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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7일,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 해방 60주년
게시물ID : humorbest_8064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世界大戰
추천 : 35
조회수 : 3020회
댓글수 : 6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05/01/25 15:55:39
원본글 작성시간 : 2005/01/25 14:15:43
오는 1월 27일은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 해방 60주년입니다.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는 전쟁이 끝난 직후에 폴란드 의회에서 영구 보존하기로
결의했고 1978년 유네스코에 의해 후손들에게 꼭 물려주어야 할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다시는 이런 비극이 없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살해된 유대인들의 시신들. 독일인들은 패망하는 순간까지도 폴란드인, 소련인과

전유럽의 유대인, 집시족을 전 유럽에 세워진 강제수용소에서 살해하였으며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는 그 규모가 가장 큰 수용소였다.

시신의 처리는 금니는 뽑아 금괴로 만들고 머리카락을 모아

카펫을 짰고 뼈는 갈아서 골분 비료로 썼으며 피부는 비누를 만들었다.

소련군에 의해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가

해방되었을 때 생존자 7650명과 함께 발견된 머리카락만 7.7톤에 달했다.

독일인들의 유명한 말이 있다. "유대인은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



수용소 의사 멩겔레 박사에 의해 생체실험을 받고있던 집시소녀들.

너무 여위어 성별구분도 어려울 정도다.

생체 실험은 부헨발트 수용소와 나츠바일러-슈트루토프 수용소와

다하우수용소가 악명높았다.

다하우수용소에서는 독일 공군의 항공의학연구소가 실시한 고압과 저온이

인체에 끼치는 영향에 대한 생체실험이 실행되었고

부헨발트 수용소에서는 수용자들을 대상으로 바이러스

감염과 백신 효과에 대한 생체실험을 했으며

나츠바일러-슈트루토프수용소에서는 전쟁용 가스와

전염병의 효과를 알기 위한 의학 실험재료로 쓰였다.



가스실의 모습. 비용이 적게 들고 신속하고 효과적인 살인방법으로써 고안된 것이

바로 이 가스실이다. 사용된 가스는 지클론 B로 이 가스는 5kg으로

1천명을 살인할 수 있는 독가스인데 이 독가스가 2년동안에

1만kg이 소모되었다고 한다. 다음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장이었던

헤스라는 자의 증언 "가스실에 들어간 유대인은 보통 5분이면 다 죽었고

아무리 길어야 7분을 넘지 못했다. 어떻게 그렇게 쉽게 알 수 있냐고?

그것은 간단하다. 그들의 비명소리가 다 그치면 다 죽은 거니깐"



질식의 방, 환기통 하나 없는 방에 많은 사람을 가두어서 산소부족으로

질식시켜 죽이던 방이다. 이 방의 벽에는 마지막까지 살고 싶어서

벽에 손톱으로 십자가를 그려놓은 그림이 있다고 한다.



수용소 내 감옥이었던 11번 건물의 지하 감방, 작은 철문(왼쪽)으로

기어 들어가 4명이 90 ×90cm의 좁은 공간(오른쪽)에 죽을 때까지

서 있어야 했다.



카펫을 짜기 위해 모아두었던 머리카락의 모습



총살의 벽, 독일인들은 마음내키는데로 수감자들을 이곳에 끌고와서

총을 난사해 죽이곤 하였다. 총살시는 반드시 옷을 다 벗겼다고 한다.



수감되었던 유대인에 의해서 그려진 수감자들이 체벌을 받고 있는 모습.

오른쪽에 몽둥이를 든 사람이 유대인 관리인(블록 엘터스터)

그들은 나치 친위대보다 더 악랄하고 잔인하게 유대인들을 학대했다고 전해진다.



사람의 장기를 기념품으로 소지했음을 증명해주는 충격적인 사진



제2수용소 가스실 부근에 세워져 있는 희생자추모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매년 1월 27일 이곳에서 추모행사를 갖는다.



감시초소, 수감자들이 탈출하지 못하도록 담장에는 220V의 3상 전류가

흐르는 가시 철조망을 이중으로 쳐져 있는데 수용소 생활에 절망한

나머지 스스로 전류가 흐르는 철조망을 붙들고 죽은 사람도 수없이 많았다고 한다.



기념관 내에 있는 수감자들의 사진 모습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 건설한 강제 수용소 현황>

1. 아우스비츠수용소 Auschwitz

폴란드 남부 비엘스코주의 도시. 크라코프에서 서쪽으로 50㎞ 지점에 있다.

폴란드의 원래 지명은 오슈비엥침이다.

독일 최대의 강제수용소이자 집단학살수용소가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중 나치스는 이곳에서 250만∼400만 명의

유대인을 살해했는데 이 때문에 아우슈비츠라는 이름은 나치스의

유대인 대량학살을 상징하는 말이 되었다.

