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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유과거]산문_서울의 어느날 전직 여기자와 두 남매의 일요일
게시물ID : readers_805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카드깞줘체리
추천 : 1
조회수 : 258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3/06/30 19:24:16

그녀의 시선이 사진 한 장에 멈췄다. 시선 끝엔 눈에 익은 한 남자가 자랑스레 턱을 치켜들고찍은 사진이 있었다. 그 아래로 새 개의 당이 야합하여 탄생한 [국민연합당] 정권을 믿고 따라준다면 이 경제붕괴를 끝낼 수 있다는 의미 없는 문구만 유치한 색으로 적혀있었다. 싸구려 프로파간다 그 자체인 사진벽보. 그녀가 알던 과거의 그 남자는이런 벽보에 자신의 얼굴이 실리는걸 목숨을 걸고서라도 막았을 텐데.



[왜그래요, 엄마?]



손을 잡고 있던 여자아이가 묻는다. 그제서야 그녀의 정신은 이 쓸쓸하고 삭막한 거리로 돌아온다.



[아무것도아니야. 그보다 파, 다리는 좀 괜찮니? 불편하지 않아?]



파는 올해로 15살이 되었다. 한창 자랄 나이였기에작년까지 끼우던 자동의족이 양쪽 다 조금 작아졌다. 파는 작년부터 자주 접합부분에 상처를 입었다.



[아니, 괜찮아요. 병원에서부터 걸어오면서 이제 익숙해졌어.]



메싸의 병문안을 간 김에 파의 자동의족을 조금 조정했다. 의사는 내년쯤엔 두 쪽 모두 새것으로교체해야 할거라고 말했다. 비 정규직 기자인 그녀의 벌이로는 꽤나 부담스런 일이었다. 파의 오빠 메싸는 전세계적인 사설경비업체 [비질런트 가디언]에말단 일자리를 얻었다. 그 기업은 모든걸 민영화시킨 현 정부와 계약을 맺고 수도권의 경찰권을 행사하는중이었다. 그러다가 지난달 메싸를 비롯한 몇몇 말단 직원들이 근무 중 의문의 폭발에 휩싸였다. 몇몇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병실을 다녀간 뒤엔, 아니나다를까언론이 연일 테러를 운운하기 시작했다. 가장 열심인건 그녀가 속한 언론사였다.



[걱정마세요, 히로, 모든 치료비는 회사가 대기로 했어요.]



그녀는 마음이 찢어지는 듯 했다. 왜 학업을 포기하겠다는 메싸를 더 완강히 말리지 못했을까. 메싸는 또다시 자신이 원치 않았던 싸움 때문에 상처를 입고 이용당할 위기에 처했다. 또다시. 그녀는 자신을 질책했다. [이러려고 아이들을 데려온 게 아닌데…]



이제 막 조정을 끝내서 아직은 걷는 게 부자연스러운 파의 손을 잡고 그녀는 천천히 집으로 향했다. 지난 5년 사이 많은 것들이 변했다. [에너지 쇼크]이후 침체일로인 경제는 더욱 악화되었고, 정부와 기업들은 재정을 긴축하는데만 온 신경을 쏟아 부었다. 모든 희생은 [경제회생]이라는 편리한 문구아래 합리화 되었다. 여전히 서울은 번잡했지만 예전의활기는 온데간데 없었다. 그녀는 점점 이 도시가 회색에서 잿빛으로 수렴해 간다고 느꼈다.



[엄마, 이거 봐요, 또 비밀편지가 왔어.]



아파트 현관 우편함에 아무렇게나 구겨 넣어진 전단지와 함께 익숙한 편지 한 통이 꽂혀있었다. 이번에도발신인은 적혀있지 않았다. 하지만 편지를 쓴 게 누군지는 뻔하다. 파는마치 탐정놀이라도 하는 것처럼 즐거워했지만 그녀는 그 편지가 영 달갑지만은 않았다. 집에 들어온 그녀는 파가 전해준 편지를 자신의 책상 한 귀퉁이에 던져 놓았다. 거기엔 똑같이발신자 없이 보내진 편지들이 몇 통이나 쌓여 있었다.



[편지를보낸 사람들은 엄마랑 같이 일했던 분들이죠? 엄마가 나랑 오빠를 구해주러 오기 전에.]



