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긴 글이긴 하지만
야구에 대한 사랑이 있으신 분, 특히 롯데 팬이시라면 한 번쯤 읽어보면 좋은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네이트 기사에 퍼옴]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부산에는 가을이 찾아왔다. 21세기 들어 두 번째로 찾아온, 귀하디귀한 가을이다. 사람들은 들떴다. 기대감이 풍선처럼 부풀었다. 이 가을이 오래도록 계속되기를, 영원히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지구온난화로 날로 짧아져 가는 한국의 가을날과는 반대로, 롯데의 가을은 계속해서 길어지기를 부산 팬들은 간절히 고대했다.
하지만 롯데의 가을은 너무도 짧았다. 시작했나 싶더니 금세 끝나는 연휴처럼, 단 5일 만에 끝나버렸다. 나흘 만에 끝난 작년보다 하루가 더 늘어나긴 했지만 허무함의 정도는 비슷했다. 오랜만에 찾아온 가을의 맛과 향을 미처 음미할 새도 없이, 롯데의 가을은 그렇게 순식간에 끝났다. 롯데 팬들은 안방에서 두산의 플레이오프 진출을 지켜봐야 했다. 로이스터 감독의 한복 코스프레와 함께.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탓일까. 준플레이오프 탈락 이후 일부 롯데 팬들 사이에서 ‘로이스터 감독 경질론’이 나온다. 이미 시즌 초부터 계속되어온 논쟁이 준PO 탈락을 계기로 재점화되는 모양새다.
언론도 이를 거든다. 큰 경기에서의 투수 교체나 선수기용을 비판하는 기사부터, 패배 직후 로이스터 감독이 보여준 ‘쿨한’ 행동을 놓고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기사가 줄을 잇는다. 분위기만 봐선 로이스터 감독이 2년 연속 팀을 4강으로 이끈 명장이 아니라, 팀을 꼴찌로 인도한 ‘역적’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도깨비팀에서 강팀으로 변신한 롯데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게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롯데는 강팀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다는 점 말이다. 통산 성적만 봐도 그렇다. 1530승 1782패 84무 승률 4할 6푼 2리. 프랜차이즈로 따지면 쌍방울 레이더스(455승 655패 30무 승률 .410)에 이어 뒤에서 두 번째다. 쌍방울과 승률 차가 꽤 나는 편이기는 하지만, 그걸로 딱히 위안이 될 것 같지는 않다.
포스트시즌도 롯데는 28년 동안 단 8차례 진출에 그쳤다. 같은 기간 무려 23번이나 포스트시즌에 나간 삼성은 말할 것도 없고, 올해까지 14차례 가을야구 맛을 본 두산과 비교해도 초라하기 그지없는 성적이다. 한국 프로야구에서 한 구단의 포스트시즌 진출 확률이 무려 50%(8팀 중 4팀 진출)에 달한다는 점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런 롯데의 기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충분히 알 만하다.
21세기 들어서는 더하다. 58888577. 마치 보험회사 ARS 번호처럼 보이지만, 실은 2000년 이후 롯데가 기록한 시즌 순위를 나열한 것이다. 특히 2001년부터 2004년까지는 4년 연속 최하위를 기록하며, 삼미 슈퍼스타즈나 쌍방울도 감히 가 닿지 못한 전인미답의 경지에 도달한 바 있다. 롯데는 전형적인 ‘약체팀’이었다. 이는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랬던 롯데가 지난해와 올해 2년 연속으로 포스트시즌 진출에 성공했다. 구단 역사상 세 번째로 있는 ‘사건’이다. 이제는 아무도 롯데를 ‘약체’라고 부르지 않는다. 롯데 팬이라고 하면 “힘내세요”란 말을 듣던 시절도 지나갔다. 엘롯기 동맹은 제일 먼저 탈퇴한지 오래다.
해태나 삼성에만 붙는 줄 알았던 ‘강팀’이란 표현도 이제 더는 어색하지 않다. 서울 팀이 받는 것보다 더 많은 스포트라이트가 롯데를 향해 집중되고 있다. 이 모두가 하나같이 로이스터 감독 부임 이후 생겨난 변화다. 그런데 이런 감독을 경질해야 한단다. 구단 내부 일부 세력과 몇몇 코치와 지방방송 해설가와 팬들이 딱딱 입을 맞춰 감독 교체를 합창한다. 어찌나 호흡이 잘 맞는지, 북한 어린이 합창단이 따로 없다.
포스트시즌을 정규시즌처럼 운영하는 진짜 이유
감독을 자르자는 쪽의 논리는 단순하다. 가을야구 참가에 성공했으니 이제는 팀을 우승시킬 수 있는 감독이 필요하단다. 이건 마치 예전 삼성이 팀을 준우승으로 이끈 감독을 해고하면서 내세운 논리와 비슷하다. 롯데가 4강 진출을 당연하게 여길 정도로 대단한 팀이었다니, 난생 처음 듣는 이야기다. “가을에 야구해 보는 게 소원”이라던 작년 초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다. 아무리 인간이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는 동물이라지만, 이분들은 지나치게 인간적이라서 탈이다.
