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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유과거] 산문 - 바다
게시물ID : readers_801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나도안생겨요
추천 : 7
조회수 : 287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3/06/30 01:27:59
그녀의 시선이 사진 한 장에 멈췄다. 푸른 바다는 하늘과의 경계가 사라진 듯 보이는 것이, 보고 있을수록 묘한 신비감이 드는 사진이었다. 한참을 바라보고 있자니 푸른 바다가 마치 일렁이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너무 오랫동안 바다에 가지 않아 헛것이 보이는 구나 싶은 찰나, 잔잔히 일렁이던 것이 거센 파도가 되어 그녀의 방 안으로 몰아치더니 단 숨에 그녀를 삼켰다.
 
 
바다에 삼켜지는 지독한 악몽이었다. 막혀오는 숨도,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까만 바다 속도, 차가운 물의 온도도 모든 것이 너무나도 생생한 꿈이었다. 하지만 온 몸에서 풍겨오는 비릿하고 짭조름한 바다 냄새와 축축하게 젖어 있는 옷은 조금 전의 일이 꿈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그래, 이것은 꿈속의 꿈 일뿐이야. 그녀는 자신을 진정시키며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살폈다. 그다지 넓지 않은 방 안을 둘러보던 그녀는 문득 이 곳이 낯설지만 익숙한 곳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곳은 그녀가 여덟 살이던 해, 그러니까 이십년 전 그녀가 지내던 보육원이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친척집을 전전하던 그녀는 여덟 살이 되던 생일 날 아침, 고모의 손에 이끌려 보육원에 맡겨졌다. 아니, 버려졌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두 밤만 자고나면 데리러 온다며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고모는 두 밤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고, 일 년이 지나도 데리러 오지 않았다. 고모를 기다리지는 않았다. 어린 나이었지만 도망치듯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보육원을 떠나던 고모의 모습에 어쩌면 그것이 고모를 보는 마지막일지도 모른다고 은연중에 생각했던 것 같다.
 
 
기억도 나지 않는 고모의 얼굴을 머릿속에 떠올려보며 아득한 옛 기억에 잠겨있는데 누군가가 다리를 톡톡 건드리는 느낌에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허리춤에도 오지 않는 조그만 여자아이는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깜빡이는 동그란 검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녀는 이것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여자아이는 여덟 살의 그녀였다.
 
 
어린 그녀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목에 걸린 수첩을 꺼내어 글씨를 쓰더니 그녀에게 내밀었다. ‘언니는 누구에요?’ 나는 넌데. 그녀는 속으로 생각하며 어린 그녀에게 어떻게 대답을 해주어야 할지 생각했다. 아직은 입모양을 보고 사람의 말을 읽는 것이 어려울 것임을 알기에 그녀는 어린 그녀의 손에서 연필을 빌려 삐뚤삐뚤하게 쓰여 진 글씨 밑에 대답을 적었다. ‘미래에서 온 사람.’ 그녀의 대답을 건네받은 어린 그녀는 미래라는 단어의 의미를 모르는 듯 해 보였다. 아아, 어린 그녀는 수첩을 다음 장으로 넘기더니 손을 꼬물거리며 글씨를 썼다.
 
 
태어날 때부터 소리를 듣지 못했던 그녀는 아주 어릴 때부터 수화와 구화를 배웠지만 보육원에서는 수화와 구화를 사용할 일이 거의 없었다. 보육원 내에서 수화를 할 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뿐 더러 구화로 대화를 하기 에는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했다. 그래서 수화와 구화는 학교에서만 사용하고 보육원에서는 주로 글로 대화를 나누었다.
 
 
오늘은 아무도 없어요, 나만 빼고 동물원에 갔거든요.’ 어린 그녀의 글을 곱씹으며 기억을 더듬자 어렴풋이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그 날은 보육원 식구끼리 서울의 동물원을 구경 가기로 한 날이었다. 전 날 먹은 음식이 탈이 났는지 복통으로 결국 어린 그녀는 선생님 한 분과 보육원에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날, 어린 그녀는 이십년 후의 미래의 자신을 만났다.
 
 
나는 동물원에 한 번도 못 가봤는데. 언니는 가봤어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어린 그녀의 어깨가 축 쳐지며 부럽다, 하고 구화를 했다. 그런데 갑자기 어린 그녀가 배를 부여잡고 옆으로 쓰러졌다. 한 동안 괜찮던 복통이 다시 시작된 모양이었다.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한 대도 울지 않으려 입술을 앙 다물고 버티는 것이 못내 안타까웠다. 그녀는 어린 그녀를 다리에 앉히고 배를 살살 쓸어주었다. 그 언젠가 그녀의 어머니가 그녀에게 해주었던 것처럼.
엄마.’ 어린 그녀의 입모양을 읽던 그녀가 빙긋 웃음을 지었다. 어린 그녀도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배가 아플 적이면 통통한 배를 따뜻한 손으로 몇 번이고 쓸어주었던 어머니를.
 
 
품 안에서 잠든 어린 그녀를 바닥에 눕혀놓고 그녀는 어린 그녀와 대화를 나누었던 수첩의 종이를 찢어 손에 쥐고 보육원 밖으로 나왔다. 뜨거운 여름 햇빛과는 달리 시원한 바람이 기분 좋게 불어왔다. 조금 걸음을 걷자 탁 트인 바닷가가 보였다.
 
 
사진 속 그 바다가 틀림없었다. 바다가 일렁일 때마다 햇빛이 바다에 비춰 보석처럼 빛났다. 바다 바로 앞까지 걸어와 서자 파도가 밀려올 때마다 발이 물에 잠겼다. 물은 차갑기 그지없는데 이상하게도 따뜻하게 느껴졌다. 잔잔했던 파도가 조금씩 크게 일렁이더니 점점 거세지자 그녀는 본능적으로 이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온 몸을 감싸오는 파도에 편안히 몸을 맡겼다.
 
 
눈을 뜬 그녀의 몸은 아직도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손 안에는 어린 그녀와 나누었던 대화가 적힌 물에 젖은 종이가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번지고 고개를 들어 시선을 옮긴다.
 
 
하늘과의 경계를 잃은 푸른 바다, 그녀의 시선이 사진 한 장에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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