했었다. 이 일이 알려 진다면 녀석들이나 나나 심하게 잔소리를 듣게 될 것이 뻔 할 일이었기에, 우리끼리만 공유했다. 녀석들은 내게 어쩌다 그렇게 깊은곳까지 들어 갔냐며 타박을 했지만, 그건 내가 대답할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분명 발목 부분께에서만 있었기에, 그 깊은 곳까지 언제 들어 갔는지 기억이 없다.
나는 이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다. 어린 내 머리로 생각해도 논리적으로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 내가 겪었던 이야기이다. 실제 있었던 아이들과 대화나, 알싸하게 맞으며 뛰어다니던 바닷바람, 백사장에서 주어 올려 낄낄대던 불가사리 감촉들, 지금도 정확히 형상해 낼 수 있는 아이들 뱃전 다이빙 같은 것들이, 그저 기시감 같은 것으로 치부 하기에는 너무 생생하다. 하지만 이후, 구룡포 여행에 대한 이야기는 일절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이유는 알수 없지만, 구룡포에서 체험들은 입밖에 내어서 안될 것 같은 사위 스러운 기분을 항상 받고 있었다.
아주 오랜 세월이 흘러 성인 되었을 때 나는 어머니께 한 번 말을 꺼낸 적이 있다. 어머니와 둘이 저녁을 먹던 중 어느 티비 프로그램에서 구룡포 이야기가 나왔다.
“어머니, 그 왜, 나 초등학교 이학년 여름 방학 때 구룡포에 갔었잖아요?”
“뭐, 구룡포?”
“응 구룡포, 기억 안 나세요? 무슨 삼촌네 집이라고.”
“무슨 소리야? 네가 구룡포에 삼촌이 어디 있어?”
“응? 그럼 그 때 내가 며칠 놀다 오던 그 집은 누구 집이에요?”
“얘가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초등학교 2학년 때면 너 한참 어릴 땐데 엄마가 얼마나 걱정이 많은 사람인데 너 혼자 그런 데를 왜 보내?”
어머니는 정색을 하고 말씀 하셨다. 나는 입을 닫고 말았다. 왠지 말을 하면 안 되는 일을 발설해 버리고만 같은 찜찜한 기분이 한동안 따라 다녔다.
돌이며보면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 할 부분들이 너무 많다. 삼촌이라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였을까? 분명 나는 삼촌 등에 올라타 바다를 지난 기억이 남아 있다. 나를 태웠던 삼촌의 매끈하고 넓은 등판 감촉까지. 그런데 사람이 거북이처럼 초등학교 2학년 아이를 등에 태우고 자유자재로 수영을 할수 있을까? 그 때 이후 부모님은 단 한 번도 삼촌이라는 사람 이야기를 꺼낸적이 없으셨다. 또 나는 깊은 물에 빠졌는데 어떻게 일자로 서 있을 수 있었을까? 사람이 물에 빠지면 부력으로 떠오르지 않는가? 설령 물속에 있다 해도 무거운 추를 달고 있지 않는 이상 그렇게 꽂꽂히 서 있는 건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 때 물속 내 옆에 같이 있던 그 여자 아이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하는.
도저히 상식적으로 설명 할 수 없는 일들 때문에 스스로도 사실인지 그저 단순한 내 착각인지 경계선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다.
또 다른 기억은, 그 즈음 우리 아파트 5층에 살고 계셨던 할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다.
당시 우리 아파트 5층에 신혼 부부가 아이 두 명과 시아버지를 모시고 살았다. 어머니와 그 집 새댁이 친했던 관계로 새댁 아주머니는 네 살 두 살 아이들을 데리고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오셨다. 모시고 계신 시아버지는 초등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 해 한글도 깨치지 못 했다고 하셨다. 나이가 드셔서 정신도 오락가락 하신다는 말을 들었던 기억으로 봐선 아마도 당시 치매에 걸려있지 않으셨나 유추한다.
