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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ID : lovestory_6627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최선입니까★
추천 : 6
조회수 : 1650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4/05/21 21:53:03
언젠가 너를 사랑한 적이 있다 / 남진우
그리하여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어느 날
낡은 수첩 한 구석에서 나는 이런 구절을 읽게 되리라
언젠가 너를 사랑한 적이 있다
그랬던가
너를 사랑해서
너를 그토록 사랑해서
너 없이 살아갈 세상을 상상할 수조차 없어서
너를 사랑한 것을 기필코 먼 옛날의 일로 보내버려야만 했던 그 날이
나에게 있었던가
언젠가 너를 사랑한 적이 없다고 한사코 생각하는 내가
이토록 낯설게 마주한 나를
나만 다만 떠올릴 수 없어서
낡은 수첩 한 구석에 밀어넣은 그 말을 물끄러미 들여다본다
언젠가 너를 사랑한 적이 있다
그 말에 줄을 긋고 이렇게 새로 적어넣는다
언젠가 너를 잊은 적이 있다
그런 나를 한번도 사랑할 수 없었다
첫눈이 온다구요 / 황경신
당신은 그냥
밤으로 오세요.
꿈으로 오세요.
눈길에 발자국 하나, 얼룩 하나 남기지 말고
내가 왔어요, 소리도 내지 말고.
그래야 내가 모르죠.
당신이 온 것도 모르고
어느새 가버린 것도 모르고
떠나는 사람이 없어야 남는 사람도 없죠.
행복이 없어야 슬픔도 없죠.
만남이 없어야 이별도 없죠.
첫눈이 온다는 날
기다림이 없어야 실망도 없죠.
사랑이 없어야 희망도 없죠.
잠시 왔다가 가는 밤처럼
잠시 잠겼다 깨어나는 꿈처럼
그렇게 오세요.
그렇게 가세요.
발화 / 황인찬
중간이 끊긴 대파가 자라고 있다 멎었던 음악이 다시 들릴 때는 안도하게 된다
이런 오전의 익숙함이 어색하다
너는 왜 갑자기 화를 내는 거지?
왜 나를 떠나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거지?
통통거리는 소리는 도마가 내는 소리다 여기로 보내라는 소리는 영화 속 남자들이 내는 소리고
어떤 파에는 어떤 파꽃이 매달리게 되어 있다
어떤 순간에나 시각이 변경되고 있다
저 영화는 절정이 언제였는지 알 수 없이 끝나버린다
그런 익숙함과 무관하게
찌개가 혼자서 넘쳐흐르고 있다
불이 혼자서 꺼지고 있다
나는 너에게 전화를 걸어야겠다는 생각을 지나친다
꽃 / 기형도
내
영혼이 타오르는 날이면
가슴 앓는 그대 정원에서
그대의
온 밤내 뜨겁게 토해내는 피가 되어
꽃으로 설 것이다
그대라면
내 허리를 잘리어도 좋으리
짙은 입김으로
그대 가슴을 깁고
바람 부는 곳으로 머리를 두면
선 채로 잠이 들어도 좋을 것이다
밤 열한 시 / 황경신
기다리는 시간도 봄이다.
보내고 그리워하는 시간도 봄이겠지.
당신을 기다리고 보내고
그리워한 시간까지 다 사랑이었던 것처럼.
메리제인 요코하마 / 황병승
메리제인.
우리는 요코하마에 가본 적이 없지
누구보다도 요코하마를 잘 알기 때문에
메리제인. 가슴은 어딨니
우리는 뱃속에서부터 블루스를 배웠고
누구보다 빨리 블루스를 익혔지
요코하마의 거지들처럼.
다른 사람들 다른 산책로.
메리제인. 너는 걸었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도시.
항구의 불빛이 너의 머리색을
다르게 바꾸어놓을 때까지
우리는 어느 해보다 자주 웃었고
누구보다 불행에 관한 한 열성적이었다고
메리제인. 말했지
빨고 만지고 핥아도
우리를 기억하는건 우리겠니?
슬픔이 지나간 얼굴로
다른 사람들 다른 산책로
메리제인. 요코하마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 고정희
길을 가다가 불현듯
가슴에 잉잉하게 차오르는 사람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너를 향한 기다림이 불이 되는 날
나는 다시 바람으로 떠올라
그 불 다 사그러들 때까지
스스로 잠드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일어서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떠오르는 법을 익혔다
네가 태양으로 떠오르는 아침이면
나는 원목으로 언덕 위에 쓰러져 따스한 햇빛을 덮고 누웠고
누군가 내 이름을 호명하는 밤이면
나는 너에게로 가까이 가기 위하여
빗장 밖으로 사다리를 내렸다
달빛 아래서나 가로수 밑에서
불쑥불쑥 다가왔다가 이내 허공 중에 흩어지는 너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수직의 잠 / 박시하
지난밤 헤맨 길에
짙은 냄새와 흐린 울음이 있었지
기억해?
한 줄의 푸르고 비틀거리는
물컹한 꿈을
최초로 수평선을 그리던
파란 색연필의 욕망을
나를 갖고 싶어서
우린 울었어
부풀고 늙은 바램
터트리면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눈물 마른 바닷가
이제는 지울 수 없는 자취들을 따라서
파란 알몸인 채로 걸었어
아무것도 그립지 않아서
나는 미역처럼 웃고
너는 녹이 슨 길을 짚고
먼 바다를 바라봤어
기억해?
죽지 않아서
거꾸로 잠이 들었지
2014. 0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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