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몇해 전 일이다. 내가 갓 공방 양민으로 뛴지 얼마 안 되어 저글링 블러드 할 때다.
서울 왔다 가는 길에, 메가웹으로 가기 위해 삼성역에서 일단 전차를 내려야 했다.
메가웹 구석에 쭈그려앉아 스타를 플레이하는 폐인이 있었다. 얼핏보니 전략이 신선해 스타일을 배우려고 부탁을 했다. 굉장히 귀찮아 하는 눈치 같았다.
"빌드오더를 좀 배울 수 있습니까?"
했더니,
"남이하는걸 내가 따라한다고 game-i 1400점이 될 줄 아우? 닥치고 리플레이나 받아가슈."
대단히 싸가지없는 폐인이었다. 전략을 가르쳐 달라는 소리는 못하고 옆에서 지켜볼 수 있게 부탁했다. 그는 잠자코 열심히 테크를 타고 있었다. 처음에는 유닛을 뽑는것 같더니, 저물도록 이리 지정하고 저리 컨트롤해 보고 굼뜨기 시작하더니, 마냥 정전이다. 내가 보기에는 컨트롤은 그만하면 다 됐는데, 자꾸만 본진자원만 캐고 있었다.
인제 본진은 다 먹었으니 멀티를 하라고 해도 통 못 들은 척 대꾸가 없다. 팩토리는 정전이다. 갑갑하고 지루하고 초조할 지경이었다.
"더이상 플레이를 지켜볼 필요가 없으니 그 전의 리플레이라도 주십시오."
라고 했더니, 화를 버럭 내며,
"스타포트를 만들어야지 러쉬를 하지, 재촉한다고 배럭에서 드랍쉽이 나오나?"
한다. 나도 기가 막혀서,
"프로토스 전에서 무슨 바이오닉이란 말이오? 당신, 공방하수 이시구먼."
폐인은 퉁명스럽게,
"다른 데 가서 메카닉 배우슈. 난 안하겠소."
하고 내뱉는다.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그냥 갈 수도 없고, 스타리그 시간은 어차피 틀린 것 같고 해서, 될 대로 되라고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마음대로 뽑아 보시오."
"글쎄, 재촉을 하면 점점 거칠고 늦어진다니까. 유닛이란 제대로 뽑아야지, 뽑다가 체제 전환하면 되나."
좀 누그러진 말씨다. 이번에는 유닛 뽑던 것을 숫제 취소하고 태연스럽게 미네랄을 저축하고 있지 않는가. 나도 그만 지쳐 버려 구경꾼이 되고 말았다. 얼마 후에야 벙커를 만들고 이리저리 정찰 하더니 업그레이드가 다 되었다고 러쉬 간다. 사실 사업과 스팀팩은 아까부터 다 되어 있던 마린이다.
방송을 놓치고 재방으로 봐야 하는 나는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 따위로 유닛을 뽑아 가지고 토스전에 상대가 될 턱이 없다. 토스용 빌드가 아니고 저그용 빌드다. 그래 가지고 apm만 높게 잡는다. 멀티도 모르고 정전테란의 폐인이다.' 생각할수록 화증이 났다. 그러다가 뒤를 돌아다보니 폐인은 태연히 허리를 펴고 삼성역을 바라보고 섰다. 그 때, 바라보고 섰는 옆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프로게이머다워 보였다. 작지않은 머리와 발그레 홍조를 띤 얼굴에 내 마음은 약간 누그러졌다. 폐인에 대한 멸시와 증오도 감쇄(減殺)된 셈이다.
집에 와서 리플레이를 보여줬더니 들합동의 박순희는 꺅꺅 거리면서 야단이다. 다른 후로게이머의 전략보다 참신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전의 것이나 별로 다른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런데 박순희의 설명을 들어 보니, 유닛이 너무 많이 뽑으면 컨트롤 하다가 꼬라박지호를 잘 하고, 유닛이 너무 없으면 같은 타이밍이라도 러쉬를 하기 힘이 든단다.이렇게 벙커링하기 최적화된 스타급 센스가 뛰어난 리플은 좀체로 만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나는 비로소 마음이 확 풀렸다. 그리고 그 폐인에 대한 내 태도를 뉘우쳤다. 참으로 미안했다.
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