어느 날 새댁 아주머니가 사색이 되어 우리 집에 뛰어 내려 오셨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무언가 귓속말을 주고 받은 후 쏜살같이 같이 5층을 오르 내렸다. 어머니는 내게 왜 5층을 그리 자주 왔다갔다 하셨는지 말씀해 주시지 않았다. 그 날밤 나는 거실 소파에서 잠 들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나누는 이야기에 잠이 깼다.
“아니 글쎄, 그 한글도 모르는 양반이 한문으로 된 법구경을 앉아서 줄줄 읽고 있더라니까.”
“그래? 한글은 몰라도 한문은 아시는 거 아냐? 원래 시골 분이시라메?”
“아냐, 농사만 지어서 글 자체를 모르신데, 글쎄 내가 새댁하고 올라가니까 새댁하고 나한테 막 소리를 지르는 거야. 이번 생에도 스님 몸을 받았어야 하는데 농부 몸을 받아서 다음 생에도 성불하긴 틀렸다고 소리소리를 지르지 뭐야.”
“그래? 전생에 스님이었단 말이야?”
“그렇지 않겠어? 한문으로 된 법구경은 웬만큼 한문을 아는 배운 사람들도 읽기 힘들어. 글쎄 나하고 새댁을 앞에 앉으라고 큰소리를 치더니 그걸 줄줄 읽고 해석까지 해주더라구. 어이구야, 소름 끼쳐서 혼났네.”
그 때 나는 소파에서 잠든 척 하며 그 이야기를 들었다. 이후 이야기가 기억나지 않는 걸 보면 나는 또 다시 잠든 모양이다. 그 뒤 할아버지가 어떻게 되셨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어린 시절 그런 얘기를 다른 아주머니가 와서 할 때면 어머니는 나를 밖으로 내보거나 듣지 못 하게 하셨다. 절에 오래 다니셨던 어머니는, 사람이 영계 이야기를 들어봐야 좋을 것 하나도 없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이런저런 자잘한 에피소드를 이야기 하자면 한 없이 길게 늘어진다. 말하자면 누구나 살면서 그렇게 논리적으로 결코 이해가 되지 않는 이야기 하나 둘 정도는 가지고 있다.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어릴 적 들었던 학교괴담이나 군대괴담 같은 이야기가 아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해 놓고 보니 너무 오래 전 이야기가 아닐까 걱정부터 해 본다. 이미 십여년이 훨씬 더 넘은 기억들이다 보니, 그 때 그 감정들, 벌어졌던 현상들에 대해 얼마나 자세히 복기해 낼 수 있을지도 미지수이다.
아무래도 중년에 훌쩍 다다른 지금 혈기왕성하게 젊은 시절 이야기를 하자니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 할 행동들이나 사고도 많이 눈에 띄인다. 그래도 최대한 가감 없이 내가 겪었던 대로 이야기 하고자 한다. 진실이란 세상 어떤 것보다 강한 힘이니까 말이다. 담담히 내가 겪었던 이야기 들을 서술하듯 풀어내 이야기 하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그러니까 이건, 내 이야기이다. 실제 겪었던 이야기이고, 어쩌면 지금 현재에도 연결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2장
이천 일 년도라고 하면 ‘번쩍’, 바로 떠 올릴 수 있는 사고가 무엇이 있을까?
많지 않다.
당신 기억력이 나쁜 것이 아니다. 실제 그 해, 이천 일 년도에 각별하게 기억해 낼만한 사건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온 국민의 아드레날린을 대량 방출시킨 월드컵이 개최된 해는 이천 이 년이었고, 한국인 최초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것은 한해전인 이천 년이었다.
이천 일 년에 현대 그룹 정주영 회장이 사망해 전국민을 충격에 빠트렸다. ‘아무리 돈이 많은 왕회장도 죽음을 피해 갈 수는 없구나’, ‘돈으로도 살수 없는 것이 있다니’. 단순한 진리에 전 국민이 화들짝 놀랐다. 방콕발 아시아나 3423편을 삐융 쏘아 올리는 것을 필두로 인천공항이 개장했다. 인천공항이 개장하자 사람들은 김포공항을 빠르게 잊었다. ‘아니, 저렇게 코딱지 만한 공항에서 해외를 나갔었단 말이야?’ 다들 그렇게 입을 모았다. 지붕만 봐도 가슴을 설레게 하던 출국 관문은 화려한 시대를 접고 국내선이나 가까운 일본 선을 위주로 하는 낡고 쇠락한 공항으로 전락했다. 세대는 그렇게 바뀌어 간다.