포스트시즌을 마치 정규시즌 하듯 운영하는 로이스터 감독을 이해할 수 없다는 목소리도 높다. 왜 선발투수를 초반에 일찍 내리지 않는지, 왜 조정훈을 3일 휴식 후 내보내지 않았는지 여기저기서 비판한다.
답은 간단하다. 만일 롯데가 한국시리즈에 직행했다면, 로이스터 감독도 초반부터 투수를 총동원하는 물량공세를 펼쳤을 게다. 아니, 최소 플레이오프에만 직행했더라도 이번 준PO와는 다른 모습을 보였을 게 분명하다. 많아봐야 7경기만 치르면 그만이니까. 선발이 불안하다 싶으면 5회 이전에도 빠르게 교체하고, 있는 투수를 몽땅 쏟아 붓는 총력전을 벌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준PO부터 시작되는 롯데의 일정상, 한국시리즈까지 간다고 가정하면 최소 10경기에서 최대 17경기를 치러야만 한다. 이는 정규시즌으로 치면 2~30경기에 해당되는 엄청난 체력-전력 소모를 요구하는 강행군이다. 자연히 선수의 혹사가 뒤따를 수밖에 없다. 총력전을 펼치면 당장 1승을 하는 데는 유리할지 몰라도, 포스트시즌 끝까지 버티기가 어려워진다.
가까운 예가 있다. 기적적인 우승을 따낸 1992년 롯데의 경우를 보면 된다. 이 해 롯데는 준PO부터 시작해서 PO와 한국시리즈를 거치며 포스트시즌에서 총 12경기를 치렀다. 매 경기가 있는 전력을 모두 짜낸 총력전. 결과는 우승이었지만, 이듬해부터 롯데는 2년 연속 6위에 그치며 후유증을 톡톡히 겪었다. 이 과정에서 롯데는 고졸 신인 염종석을 ‘잃었다’.
1995년에도 플레이오프부터 시작해 13경기를 치른 끝에 준우승을 따냈지만, 이후 3년간의 암흑기(5위-8위-8위)가 뒤따랐다. 이때는 김경환이 희생양으로 나섰다. 선수 생명을 담보로 만들어낸, 유통기한 짧은 영광. 로이스터 감독 이전까지의 롯데는, 그런 식이었다.
하지만 로이스터 감독은 다르다. 그는 롯데가 어쩌다 한번 우승하고 이듬해부터는 하위권으로 추락하는 ‘도깨비팀’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 그보다는 오랫동안 경쟁력을 유지하며 지속적으로 4강에 들 수 있는, 진정한 의미의 ‘강팀’이 되기를 원한다. 그러다 보면 우승도 자연스레 따라오게 마련이다. 이게 바로 로이스터 감독의 지론이다.
로이스터 감독의 새로운 도전
상당수의 팬이나 기자들이 로이스터 감독의 포스트시즌 운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다. 4위 팀에게도 1위 팀과 맞붙을 기회가 주어지는, 기형적인 한국 포스트시즌 제도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4위에 어떻게든 턱걸이해서, 죽을힘을 다해, 가진 전력을 전부 쏟아 붓는 식의 야구에 익숙해져 있다 보니, 포스트시즌인데도 정규시즌처럼 여유롭게 운영하는 로이스터 방식이 황당하게 느껴질지 모른다.
분명한 건 로이스터 감독이 아무 생각이나 대책이 없어서 그와 같은 식의 운영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는 4위 팀이 한국시리즈까지 올라가려면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러야 하는지를 안다. 그에 더해, 그렇게 올라간 팀이 우승까지 할 확률이 얼마나 희박한지에 대해서도 너무나 잘 안다. 그렇게 만들어내는 우승이 선수들에게 얼마나 큰 희생을 강요하는지, 팀 전력에 얼마나 큰 손해를 끼치는지 역시 로이스터 감독은 알고 있다.
그래서 로이스터 감독은 전력상으로나 일정상으로나 무리가 따르는 ‘4위에서 우승까지’ 노리는 식의 운영 대신, 정규시즌과 같은 방식으로 전력 소모와 선수들의 심리적 부담을 최소화하는 운영을 선택한 것이다. 이건 따지고 보면 결코 비난할 성격의 일이 아니다. 오히려 현재의 포스트시즌 제도 아래서 3-4위 팀이 택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자, 칭찬받아 마땅한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로이스터 감독 혼자만 그렇게 한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긴 하지만.
