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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5.18민주화 운동 펙트정리-수시 업데이트(구하기 힘든 자료만)
게시물ID : sisa_51520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코코샤토
추천 : 5
조회수 : 1617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4/05/22 01:33:27
요즘 릴베측에서 하도 설쳐서 펙트 정리함.
수시로 업데이트 예정.
검색해도 잘 안나오는 것 중점으로 올렸음.
왠만한 자료는 안올릴거임. 찾기 힘든것만 올림.
질문이나 의견은 [email protected]
물론 댓글도 받습니다.
베충이들은 반박시 반드시 릴베자료 아닌 정부에서 인정객관적 자료 가져올것
​니들 자료는 객관적이지 못함
 
 
 
[사망자]
1980년 21일 1시 30분 충장로 입구 도심빌딩 5층 황호정(62) 총탄에 의해 사망.
동구청 앞 학생 4명 처녀1명 노인 2명등 7명 총 맞아 쓰러져 광주시청 시체 동구청 1층 바닥 사망자중 이성자(15)포함.
1980년 21일 1시 30분 전남대 앞 평화시장 입구 남편 기다리다 공수부대원 발사한 총탄 맞고 숨짐(임신 8개월)
1980년 21일 오후 2시 5분(이후) 윤흥정 계엄분소장 이름의 전단(헬기에서 뿌림) 시민에 대한 위로, 사과, 연행자 처리문제 전혀 언급하지 않고 '질서위해 귀가해라'라는 말이 전부임.
1980년 21일 2시 55분 도청별관 옥상, 수협, 전남지부 옥상, 도심빌딩 수많은 저격수들이 충장로, 학동쪽 입구 부근 지나가던 행인을 무차별 발포함(광주 대동고등학교 전영진-3년-총탄맞아 사망)
[계엄군]
황영시 육군참모차차장 오후 4시쯤 광주소재 육군 기갑 학교 소장 이구호 준장에게 전차 1개대대(32대)동원하여 시위 진압하라고 지시. 김기석 전교사 부사령관에게도 전차와 무장헬기 동원하여 시위진압 명령 - '계통상의 명령 아니다'거부.
김재명 작전부장 이상훈 작전차장 통해 전교사 김순현 전투발전부장에게 코브라 헬기로 조선대학교 뒷산에 위협사격 가해 시위대 해산하라고 지시 - 반대
​20일 오후 이어 21일 오전 10시 10분 도청광장 공수부대원 실탄 공개적 지급
이희성 계엄사령관 21일 오후 자위권 발동조치와 공수부대의 시외곽 배치 등 6개항 결정(21일 오후 4시 35분)
자위권 발동 결정은 오전 10시 10분 이전으로서 계엄사령부 공식결정 이전에 발포명령이 하달되었음을 알 수 있음.​
철수 다음날 10시 30분 군용헬기 시내상공돌며 "폭도들에게 알린다, 자수하라, 자수하면 생명을 보장 받는다"라고 말함.​
[시민]
다이너 마이트(TNT)이용하려고 하였으나 대다수의 시민들이 반대로 이용하지 않음.
제 2차 세계대전 유물로 명중률이 극히 저조(M16비교) M1, 카빈 무장.
칼빈-3646정/M1-1235정/M16-34정/​권총-42정/공용화기-51정/엽총395정/수류탄562개/탄약(소화기)28만 8630발/폭약-약3000상자)
당시 카빈,M1 세계 어느 분쟁지역에서도 사용하지 않음.
21일 학생들 금남로에서 공수부대 대치있던 시위대열 제일성결?렬?교회 스피커 통해 호소(정부와 협상하자, 시민을 모여 좋은 의견 내자, 도청광장에 모이자)독려하는 내용.
​공수부대 철수 후 시민들이 합의하여 총기를 질서정연하게 다룸(쏘지말것, 조심해서다룰것)
시민들이 요구를 함 - 1. 계엄해제/2. 전두환 퇴진/3. 피의대가/4. 보상요구
질서가 필요하다고 호소를 시작함.
대표를 파견하려 했으나 계엄분소측과 사전협의가 되지 않았고 계엄분소가 거절하였음.
공수부대 철수 이후 적극적 민중들은 다소곳한 시민들이 되어 플래카드 시위를 시작함.
22일 낮 12시 정각 애국가가 울려퍼짐 당연히 전부 따라불렀음. 이떄, 학동 증심사 입구에 공수부대 출현이 보고됨. (사실이 아니었으나 낙오된 공수부대 1명 포로잡음) 상황실로 끌고갔음.
"저놈 죽여야 한다"라는 말도 있었으나 어느 한 사람이 "이 군인 한 사람의 잘못이 아니다"라고 외쳤고 공수부대원을 풀어주었음.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추념행사를 시작함.
추념행사후 스피커 구호중 "조국을 아끼자"라는 말도 나왔음. 이는 5.18이 애국심에서 비롯되었음을 확인해줌.
도청간부 일부직원, 정시채 부지사, 각계인사들과 함께 회의함.
결과는 대한민국 국가에 있는 광주가 어떤 명분을 만들어서라도 체제의 질서에 다시 흡수 되어야 한다는 의견만 나옴.
수습 시민 대책 위원회는 7개항을 결의함.
(사태스습전 군 투입 금지/연행자 전원 석방/군의 과잉진압인정/사후보복금지/상호책임면제/사망자에 대해 보상/이상요구 관철하여 무장해제)
8명의 대표 뽑아 오후 1시 30분경 상무대의 전남북 계엄분소로 소준열 분소장을 방문
소준열분소장 - "요구조건 들어주도록 노력하겠지만, 인정하는 것은 시간이 필요하다"
"7개 협상안 상부와 절충이 필요" - 협상자체를 거부
이는 계엄사는 처음부터 협상에 의한 평화적 수습을 완전히 배제하였음을 알 수 있음.​
[전개]
시가전, 교전하였다 기록-재향군인회(보수단체)
​당시 동아일보 기자 김영택, 당시 군,경,도청 관계자 외 동료기자들 전혀 듣지못한 사실.
당시 한미연합 군사령관 위컴 5월 22일 합참의장 유병헌과의 대화중 교전했다는 대목이 전혀없음.
장갑차 1대로 학동~지원동 두차례 왕복-길 양쪽 주택가에 기관총, M16난사하여 안방까지 총알(중앙고속버스 기사 전경호 회사에 두고온 새 버스가 걱정되어 출근했다가 퇴근위해 지원동에 있는 집에 걸어오던중 난사한 M16에 가슴맞고 숨짐)​
 