한 발 더 나아간다면 가난한 나라 중국이 어느새 WTO에 가입하고 올림픽 유치에 성공해 강대국으로 가기 위한 위대한 여정의 첫발을 디뎠다. 사람들은 중국의 저력을 두려워 했다. 이 사람이 중국 가서 떼돈을 벌었다 더라, 저 사람이 중국가서 떼돈을 벌었다더라. 소문은 무성한데 실제로 돈을 벌었다는 사람을 보지는 못 했다. 세계 자본을 무섭게 빨아 들이는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메이드 인 차이나 제품을 싸구려라 무시했고 더럽고 천박한 중국인 이라며 손가락질 했다. 무시를 하면서도 마음 한편으로 찝찝한 두려움이 남는데 그 정체를 파악하기 힘들었다. 어쨋든 돈을 벌려면 중국으로 가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남자들은 돈을 벌려면 중국으로 가야 한다고 떠들어 댄후, 술과 여자로 돈을 쓰러 중국으로 떠났다. ‘양주 맘대로 먹고 여자 두 명 불러서 밤새 놀았는데 십만원이면 떡을 치더라’. 호사가들은 남자들의 음험한 환타지를 부추겼다. 끼리끼리 모여 십만원으로 떡을 치기 위해 중국행 비행기를 탔다.
뭐, 그렇다.
하나 더 보태자면 기아 타이거즈가 해태 타이거즈를 인수했다는 것? 왕조의 몰락이라고 스포츠 신문은 연신 떠들어 댔으나 푸흡. 왕조의 역사는 자본주의 앞에서 허무하게 무너진다.
이렇게 말하자니 평화로웠다고 생각이 든다. 사건사고가 유독 많은 나라 관점에서 봤을때 따분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다음 해 이천 이년도에 축구로 온 나라가 들썩였지만 어찌됐건 그건 다음 해에 일어날 일이다. 그 때만 해도 그저 다음해 월드컵이 개최 되려니, 대표님이 4강에 안착하리라고 꿈도 꾸지 않던 시기 였으니까. 개최국이니 망신은 당하지 않겠지,
막연히 생각했다.
하지만 속을 들여다 보면 조용하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기억할만한 사고만 없었을 뿐, 사회는 벤쳐 혹은 닷컴 기업에 대한 거품으로 기이하게 뒤틀려져 갔다. 벤쳐나 닷컴 기업을 창립하면 기획서 한 장당 10억을 펀딩 받을 수 있다는 부풀려진 소문이 공공연히 돌았다. 모기 날개만큼 조그마한 능력이라도 가진 사람들은 너도나도 회사를 박차고 나가 벤쳐를 차렸다. 테헤란로에 나가면 이십대 젊은 친구들이 벤츠와 비머를 끌고 다닌다거나, 그 친구들이 룸싸롱에서 하룻밤 수천만원씩 펑펑 쓴다는 풍문이 직장인들 가슴을 뛰게했다. 실제 나는 그 때 자그마한 인터넷 커뮤니티를 하나 운영하고 있었는데 오십억을 끌어 올테니 그럴듯하게 한 방 날리자는 제안을 받기도 했다.
“야, 이정도 규모면 오십억 펀딩은 식은 죽 먹기지. 치고 빠지면 돼. 한 번 날리자. 내가 알아서 다 할게.”