사실 로이스터 감독이 팀을 맡기 전까지, 롯데의 팀 전력은 8개 구단 중에서도 최악의 수준에 속했다. 전문가들은 선수들의 기본기나 야구 센스가 가장 뒤처지는 팀으로 롯데를 꼽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외국인 감독이 팀을 맡더라도 경쟁력 있는 팀을 만들려면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그런 면에서 지난해 롯데가 시즌 3위를 차지한 건, 누구도 예상치 못한 기적에 가까웠다.
비결이 무엇일까. 로이스터 감독은 선수들의 단점을 고치는 대신 장점을 극대화하는 방향을 선택했다.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는 기본기 훈련은 장기 과제로 남겨두고, 우선은 선수 각자의 재능을 실전에서 최대한으로 발휘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하는데 치중했다. ‘두려움 없는 야구’를 모토로 선수들이 실패에 대한 두려움 없이, 자신감 넘치는 플레이를 하도록 독려했다. 무엇보다 패배에 익숙해져 있던 롯데 선수단의 마음가짐과 ‘문화’를 바꾸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롯데는 호쾌하고 선 굵은 야구를 펼치는 매력적인 팀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비록 기본기나 세밀한 야구에서는 약점이 분명하게 드러나지만, 그 대신 빠른 공을 뿌리는 강력한 선발진과 발 빠르고 힘 있는 타자들이 주축을 이룬 강력한 타선이 조화를 이룬 ‘강팀’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로이스터 감독은 불과 2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이와 같은 변화를 이뤄냈다. 롯데의 문화를 바꾸는데 성공했다. 이것만으로도 그의 업적은 높이 평가받을 가치가 충분하다.
사실 올 시즌까지는 로이스터 감독이 자신의 야구를 100% 펼쳤다고 하기 어렵다. 지난해는 어디까지나 한국 야구와 롯데라는 팀에 대해 파악하기 위한 시간이었다. 선수들 이름 외우기도 급급했다. 올해는 에이스와 주전 포수 겸 중심타자가 빠진 상태에서 힘겨운 시즌을 보내야만 했다. 로이스터만의 야구를 정착시키기에, 2년이란 시간은 너무도 촉박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로이스터 야구가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하는 건, 그래서다.
지금 로이스터 감독에게 가장 필요한 건, 충분한 시간이다. 선수단의 마음가짐과 문화를 바꾸는 게 우선이고, 기술적인 변화를 꾀하는 건 그 다음이다. 지난 2년 동안 로이스터 감독은 롯데 선수들의 문화를 바꾸는 데 성공했다. 이제부터는 기술, 그 중에서도 기본기를 다지는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것이다. 이건 효과가 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다. 당연히 시간적 여유가 필요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로이스터 감독에게는 구단과 팬들의 전폭적인 신뢰가 필요하다. 지난 2년처럼 코칭스태프에 믿을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고립무원의 상태로 로이스터 감독을 방치해서는 안 될 일이다. 그간 프런트나 코칭스태프 중에 딴 마음을 품었던 사람이 있다면, 앞으로는 감독을 흔들기 보다는 팀을 위해 단결하고 협력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또한 지방방송 해설자의 사적인 발언이나 일부 팬의 왜곡된 여론이 구단 운영을 좌지우지하는 해괴한 일도 더는 없어야 할 것이다. 로이스터 감독의 반대자들이라도 지난 2년 동안 롯데가 나아온 방향이 큰 틀에서 ‘옳았다’는 것을 이제는 솔직하게 인정해야 할 때다. 무책임하게 로이스터 감독을 흔드는 것은, 그 이전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얘기밖에는 되지 않는다. 로이스터 이전의 롯데라봐야 ‘도깨비팀’ 아니면 최약체일 뿐이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들은 로이스터 감독을 마치 최하위팀 책임자처럼 취급하고 있다. 몰상식한 일이다.
로이스터 감독과 롯데의 야구는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로이스터 감독 혼자만의 힘으로 되는 일은 아니다. 선수들과 코칭스태프, 구단 관계자는 물론 팬들의 신뢰와 지원이 필요하다. 부디 롯데와 팬들이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얻은 게 있기를 바랄 뿐이다.
http://yagoora.textcube.com 야구 칼럼리스트 배지헌씨가 쓰신 글이네요.
개인적으로 기아광팬이지만 롯데 싫어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팀을 2년 연속 플레이오프에 보낸 감독에 대한
팬들의 시선과 주변 언론은 너무 차갑기만 하네요.
개인적으로 길 긴 하지만 읽어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동안 롯데의 2번의 우승은 천재적인 투수 최동원, 염종석과 맞바꿔서 이룬 것이라고 볼 수 있죠.
하지만 그건 단기적으로는 최상의 결과일 수 있어도
장기적으로 보면 최악의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항상 다음을 준비하는 것도 감독의 자세이죠. 롯데 팬이라면 한 번 쯤 읽어보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