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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유 과거 : 산문] 순간,
게시물ID : readers_792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알수없다,
추천 : 4
조회수 : 396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3/06/28 21:08:45
 
 
 
순간, 
 
 
 
 
                                                                                                                                                                                                                                                  알 수 없다,
 
   그녀의 시선이 사진 한 장에 멈췄다. 옆에 서서 말없이 바라보고 있자니 그녀는 마치 꿈을 꾸는 듯했다. 아니, 먼 태곳적 기억을 더듬어 올라가는 눈빛이었다. 몽환과 기억이 겹친 실타래 같은 눈빛.
   한 때 사진작가가 꿈이었다던 그녀는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그 꿈을 버렸다고 했다.
   그냥. 그냥 접었어. 뭐랄까, 알몸의 실체를 알고, 그 안에 들어 있는 비릿한 비밀을 알았다고나 해야 할까. 그래서 접었어. , 접었다기보다는 버렸다는 게 더 맞을 거야. 그런 꿈을 꿨다는 일 자체가 기분 더러웠거든.”
 
   일 년 전이었다. 사진을 찍고 있던 내 등 뒤로 다가와 한참이나 말없이 서 있던 그녀를 처음 만났던 때는. 처음에는 별다른 느낌이나 생각이 없었다. 흔한 일 중에 하나였을 뿐이니까. 사람들은 사진을 찍을 때 구도를 어떻게 잡는지 보고 싶어 하기도 했고, 어떻게 찍는지를 궁금해 하거나 다른 사람들보다 전문적으로 장비를 구비했다 싶으면 막연한 동경으로 인한 호기심으로 주변에 머물다 사라지곤 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그 구도보다 우측역광으로 해서 광각렌즈를 쓰면 더 좋겠네요. 저기 가방 안에 렌즈도 있는데.”
   나는 뒤를 돌아봤다. 하얀 원피스에 넓고 코발트블루 색으로 물든 허리띠로 허리를 강조했고, 약간 긴 단발머리를 아무렇게나 바람 따라 흩날리도록 내버려둔 채 웃고 있었다. ‘이가 참 하얗다라는 생각이 처음 내 머릿속에 든 그녀에 대한 감상이었다. 한쪽 무릎을 세운 자세로 사진을 찍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향해 돌아섰다.
   사진에 대해 좀 아시나봐요?”
   아뇨, 그저 어깨너머로 좀 배워본 적은 있어요. 누가 비슷한 구도로 찍으려 할 때 했던 말을 들어서 참견했는데 죄송해요.”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우리는 공원을 걸으며 어떤 구도에서 어떤 사진을 찍으면 좋을지에 대해 의견도 나누고 사진은 순간을 영원처럼 남기는 행위라는 생각에 동의하며 노을이 지는 순간을 기다리다 지금까지 이렇게 만나게 됐다.
   우리가 연인이라고 하거나 그저 친구일 뿐이라 말하기는 애매했다. 가끔은 서로의 밤을 지피기도 했고, 더 자주 키스도 했으니 말이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사이일 수도 있지만 이것도 저것도 되는 사이라고 생각했다. 구속 없이, 친구처럼 지내는 연인 사이는 내가 이상향으로 꼽는 관계였고, 아이들도 아닌데 사귄 지 며칠 따위를 세는 일도 그저 어린 날의 치기쯤으로만 생각해서 그랬는지도 몰랐다.
   사진을 버렸다는 말을 들은 이후로 그녀와 함께 전시회에 가는 일은 삼갔다. 불편해 하는 그녀의 표정도, 그녀의 내면을 헤아리느라 사진을 제대로 감상하지 못한 채 시간과 돈만 소비하는 꼴이 되는 일도 싫었기 때문이었다. 혼자 다녀오면 별 문제 없었다. 그녀 역시 그런 나를 이해해줬다. 서로가 싫어하는 일을 서로에게 강요하지만 않으면 될 뿐이다.
   한 달 전이었다. 그녀가 사진 전시회가 열린다며 표 두 장을 내게 건넸을 때는. 무슨 일인가 싶었다. 결코 그녀가 먼저 사진 전시회를 가자고 할 일은 없으리라 생각했던 내게는 꽤 신선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겁이 나기도 하는 사건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날 그 자리에서 마시던 커피 향과 낮게 퍼지던 월광소나타, 그녀의 뜻모를 미소, 문득 창문을 통해 싸하게 전달되던 바람의 농도 등이 지금 이 순간에도 그대로 재현할 수 있을 만큼 또렷하게 각인돼 있다.
   프랑스에서 돌아오면서 전시회를 연다는데 나, 사진 배웠던 적 있잖아. 그때 알던 사람이야. 내가 좀 많이 좋아했었는데 한 번 가보고 싶어. 그 사람 눈으로 어떤 사진을 어떻게 찍었는지 보고 싶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하고 그래. 같이 가줄 거지?”
   싱긋 웃는 그녀의 웃음에서는 봄날의 어지러우면서도 나른한 아지랑이를 닮은 웃음이 피어올랐다. ‘저 웃음 때문에 내가 맥을 못 추지라는 생각을 하며 나 역시 웃어보였다.
 
