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비나스는 현상학적 전통에 서 있고, 이 말은 그는 '인간은 세계와 마주한다'는 현상학의 대전제에 동의하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그는 이 방법론을 통해 자신의 철학을 전개시킬 것인데, 이 '세계와 마주함'은 인간이 개념적으로 세계를 분류하고 이해한다는 것이 아니라, 세계-내-존재로써 (하이데거식 설명이다) 세계를 맞닥뜨리고, 여기서 나오는 파생물이 곧 세계에 대한 '이해'라고 말 할수 있다. 다른 말로 하자면, 개념은 후차적인 것이고, 개념들을 형성하게 하는 근본적 경험들, 이것들이 세계와 마주함으로써 생긴다고 할 수 있다. 인간과 세계 혹은 세계내의 다른 존재자들과의 만남의 장에 있어서 나타나는 현상들은 교육을 통해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본래적으로 인간이 그것들과 마주함을 통해 나타나는 현상을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해하고 있고, 이를 통해 인간의 존재방식을 역으로 알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예를 '불안'을 들 수 있을 것인데, 불안은 어떤 생리적인 현상이 아니고 정신적인 현상인데, 이 현상은 개념화를 통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무지가 그 조건인 것이다. 즉, 불안이야 말로 인간이 세계와 마주함을 통해서 나타나게 되는 현상의 대표적인 예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먼저 인간이라는 존재자는 다른 존재자와 다르게 '존재물음'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인간존재는 다른 존재자와 존재방식이 아주 상이하게 다르다고 이야기 한다. 인간은 존재자가 이러저러하게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고, 또한 자신이 무엇이 어떻게 언제 왜 존재하냐는 등의 질문을 할 수 있다. 이러한 말 가운데에는 인간은 이미 '존재'의 의미를 알고 있다는 것이 함축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로인해 인간은 다른 존재자와는 다르게 존재와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 알려진다. 이 존재물음은 곧 인간이 존재에 함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항상 벗어나고 있다는 것이고 이것은, 의식은 항상 무언가를 지향하고 있다는 후설의 지향성과도 연계되는 부분이다. 요컨대 인간은 무언가를 지향함을 통해 자신의 존재에서 '탈출'하고 있고 이렇게 존재의 획일성에서 벗어난 자유로써의 인간이 곧 인간의 존재성인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존재하는 인간이 자신을 초월하면서 자신 밖의 무엇과 만나는 것, 이것이 바로 세계를 마주함이라고 말 할 수 있다. 하이데거는 인간만이 이 '세계'라는 것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다고 이야기 할 것이다. 다른 존재자들은 그 자신의 존재에 함돌되어 있지만, (돌과 같은 것은 이미 물리적인 차원에서 자신의 존재에 묶여 있고 -관성을 생각하라- 동물같은 것은 반응은 할 수 있지만 본능에 묶여 있기 때문에 결국 세계를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환경'을 인식하는 선에서 그친다라고 할 것이다) 인간은 이미 자신의 존재를 질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자신의 존재를 초월하고 있고, 그러한 초월성은 곧 세계를 마주함과 같다.
그런데 레비나스는 바로 타인과 주체가 관계맺는 방식이 곧 하이데거에게 있어서 인간과 존재의 관계와 같이 특별하다고 이야기 한다. 그것은 그가 말한 '얼굴은 뜻이다' 라는 말로도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인데, 그 말이 뜻하는 것은 인간은 다른 인간과 마주함에 있어서 인간이 다른 존재자들을 '다룰 수 있는 것' 그러니까 도구화가능한 것으로 인식함과는 다른 방식으로 마주한다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또한 주체(sujet) 라는 말이 섬김(sujetion)에서 나왔다고 말한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마주함에 있어서 나타나는 현상은 '인간은 다른 존재자와 달리 어떠하기 때문에 이렇게 대접해야 한다'는 교육을 통한 것이 아니라 인간은 인간을 다른 존재자와는 다른 것으로 이미 알고 있다는 말이다. 특히나 상대방의 '얼굴'을 바라볼 때 말이다. 그러나, 자신의 환경에 함몰되어 있다면 그것을 느끼지 못할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왕족이고 왕궁에서 자란 좋지않은 교육을 받은 사람이 다른 인간을 자신보다 못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습관화 되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상황이 아니더라도 세상자체가 그러한 것이다. 결혼상대를 조건보고 결혼하거나, 직장을 갖기 위해 스펙을 쌓는 그러한 것들은 사실은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거래'행위이고, 이것은 타인을 사물화하는 것과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환경에 함몰되어 있는 인간에게 말을 거는 존재가 바로 약자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약하고 쉽게 죽고, 그러하기에 너무나 쉽게 '사물화', '도구화', '노예화' 할 수 있는 약자. 이러한 약자를 마주할 때 오히려 불안이 엄습한다. 내가 이 사람을 아무렇게나 할 수 있다는 습관화에서 비롯된 굳혀진 패턴과 인간이 인간을 마주함에서 나오는 본래적인 감정이 가장 크게 대립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약자를 마주할 때, 타인에 대한 섬김과 인간을 사물화하는 습관의 내적인 갈등을 가장 크게 느낄 수 있고, 바로 이러한 순간이 인간이 세계를 마주하는 순간, 유한이 무한과 만나는 순간이다. 레비나스는 이러한 논의를 통해 윤리학을 현상학으로 풀어냄으로써 존재론을 새롭게 정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