5월 22일 오전 10시. 김성수(44)는 아내 김춘화(40), 막내딸 내향(5)와 함께 자신의 생업수단인 전남 아 7395번 타이탄 트럭 몰고 광주를 빠져나오기 위해 동부 인터체인지 쪽으로 갔으나 공수부대의 도로차단과 동시에 시내로 돌아가라는 명령에 따라 차를 되돌려 시내로 돌아오려는 순간 집중사격 받아 딸과 아내가 중상에 빠짐(아내-정신이상, 딸-전신불수 중환자)​
 
​[LMG관련]
1980년 5월 21일 오후 4시 43분 전남대학교 병원 옥상 12층 젊은 사람 ​3~4명 2대의 LMG설치.
도청에 한발도 사격하지 않았음.
이 시각 당시 동아일보 기자였던 김영택기자 현장상황 정확히 목격(도청안에서 기관총 움직임 예의주시 설치과정까지 지켜봄)
당시 한국일보 기자 이상문, 당시 중앙일보 황영철기자 "LMG발사 없었다, 경험자를 찾기만 했을뿐, 발사는 없었다"
도청을 바로 내려다 보거나 전남대 병원을 건너다 볼 수 있었던 전일빌딩 8층에 자리잡은 전일방송국 종일 자리를 지키던 마삼열 전일방송국장 - "LMG설치 보았으나 발포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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