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내가 국회의원으로서 국민의 안전보다 선주의 이익을 우선시한 선박 수명연장 및 관련 규제 완화 법안에 서명했다면 그래서 서명 후 삼 년도 안 되어 해양 사고가 두 배로 치솟았다면 그것을 나의 책임이라고 실감할 수 있었을까? 만약 내가 여당의 당대표로서 국가위기관리시스템(NSC) 사무처 권한 축소 내용을 담은 개정법에 서명했다면 그래서 NSC를 역할을 모두 행안부로 넘기고 위기관리센터 요원들을 하루아침에 좌천시켜 중앙공무원교육원에서 교육을 받는 신세로 만들었다면 세월호 참사 앞에서 이 수많은 죽음이 나의 정치적 책임이라는 사실을 실감을 할 수 있었을까?
눈을 감고 마음 깊이 바라본다. 나는 펜으로 서명을 했을 뿐 직접 물속에 빠트린 것이 아니라고 저항한다. 분단의식에 의존해 김대중 정부 때도 노무현 정부 때도 인재는 있었다고 합리화도 시도해 본다. 내 잘못이 아니라 무능한 관료들이 문제라고 책임전가도 해 본다. 선장이야말로 살인마라고 외쳐본다. 어쩌면 책임을 실감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을 떴다.
사망자/실종자 명단이 눈에 들어온다. 박xx..., 김xx.... 이름을 하나 하나 천천히 읽어나가다가 각각의 이름에 담긴 생명의 무게에 채 스무 번째 이름에도 이르지 못하고 목이 메인다. 이름 옆에 2학년 3반이라는 표기가 창이 되어 마음을 찌른다. 그제야 확실히 깨닫는다. 어떠한 변명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내가 바로 사람들의 안전과 생명을 돈으로 바꾼 죽음의 연금술사였다는 것을. 인간의 죽음마저 세 치의 혀로 합리화하고 책임전가 되는 곳, 반성의 자리에 변명이, 생명의 자리에 이념이, 공감의 자리에 반쪽짜리 사고구조가 자리한 곳보다 천박한 곳은 없다는 것을.
국회의원에서 지금의 나로 돌아와 다시 눈을 감는다. '나는 그 국회의원이 아니다', '나는 그 국회의원을 뽑지 않았다'는 생각부터 든다.
또다시 합리화의 연쇄작용이 작동한다. 생명의 존엄이 논리로 상쇄되는 현상은 다른 곳이 아닌 내 마음에서 일어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