거실 탁자에서 전단지를 읽던 파가 고개를 들며 그녀에게 물었다. 파는 언젠가 편지의 내용을 슬쩍봤던 모양이다. 그녀는 예전에 함께 일했던 동료들이자 선배들이라고 대답해 주었다. 다만 파에게 말해줄 수 없었던 건, 그녀가 일하는 언론사가 정권의나팔수가 되어 끊임없이 경제붕괴에 대한 공포를 조장하고 있다는 것, 그에 반발하던 동료들은 모두 부당해고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독립언론 창간했을 때 한때 존경 받던 언론인이던 그들은 정부에 대항하는테러리스트 비슷한 존재로 낙인 찍혔다는 것, 그 정도였다.



파가 보고 있던 전단지엔 길가 사진벽보 속의 그 얼굴이 인쇄되어 있었다. 한때 그녀가 존경했던사람. 그녀가 캄보디아 분쟁지역의 특별 취재원으로 파견될 수 있도록 힘써줬던 사람, 허나 이제는 정치에 맛을 들여 권력에 놀아나는 과대망상증 환자에 지나지 않는 그 사람의 얼굴이.



그녀는 6년 전 이맘때 베트남 국경에서 캄보디아 프놈펜 인근MSF 캠프로 이동하는 헬기 안에서 생각했다. 이 세상은 구조적으로 점점 잘못되어가고 있다고. 기업들의 로비로 원하는 기사를 맞춤제작해주는 언론사, 기자질은 당장그만두고 시집이나 가라는 부모의 성화, 점점 속물이 되어가는 자신의 주변사람들에 지치고 탈진해 그녀는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AP연합 파견 신분의 분쟁지역 특별 취재원 자리에 지원했었다. 그런데 바로 어제, AP연합 내에서 분담금이 가장 적은 언론사 중하나의 취재원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녀는 분쟁지역이 아닌 캄보디아 수도 근처의 후방 의료캠프에만 머물러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엄마, 혹시 우리가 엄마가 하는 일에 방해가 되나요?]



그녀는 파와 메싸를 만나게 된 캄보디아에서의 일을 잠시 떠올렸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잠깐의공백 뒤에 무겁게 공간을 울려오는 파의 질문은 그녀의 머리를 때리듯 갑작스럽고 당황스러웠다.



[밥소사보파, 무슨 말을 하는 거니... 그럴 리가 없잖아, 방해라니, 어쩌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거야…]

[오빠가그랬어. 엄마는 우리 때문에 부끄러운 일을 계속하고 있다고, 해야만하는 일을 못하고 있다고.]



불쌍한 파는 거의 울먹일 지경이었다. 그녀는 얼른 이 가여운 소녀를 품에 안아주었다. 그녀는 자신의 좌절감과 무력감을 이 아이들이 고스란히 느끼고 있었다는데 놀랐다. 그리고 미안했다. 요 근래 그녀는 끊임없이 절망하고 있었다. 사람들에게 새로운 자극을 제공하는 예전 방식조차 폐기해 버리고 공포만을 조장하여 모두를 앞만 보는 경주마로개조시켜 버리는 이 뻔뻔한 정권에, 그리고 그 앞잡이인 대형 언론사에 빌붙어 살아가는 자기 자신에게.


 



[자요, 이거 먹어요.]


벽에 기대어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그녀에게 현지 에이전트이자 통역인 로안이 식사가 담긴 접시를 내밀었다. 그녀는 쾌활한 베트남사람 로안에게 생각 없다고 말했다. 오늘도 너무많은 죽음을 보았다. 처음엔 베트남과 대만, 그리고 그 뒤로중국과 미국이 개입해 있을게 뻔한 이 참담한 분쟁의 실체를 밝혀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가 이 캠프에서마주하게 된 것은 그런 국제적인 역학관계가 아니라, 죄 없이 희생당하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었다. 이곳에선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과 부유한 나라의 기계들이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그리고 가장 큰 피해자는 어린이들이었다.



