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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을 하는 이유
게시물ID : phil_793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레고맨
추천 : 7
조회수 : 461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4/01/11 21:22:07
어릴 때부터 철학을 좋아했다.
그냥 생각하는 게 즐거웠다.
하지만 대학교를 가고 밥벌이를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그렇게 살기 위해 철학과 상관없는 과에 들어갔다.
그래도 천성은 어쩔 수 없는지 어영부영 대학 다니면서 조금씩 철학책을 읽었다.(감히 철학을 공부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대학원에 들어가고부터는 본격적으로 철학책을 읽었다.(그래도 감히 철학을 공부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사람들 만나 인맥을 넓혀야 할 시간에도 철학책만 읽으며 지냈다.(여전히 감히 철학을 공부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주변에서는 전공이 우선이지 뭐하는 짓이냐는 질타도 많았다.
그래도 철학이 좋아서 홀로 철학책을 읽으며 지냈다.
어느정도 배움도 있었기에 우쭐하기도 했다.
그럭저럭 남들 안하는 거 한다는 명분으로 강의도 다니면서 버텨나갔다.
 
이제 아는 거라곤 철학밖에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물론 설익은 감처럼, 선무당처럼 안다는 게 문제긴 하다.
그래서인가? 문득 돌아보니 더 이상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다.
실력은 변변찮고 말만 많은 놈이 되어 있었던 게다.
 
내탓이다. 책만 보았지, 사람을 보지 않았고 세상을 보지 않았다.
그저 낭중지추라는 말만 믿고 언젠가는 알아주는 사람이 되겠거니 했다.
하지만 알아주는 사람이 되려면 남들이 나를 알아주게끔 만들어야 했다.
그것이 세련되든 끈질기든 비루하든...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남들에게 나를 알려야 했다.
남들에게 알릴만한 나를 만들어야 했다.
그런데 지금껏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철학책만 붙잡고 있었다.
덕분인지 얼마 안되는 기회마저 다 놓쳐버렸다. 아니 다 차버렸다.
잡을 생각도 능력도 키우질 않았던 게다.
언젠가는 좋은 날이 올지도 모르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막막하다.
 
외롭다.
외로워서 철학책을 집어든다.
마치 어린왕자의 술꾼처럼 난 철학책을 집어든다.
철학책을 읽으면서 얻게 된 온갖 고독과 회의와 슬픔 속에서...
그 고독과 회의와 슬픔을 잊기 위해 철학책을 집어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행인건 후회는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변변한 친구 하나 없어도, 선배는 물론이고 후배조차 마치 쓰레기 쳐다보듯 쳐다봐도,
내일 당장 구걸할지라도, 죽음을 생각할지라도, 필부보다 머저리처럼 행동하고 내 삶에 당당할 수조차 없다 할지라도,
내 삶을 후회하지는 않게 되었고, 나에게 주어진 삶을 감사하게 되었다.
삶이 괴롭지만, 두렵지는 않게 되었다.
 
이만하면 철학... 할만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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