졸업 후 모은행 M&A팀에 입사했던 친구 녀석은 그렇게 말했다. 녀석은 이미 억대 연봉을 받고 있었다. 주식으로 벌써 몇십억 정도 세이브를 해놨다고 큰소리 쳤다. 서른이 채 되기전, 녀석은 이미 벤츠를 타고 또래 친구보다 저만치 앞서 나갔다. 나는 제안을 거절했다. 사회를 보는 안목이나 정의감 때문이 아니다. 내가 가진 커뮤니티는 순수하게 젊은 친구들 모임을 주선하는 사이트였는데, 도무지 무슨 수로 수익을 내?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이 세상에 가득했다. 그렇게 기회를 날려 버렸다. 어쩌면 나도 어린 나이에 많은 돈을 거머쥘 수 있었을 지도? 세월이 훌쩍 지나 돌이켜 보면 부지식간에 감당할지 못 할 돈이 손에 쥐어 졌다면 내 삶은 얼마나 망가 졌을까, 생각해 본다.
세월은 그렇게 제정신이 아니었다. 너도나도 일확 천금을 꿈꿨고 헛된 꿈으로 일그러진 현실은 카드로 돌려 막았다. 신청만 하면 신용카드가 날라오던 시기이기도 했다. 너나 할 것 없이 예닐곱장 카드는 기본 이었고 매월 말일이 되면 이 카드에서 저 카드로, 또 저 카드는 이 카드로 돌려막기 바쁜 시기였다.
IMF 후폭풍이 시작되기도 했다. 아침에 출근해보니 옆자리 동료 책상이 복도로 나와 있더라는 괴담이 흉흉했다. 문제는 괴담이 아니라 현실이었다는 것이다. 어느 날 출근하니 내 옆자리 계장 책상이 깨끗이 하루밤새 비워졌다. 계장은 어제 저녁 퇴사를 통보 받았고 욱하는 마음으로 밤에 사무실로 들어와 짐을 빼갔다. 어제만 해도 정직원 이었던 사내 운전기사들이 아침에 계약직, 용역직으로 통보 받았다. 회사 전체 인원의 오분의 일 정도가 하루아침에 비 정규직으로 내몰렸다. 우리는 항거하지 못 했다. 내가 아닌 걸 다행으로 생각했고 다음에 내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언론은 IMF 원인이 국민들 과소비 탓이라고 각성을 요구했고, 국민들은 진정한 언론 역할에 대해 각성했다. 해외 여행 한 번 나가보지 못 하고 열심히 일했던 직장인들은 졸지에 나라 경제를 파탄시킨 주범이 됐고, 정작 IMF 주범인 정부와 기업은 칼자루를 손에 쥐고 무섭게 휘둘러 댔다.
모든 게 헝클어져 버린 것 같은 세상이었다. 새천년이 밝아 온다며 희망차게 보신각 종을 두들겼던 영상을 보고 있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찌된 영문이지 희망찬 밀리니엄 세기는 혼돈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런 시기였다.
말하자면, 중대한 패러다임 전환이 다가 왔는데 미처 깨닫지 못 하던 시기였다. 그래서 이천 일년도에 대한 기억은 명확하지 않다. 그저 브라운 아이즈의 벌써일년을 흥얼거리며 변화하는 세상을 무심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리고 구월십일일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911 테러가 벌써 그렇게 오래된 사건이라는게 실감 나지 않는다. 테러는 영화보다 더 영화 같았다. 아니 그 때만 해도 영화에서 누군가 여객기를 납치해 고층 빌딩에 자살 테러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면 말도 안 된다며 피식 웃었을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사건이 일어났다. 비행기는 곧바로 세계 국제 무역 센터로 날아 들었다.
모든 사람들이 세상에 이럴수가, 라고 한탄했다. 우리는 삼삼오오 둘러 앉아 미국 본토가 공격당하는 장면을 며칠내내 바라봤다.
정말 기묘한 해였다고 하자.
그 말 말고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크게 일어난 사건사고는 기억나지 않는데 어쩐지 큰 일이 벌어져 버린 그런 해였다. 현실과 꿈, 망상과 공상의 구분이 모호했다.
내가 할 이야기는 그 해 겨울 벌어진 이야기이다.
출처 | 짱공유 hyundc 님(http://fun.jjang0u.com/articles/view?db=106&no=1427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