1919년 폴란드가 독립함으로써 폴란드에 귀속되었고,

제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39년 독일군에 점령되었다.

1940년 4월 27일 하인리히 히믈러가 첫번째 수용소 건립을 명령했으며,

같은 해 6월 14일 최초로 폴란드 정치범들이 수송되어왔다.

히틀러의 명령으로 41년 대량학살시설로 확대시켰다.

1941년 10월 인근의 브제진카(독일어로는 '비르케나우')

마을 외곽에 비르케나우라고도 불렸던 '아우슈비츠 2호'를 증축했다.

이후 45년 1월까지 폴란드인, 러시아인과 전유럽의 유대인, 집시족 등이 살해되었다.

이들은 면밀한 수송계획에 따라 각지에서 모아 건강한 사람은 강제노동수용소로

나머지는 가스실에서 살해, 소각하였다.

그들의 의류는 군수공장의 강제노동자들에게 배급되었고,

금, 은, 보석류는 국립은행으로 보냈다.

2. 베르겐-벨젠수용소 Bergen-Belsen

프로이센 하노버에 있던 첼레에서 북서쪽으로

약 16㎞ 떨어진 베르겐과 벨젠 마을 근처에 있었다.

1943년 7월 설립 당시에는 전쟁포로 수용소 겸 이송 중인

유대인의 임시 수용소로서 약 1만 명 정도를 수용할 계획이었으나

전쟁 말기에는 4만 1,000명을 수용했다.

가스실은 없었으나 여러 독일 수용소 가운데 가장 비참하고

지저분한 곳으로 3만 7,000명에 달하는 수감자가 굶주림, 과로, 질병으로 죽었으며

시체는 집단매장했다.

안네의 일기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안네 프랑크도

1945년 3월 여기에서 죽었다. 1945년 4월 15일 영국군의

점령으로 해방된 수용소로서 즉시 이곳의 참상이 알려졌다.

'벨젠의 짐승'으로 불렸던 나치 독일 친위대 사령관 요제프 크라머는

영국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교수형을 받았다.

3. 베우제츠수용소 Beuzec

폴란드 루블린 주 베우제츠 마을에 있었다.

1940년초 폴란드계 유대인을 대상으로 한 강제노동수용소가

처음으로 세워진 뒤 그 해 가을까지 베우제츠에만 3개,

그 주변에는 많은 지부 수용소가 세워져 한꺼번에

1만 1,000명 이상을 수용했다.

수백 명의 수감자가 과중한 노동, 굶주림, 질병, 열악한 생활조건으로

죽었다. 이 수용소들은 1940년 12월 폐쇄되고 수감자들은

다른 곳으로 분산되었다. 1942년초 이곳에 학살수용소가 세워져

처음에는 폴란드, 나중에는 독일,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등지

에서 온 유대인을 수용했다. 초기의 유대인 희생자들은

디젤 가스로 가득 찬 밀실에서 죽었으나 1942년 8월 독성이

강한 시안화수소 가스인 치클론-B(Zyklon-B)가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이 수용소는 1943년 봄에 폐쇄되어 그 흔적이 지워졌으며

그 자리에 농장이 세워졌다. 60만 명 이상이 베우제츠에서 죽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쟁이 끝났을 때 생존자는 단 1명뿐이었다.

4. 부헨발트수용소 Buchenwald

최초이자 최대의 수용소 중 하나로,

당시 독일 튀링겐에 있던 바이마르 북서쪽에서 7㎞가량 떨어진 숲 언덕에 있었다.

1937년 세워져 북쪽으로는 작센하우젠, 남쪽으로는 다하우에 있던

집단수용소를 보완하는 역할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2만여 명을 수용했고,

그들 대부분은 근처 공장에서 교대로 쉬지 않고 12시간을 노예처럼 일했다.

가스실은 없었지만 달마다 수백 명이 질병, 영양실조, 과로, 구타, 처형 등으로 죽어갔다.

무장 나치 친위대 위생학연구소의 한 부서인 티푸스와 바이러스

연구부가 여기에 있어 수용자들을 대상으로

바이러스 감염과 백신 효과에 대한 생체실험을 했다.

엄격한 규율로 운영되었으며, 1939~45년에 '부헨발트의 마녀'로

알려진 SS의 사령관인 카를 코흐의 아내

일자 코흐가 잔인한 새디즘으로 악명을 떨쳤다.

5. 헤움노수용소 Cheumno

폴란드 서부 바르타 강의 지류인 네르 강 주변에 있었다.

1941년 12월에 세워져 1945년 1월에 폐쇄되었다.