   이봐, 이 사진, 꽤 구도가 좋은데. 사진 한 장에 어떤 스토리가 담긴 듯도 하고 말이야.”
   이런 말을 하며 옆을 돌아봤을 때 그녀는 내 옆에 없었다. 잠시 당황하다 주변을 둘러보니 조금 전 !’하는 탄성을 깊고도 짧게 내뱉었던 사진 앞에 여전히 서 있는 그녀를 발견할 수 있었다.
   꿈을 꾸는 듯하기도 하고 먼 기억을 거슬러 오르는 듯한 그 눈을 바라보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그녀가 낯선 사람처럼 느껴졌다. 한번도 내 사진이나 어떤 사진 앞에서도 지금과 같은 눈빛을 한 적이 없었다. 처음 보는 그녀의 모습에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그녀의 모습에 당황했다기보다 그녀가 내가 없는 공간에 홀로 서 있다는 느낌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몇 번을 불러도 그녀는 돌아보지도 않은 채 하나의 피사체가 되어 서 있을 뿐이었다.
사진을 다시 봤다. 딱히 시선을 끌만한 구도는 아니었다. 하늘 아래 갈대숲 사이로 커다란 모자를 쓰고 지나가는 어떤 여자의 사진이었다. 그저 느낌일 뿐이지만 여자는 나체이리라는 느낌을 받았다. 어쩌면 흔하게 볼 수도 있는 그런 사진인데 그녀는 어떤 생각과 느낌을 받았기에 저 자리에 붙박혀 움직일 줄 모르는 것일까. 소외된 느낌. 함께 있는데도 외롭다는 느낌을 그때 처음 느꼈다.
   탄탈로스가 생각났다. 신들을 속인 죄로 물이 넘치고 먹을 게 넘쳐흘러도 마실 수 없고 먹을 수도 없는 벌을 받아야 했던 탄탈로스. 전시회 관람표를 내민 이후로 그녀는 잠자리는 물론, 키스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조금 얼떨떨했지만 여자들의 흔한 변덕일지도 모른다는 안일한 생각이 불안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요즘이었다.
   갑자기 조용하던 전시실 내부가 요란스러운 인사와 박수소리로 가득 찼다. 그녀도 그제야 잠에서 깬 듯 뒤를 돌아봤다. 작가라고 팸플릿에 소개된 사람이 입구에서부터 인사를 받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처음 보는 사람이었는데 나를 아는가 싶었다. 내 쪽을 보더니 아무 거리낌 없이 그리 크지도 않은 전시실을 가로질러 내 앞에, 아니 그녀 앞에 섰다.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할 때였다.
   내가 한 약속 잊지 않았지?”
   그녀의 두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소식 들었어. 내가 약속 어기고 더 체류하기로 한 뒤부터는 사진 버렸다며? 미안해. 욕심이 생겨서 약속 못 지켰어. 내가 귀국해서 첫 전시회 할 때 네 사진을 가장 중앙에 걸어놓겠다고, 그게 내 청혼이라고 한 말도 기억하지?”
   그와 그녀가 짧게 나눈 대화를 떠올려보자니 나는 일 년 가까이 바보 같은 짓을 한 게 아닌가 싶었다.
   조용히 밖으로 나와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후우- 길게 내뿜는 담배연기가 어제처럼 흩어졌다. 내 기억도 어느 즈음에선가 흐트러지고 사라지겠지. 시간의 향취만 남긴 채.
   집으로 돌아가며 기억의 서랍을 정리하듯 그녀와 함께 찍었던 사진들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을 편의점에 들러 술을 살까 하다 그냥 나와 버렸다. 그 술을 마실 때마다 다시 그녀가 떠오를지도 모르니까.
   이별은 순간이었다. 사진도 순간을 포착한다. 쉽게 잊지 못할 순간의 사진을 가슴에 찍힌 채 카메라를 장롱 깊숙이 넣었다. 여름인데도 문득 추위를 느껴 몸을 둥글게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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