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대에서 맞이하는 첫 번째 가을의 일이었다.
은혜로운 가을.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찌는 계절. 산의 청솔모와 다람쥐, 기타 많은 금수들이 먹이를 축적해가며 겨울을 대비하는 때.
과연 하늘은 공평무사하여서, 우리같은 초록괴물들에게도 많은 것을 선사하였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잣이었다.
순수 도시촌놈인 나에게 잣은 작고 윤기나는 상아색 고소한 씨앗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곳에서의 잣은 달랐다.
정비관님께서 던져준 대왕솔방울을 보고 당황하던 나에게, 짬찌 티내냐며 솔방울에서 구운 땅콩같은 덩어리들을 우수수 털어내던 선임의 모습은
나에게는 가히 세기적 충격이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까지 잣 다섯 덩어리를 다 털어놓으라던 지시는 수용한도 이상의 충격을 전해주었다.
그날 나는 반합 뚜껑선까지 잣을 털어 채우며 잣같다 잣같다 흥얼거렸다. 잣을 까고 나면 손에는 끈적거리는 진액이 때와 함께 굳어 지저분해졌다.
다행히 나에게 잣같은 것을 까는 재능이 있었는지, 잣같게도, 나는 어느 새 잣까기의 명인이 되어있었다.
선임들은 내가 까놓은 잣을 열심히 깨물어 그 안에서 노란 알맹이를 빼먹으며 즐거워했다.
어릴 때 이야기에서 들은 호두까기 인형은 없지만 우리에겐 잣까기 인형이 있다면서.
그해 가을 내내, 나는 막사 복도를 지날 때 마다, 야, 잣까. 잣까줘. 잣까기야 잣까줘. 잣까네? 잣까고있었구나. 잣까기 어디갔니?
따위의 소리를 들으며 2기 잣까기병을 빠른시일 내에 구하고 말거라는 다짐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