집시와 소련인 포로를 처형했고 아돌프 히틀러의 '최종 해결'에 따라

대부분의 폴란드계 유대인을 학살했다.

처형된 인원은 17만~36만 명으로 추산된다.

수용소 시설로는 출입구가 '샤워'라는 표시로 교묘하게 위장된 가스실이 있었는데,

이 속에서 사람들을 가스로 질식시켜 죽이고 시체는 근처 숲속에 집단 매장하거나

1942년 이후는 새로 세운 화장터로 옮겼다.

헤움노 수용소는 효과적인 뼈 분쇄기로 유명했다. 1944년 8월

에서 1945년 1월까지 친위대는 그 설비들을 불태워 없앴으며,

알려진 피수용자 모두를 죽임으로써 수용소

에 관한 모든 흔적을 없애려 했다.

전쟁이 끝난 뒤 발견된 생존자는 유대인 2명뿐이었다.

6. 다하우수용소 Dachau

아돌프 히틀러의 총리 취임 약 5주 뒤인 1933년 3월 10일

독일에 만들어진 최초의 나치 집단수용소.

독일 뮈헨 근교 북쪽으로 약 16㎞ 거리의 다하우 시(市)소재.

SS가 조직한 수용소들의 모델이 되었으며 훈련 중심지였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약 150개에 달하는

지부 수용소가 남부 독일과 오스트리아 여러 곳에 세워졌고 이들

은 본부 수용소와 합쳐 다하우라 불렸다.

이 남부 조직과 함께 부헨발트에 중부 수용소, 작센하우젠에 북

부 수용소가 세워졌으며 적어도 16만 명의 죄수가

본부 수용소를, 9만 명이 지부를 거쳐갔다.

질병, 영양실조, 육체의 억압 등 소위 '자연감소'로 적어도

3만 2,000명의 입소자들이 이곳에서 죽었다.

의학실험에 강제로 사용케 하기 위해 최초로 실험실을 세운

가장 중요한 수용소였다. 다하우수용소에서

독일 공군의 항공의학연구소가 실시한 고압(高壓)과 저온(低溫)이

인체에 끼치는 영향에 대한 생체실험이

실행되었다. 이 실험의 책임자 슈트루크홀트는 뒤에 미국에 건너가

미국 공군의 각종 우주의학연구 프로젝트에 참가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계속된 실험과

혹독한 생활환경으로 다하우는 가장 악명 높은

수용소가 되었다.

7. 플로센뷔르크수용소 Flossenburg

1937년 바이에른의 오버팔츠 군 노이슈타트에 있는 소읍인

플로센뷔르크에 세워졌다. 원래는 정치범 수용소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본막사와 15개 위성막사에 모두

3만~4만 명의 징역 죄수를 수용할

수 있는 강제노동수용소가 되었다.

1942년부터는 폴란드에 있는 수용소로 이송될 유대인의 임시 수용소로 이용되었다.

8. 작센하우젠수용소 Sachsenhausen

Sachsenhausen-Oranienburg라고도 함.

베를린 북서쪽, 오라니엔부르크에서 북쪽으로 3㎞ 떨어진 작센하우젠 마을 가까이에 있었다.

이 수용소는 1936년에 중부 독일의 부켄발트와 남부 독일의

다카우를 포함하는 수용소 체계의 일부로서

북부 독일 지역에 세워졌다.

처음으로 죄수들이 많이 들어온 것은 1938년이었다.

그해 11월 수정(水晶)의 밤(Kristallnacht)에 1만 명

의 유대인들이 베를린, 함부르크, 메클렌부르크, 포메라니아에서 붙잡혀

곧바로 배 편으로 작센하우젠으

로 보내졌다. 이 수용인원은 제2차 세계대전 무렵 2만~3만 5,000명으로

늘었다. 작센하우젠으로 보내진

총 20만 명 정도 되는 죄수 가운데

10만 명이 대부분 병, 강제노동, 처형으로 사망했다.

9. 나츠바일러-슈트루토프수용소 Natzweiler-Struthof

1941년 5월부터 1944년까지 알자스에 있던 나치 독일의 집단수용소.

수감자들은 부근 채석장에서 강제노역에 동원되고

전쟁용 가스와 전염병의 효과를 알기 위한 의학 실험재료로 쓰였는데,

100명의 희생자 해골이 스트라스부르 근처에 있는

라이히대학 해부학과로 고스란히 운반되었다.

대부분 유대인과 프랑스 레지스탕스인 약 2만 5,000명의

수감자가 이 수용소에서 죽었다. 연합국이 진격

해오던 1944년 4월경 대부분 폐쇄되고 수감자들을 다하우로 이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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