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시선이 사진 한 장에 멈췄다.
그녀가 항상 행운의 징표로 지니고 있는 작은 사진엔
그녀와 꼭 닮은 어린 아이가 환한 웃음을 머금은 모습이 담겨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았다. 그 어떤 위로도 해주지 못하는 나에겐 오직
그것만이 조금이라도 그녀를 위하는 일이라 생각했다.
밝은 달빛처럼 빛나는 그녀의 눈에 서서히 물방울이 번지는 것을 보고서야 그녀 옆으로 다가설 수 있었다.
“미안해, 못난 모습을 보여 버렸네.”
“아무 말 말고 눈물이나 닦으십시오. 못난 얼굴 더 망가트려지기 전에 말입니다.”
“고마워. 역시 머글은 친절한 것 같아.”
건네준 위장색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내 속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제대로 좀 닦으십시오. 엘라인이 엄마 얼굴도 못 알아보게 할 작정이십니까?”
울음기 때문에 갈라진 목소리를 감추고자 화를 내며 목청을 높였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이미 내 눈에서도 눈물이 방울져 떨어져 내리고 있었으니까.
그런 내 모습을 조용히 쳐다보던 그녀가 나직이 나를 불렀다.
“후우, 머글. 부탁이 하나 있는데 들어줄 거지?”
“싫습니다.”
“단호하네. 단호박인줄….”
“그, 그게 무슨! 지금 상황에서 그런 허접한 저질개그가 나오십니까?”
“내가 아무리 싫어도 무슨 부탁인지는 들어봐야 하는 것 아니야? 머글 그렇게 안 봤는데 말이야.”
“듣기도 싫고 그 어떤 것도 들어드릴 수 없습니다. 저에게 맡기지 말고 소대장님이 직접 하십시오.”
“에이. 그건 너무한다. 지금 내 상태를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제가 책임지고 야전 막사까지 데려다 놓을 겁니다. 그곳이라면 실력 있는 군의관이 많으니 이깟 총탄 몇 개 박힌 것 쯤 금방 회복될 수 있을…, 소대장님! 소대장님!”
나는 갑자기 옆으로 풀썩 쓰러진 그녀를 보고 황급히 일어나 몸을 흔들었다.
다행이 정신을 잃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얼굴은 고통으로 얼룩져 있었다.
“부탁해… 아무래도 한계인가 보네. 다음에 쓰러지면 아마 일어나지 못할 것 같아.”
격하게 숨을 몰아쉬면서도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떨리는 손으로 내 전투조끼의 주머니에 자신이 항상 바라보던 사진을 넣어주고서야 만족했다는 듯 환하게 웃어보였다.
“헤, 엘라인의 사진은 정말 신통하다니까. 아무것도 모르던 철없는 나도 지금까지 살아남은걸 보면 알 수 있어. 머글은… 벤슬럼 최고의 전투영웅 이니까 분명히 무사히 집에 갈 수 있을 거야.”
말을 마친 그녀의 안색은 창백하게 질려있었다. 퍼렇게 변한 입술은 계속해서 경련을 일으켰고 탐스럽던 금발은 땀에 젖어 축 늘어졌다.
“소대장님…, 아니 아르비오네! 그만 말해! 더 이상 말하다간 쓰러지겠어!”
“훗, 이제야 이름을 불러주네. 그런데 살짝 기분 나쁜걸? 이건 확실히 하극상이잖아?
뭐, 부탁하는 입장이니 봐줄 수밖에 없는 건가. 후웃.“
그녀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내가 날뛰면 날뛸수록 오히려 그녀만 더욱 힘들게 하는 일이 되어버리는걸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입을 다물자 그녀, 내가 따르던 벤슬럼 대대의 소대장이자 동시에 어렸을 때부터 날 끔찍이도 아껴주던 방앗간 집 둘째 누나. 아르비오네는 생긋 웃어주었다. 고통으로 인해 일그러진 웃음이었지만 내게는 성모 마리아의 미소보다 더욱 환하게 빛나 보였다.
“비록 수많은 대원이 산화했지만 결과적으로 우리의 임무는 성공적이야. 이 데이터 칩만 가지고 야전 사령부가 있는 곳까지 도착만 할 수 있다면 머글, 넌 곧바로 전역할 수 있을 테지?
내가 바라는 건 단 하나뿐이야.
내 딸…, 엘라인. 그 아이를 네가 맡아줬으면 해.
결혼도 안한 너한테 너무너무 미안한데… 막상 엘라인이 혼자 남겨진다고 생각하니까 너무 두려워…,
사과농장을 하던 프란키 영감님에게 엘라인을 맡겨두었는데 아무래도 잘 지내지 못하는 것 같아. 2소대에 있던 마크렌 알지? 그 녀석이 알려줬어. 프란키영감이 도박에 손을 댓다가 집이고 농장이고 전부 날려먹고 떠돌이 생활을 한다고 말이야.
엘라인은 착하고 얌전한 아이라 특별히 귀찮게 하지는 않을 거야.
먹는것도 가리지 않고, 아, 버섯 종류는 알레르기가 있어서 그것만은 조심해야 돼.
뭐하는 거야. 버섯조심. 수첩에 적어 둬. 그리고 또…….”
아르비오네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엘라인 생각을 하는지 살짝 웃는 모습 그대로 그녀는 말이 없는 인형이 되었다. 그 어떤 것 보다 고귀한 인형이.
……
“…아빠! 또 다른 생각해?!”
“응, 뭐라고 했니 엘라인?”
“어휴! 오늘 루크가 집에 인사 온다니까 얼른 가서 옷부터 입으시라구요!
아무리 집이라도 다 큰 딸래미 앞에서 맨날 트렁크팬티만 걸치고 있지 말구!”
“알았다, 알았어. 거참 녀석. 어찌 그리고 제 엄마랑 성격이 똑 닮았는지.”
나는 회상을 멈추고 방으로 쫓겨나듯 들어갔다. 방 안에 작은 금발의 천사가 환하게 웃음 짓는 사진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이제 저 사진을 내릴 때가 온 것 같아. 아르비오네.엘라인의 행운도 이제 루크라는 도둑놈에게 빼앗겨 버렸지 뭐야. 하하, 그래도 그 도둑놈 옆에서 행복한 미소를 짓는 엘라인의 모습은 정말 예전의 당신을 쏙 빼닮았는걸. 당신이 있었다 해도 빼앗겼을 테니 나에게 너무 화를 내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는 액자 속에 끼워진 사진을 꺼내들었다.
아르비오네를 화장했던 루켄강 상류에 떠내려 보낼 참이다. 항상 엘라인을 그리워하던 그녀에게 이 작은 사진 한 장이 닿을 수 있도록…, 나는 그렇게 한참을 기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