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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에서 마이너한 국가 전량(前凉)에 대해 알아봅시다 - 2
게시물ID : history_1574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캬캬오톡
추천 : 11
조회수 : 1397회
댓글수 : 9개
등록시간 : 2014/05/13 16:45:04
 
전량의 태조 장궤에 대해 본격적으로 다루기에 앞서 먼저 당시 진(晉)의 시대적 배경상황을 짚고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전량이란 정권이 수립된 것도 당시 시대적 배경 상황과 깊은 연관이 있는데다 전량이 세워진 (다만 전량이란 나라가 수립된 때를 의미성에서 언제로 보아야 하는지를 두고 학자들 간에 의견이 분분한지라 딱히 언제라고 단정짓기엔 애매하지만 여기서는 장궤 대에 건국되었다는 주장을 따르기로 하겠습니다) 이후 진(晉) 왕조에 대한 태도를 다룸에 있어서도 먼저 앞서 배경을 봐야 이해하시기에 수월하실 것 같네요.
 
 
- 당시 진(晉) 왕조의 상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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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故 고우영 화백의 <삼국지>
 
<삼국지>로 다들 익히 아시는 중국의 삼국시대를 통일한 나라는 위촉오 중 어느 한 국가가 아닌 위(魏)를 계승한 진(晉)이었습니다. 통일의 대업을 이룩한 무제(武帝) 사마염(司馬炎)의 죽음을 시작으로 진 왕조는 급격하게 국가 막장가도를 달리기 시작합니다. 원인은 황족들간의 권력다툼과 지도층의 무능함과 부정부패로, 특히 황족들간의 권력다툼은 흔히 '팔왕의 난' 이라 하여 진 왕조를 파멸의 길로 몰아넣게 되는 결정적인 원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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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왕의 난 당시 팔왕의 위치도.
 
 
흔히 사극에 보면 궁중에서 벌어지는 권력암투가 나옵니다. 그래도 주로 물밑에서 이루어져 저들끼리의 싸움으로 그치고 마는 것인데 이 '팔왕의 난' 은 대륙의 기상이기라도 한 것인지 스케일 부터가 달랐습니다. 각지의 왕(황족을 말합니다)들은 하나의 나라에 필적하는 규모의 세력을 거느리고 수천 수만에 이르는 병력을 동원하여 말그대로 전쟁을 벌였던지라 이 난리로 나라가 개판이 되는 것은 물론이요, 제 살 깎아먹기 식으로 나라의 국력마저 쇠퇴하게 만드는 사태를 초래했던 것이지요.
 
이 전란으로 황족들은 물론이고 졸지에 조정의 신료들까지 니편 내편 나뉘어 어느 황족을 지지하냐에 따라 생사가 결정되고 또한 연루되어 숙청당하고 죽어나갔으니 이 팔왕의 난 당시 진 왕조는 그야말로 개판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 장궤에 대하여 -
 
 
명색이 한 왕조의 태조인데 변변한 초상화 하나 없으니 안습
 
 
장궤가 두각을 드러내는 때는 바로 위에서 언급한 팔왕의 난 시기였습니다. 삼국시대의 위(魏)나라가 끝물을 보이던 서기 255년 생으로, 진 왕조가 한창 막장테크를 밟던 때인 서기 290년대 무렵에는 한창 장년의 나이로, 이미 조정에서 고위직들을 역임하며 정치적 입지를 굳히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장궤의 정치 경력 중 그가 역임한 관직들 중에 눈여겨볼 부분은 바로 '독옹이주군사(督雍二州軍事)' 라고 하는 직위로, (옹주(雍州), 양주(凉州)라는 두개의 주(州)의 군사를 지휘하고 감독하는 관직입니다) 훗날 전량의 베이스이자 나중에 장궤가 자청하여 지방관으로서 부임하게 되는 지방이 바로 양주(凉州)였다는 점에서 이때 장궤가 역임한 이 관직은 상당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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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진(晉) 왕조 지도입니다. 저 멀리 서북지역에 '양(凉)' 이라고 표기된 지역이 보이실텐데요, 저기가 양주(凉州)입니다. 그리고 그 밑에 바로 옹주(雍州)가 있고요.
 
 
물론 장궤가 이 동네(안정군 출신)출신의 사람이어서 그곳에 대해 빠삭하게 알고 있다라는 성장배경도 있지만 무엇보다 이때의 경험으로 나중에는 양주자사(凉州刺史 : 양주를 다스리는 지방관)의 자리에 부임할 것을 자청하기도 했고 (물론 그 이면에는 다른 속셈이 있었겠지만. 이건 차차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훗날에는 그곳에서의 패업 (사실 여기서도 패업이란 표현을 쓰기가 애매한데 이것역시 나중에 따로 다루겠습니다)을 이루기 위한 기반이 되는 곳이 되었다는 점에서 장궤와 양주(凉州)는 깊은 연관이 있었습니다.
 
 
이렇듯 장궤가 정치적 커리어를 쌓아가던 무렵, 서기 299년에 바로 이곳 양주(凉州)에서 한차례 반란이 일어납니다. 반란의 주체는 당시 양주나 옹주에 거주하던 저족(氐族)이라 하는 이민족으로, 지도자는 제만년(齊萬年)이라고 하는 저족의 추장이었습니다. 진(晉) 왕조의 지배에 저항하여 일어난 이 사건은 단순 변방에서 일어난 오랑캐 소요라고 보기엔 반란은 규모상에서도 걷잡을 수 없이 커져 나중에는 강족(羌族)이나 선비족과 같은 다른 이민족들의 지지와 호응을 얻어 반란의 무대인 옹주와 양주를 신나게 유린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달리말하자면 이때보다 이전에 일어났던 선비족 독발수기능의 난과 더불어 일개 오랑캐에게 두들겨 맞을 만큼 쇠퇴한 당시 진 왕조의 혼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고 하겠네요.
 
여담이지만 이들 저족이니 강족이니 선비족이니 하는 족속들은 모두 나중에 5호 16국 시대를 장식하는 다섯 오랑캐들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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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만년의 반란
 

저들끼리의 내란으로 정신머리라고는 온데간데 없던 진의 조정에서도 제국의 서쪽 변경이 오랑캐들에게 피박살나고 있는 것을 마냥 좌시하고만 있지는 않았습니다. 황족인 양왕(梁王) 사마융(司馬肜 : 다들 아시는 사마의의 아들입니다)을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으로 임명하여 이를 진압하게 했는데요, 여기서 장궤는 사마융의 정서대장군 막부의 부장으로 종군하여 다시한번 양주와 연을 맺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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