그녀는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서 오늘도 어떤 두 소년소녀의 식사풍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왼쪽은어깻죽지부터, 반대쪽은 팔꿈치 부근부터 팔이 없는 한 소년은 매 끼니마다 입으로 작은 냄비를 물고 구석으로왔다. 그럼 작고 귀여운, 하지만 두 다리를 쓸 수 없는소녀는 밝게 웃으며 그 작고 까만 냄비를 받아 들었다. 냄비의 내용물은 보통 점성 없는 쌀밥과 돼지혹은 닭을 볶거나 삶은 반찬인 챠를 한데 담은 것이었다. 소녀의 손으로 밥과 반찬을 뭉쳐서 두 소년소녀는그렇게 식사를 했다. 하염없이 소년의 입에만 음식을 가져가는 소녀의 손, 고개를 돌려 그 손을 물리치고 소녀를 채근하는 소년, 그제서야 수줍게자신의 입에 조금 음식을 넣는 천사 같은 소녀.



[수녀님, 저 아이들은 남매인가요, 분쟁 통에 부모를 잃은?]



네덜란드에서 온 마리아 수녀님은 어깨를 들썩였다. 그 두 소년소녀에 대해선 그 누구도 아무것도알지 못했다. 수녀님는 피로 이어져 있는가 아닌가는 그리 중요치 않다는 말을 남기고는 바쁜 걸음으로떠나갔다. 그날 이후 그녀는 통역인 로안의 도움으로 그 아이들의 친구가 되었고 마침내 보호자가 되었다. 꽃처럼 예쁘다고 하여 보파라고 불리던 소녀는 그녀를 엄마라고 부르며 따랐고,4월에 발견되어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고 하여 메싸라고 불리던 소년은 그녀를 언젠가부터 히로라고 불렀다.




 

그래서 마침내 그녀는 이렇게 어느 일요일 오후 서울의 한 아파트 거실에서 파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달래줄 수 있었다. 파는 이른 저녁 잠이 들었다. 인공의족을 새로 조절한 뒤 꽤 먼거리를 걸었고 그녀의 품에서 눈물까지 흘렸으니 지칠 법도 했다. 그녀는 잠든 파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맞춘 뒤 거실 탁자에 앉아 어둠이 짙어지는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스마트폰으로 메싸에게 당부의짧은 메시지를 적고 있을 때, 마침 메싸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녀는 많은 것을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대신에 퇴원하면 꼭 한번 집에 찾아오라고 당부만을 할뿐이었다. 메싸는 더 이상 병원에 찾아오지 않아도 된다고, 퇴원하면꼭 가겠노라고 그녀에게 말했다. 그저 평범하게 끝날 수 있었던 통화의 말미에 메싸가 그녀에게 말했다.

 


[히로, 내 상처 때문에 아파하지 마세요. 이건 내가 정한 싸움입니다. 어린 시절과는 달라요당신은 긍지 있는 사람입니다. 해야 할 일, 해야 할 말을 하세요. 그게 우리가 원하는 겁니다.]

 


그녀는 전화를 끊고 오랜 시간을 탁자에 앉아 있었다. 깊은 새벽의 어둠이 창 밖은 물론 집안에깔렸다. 그리고 그녀는 마침내 편지지와 펜을 꺼내 들었다. 아주오랜 시간 적었어야만 했던 편지를 적기 위해서.

 


[게르트루다마리아 수녀님께.]

 


그녀는 파와 메싸의 입양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마리아 수녀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엄청나게많은 것들을 적게 되리라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편지는 짧고 간결하게 마무리 되었다. 편지를 다시 읽어보던그녀도 새삼스레 어렵지만 단순한 결정이었음을 깨달았다. 새롭게 시작되는 월요일에 자신은 대형 언론사건물에 있지 않을 것이라는 것, 자신이 하고 싶은-다음 세대를위해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해 카메라를 다시 들겠다는 것, 그것. 단지그것뿐.

 


[당신의히어로가.]

 


편지는 그렇게 끝을 맺었다. 마리아 수녀는 동양에서 온 작은 체구의 여기자가 진정되기는커녕 확대되어만가는 분쟁 속에서 자신을 태워가기 위해 착륙한 AP연합의 헬기를 되돌려 보내던 바로 그 순간부터 그녀를히어로라고 불렀다. 그리고 어떤 아이도 그 호칭을 따라 부르기 시작했었다.

 


편지를 봉투에 넣는 와중에 동이 터 올랐다. 그녀는 어슴푸레 밝아져 오는 청아한 푸른빛 하늘사이로 검은 구름의 실루엣이 저 멀리로 벗어나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생각했다. 오늘은 맑은 날이 될 것 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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