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시작하기 전에, 여러분들에게 무엇을 위해 여러분은 길거리로 나가고, 촛불을 들고, 소리를 높이는지 묻고 싶습니다.
1. 무엇을 위해 집회에 참가하는가
크게 두 부류로 나누겠습니다. 좀 진부하게 온건-강경으로 나눌 수도 있겠지요. 한 쪽은 세월호 참사에 집중해 이 참사를 만들어낸 관계자들, 공무원들, 언론인들, 정치인들에 대해 공정하고 투명한 심판이 이뤄지는 것을 주 과제로 하고 있습니다. 외치는 구호들도 '특별법을 제정하라' '아이들을 살려내라' '박근혜는 <책임>져라' 입니다. 보시다시피 온건한 분들의 주 과제는 세월호에 대한 책임입니다.
그렇다면 흔히 '박근혜는 퇴진하라'라는 구호로 대표되는, 그래서 때로는 세월호를 정치적으로 이용한다고 비판받는 강경파는 어떨까요. 사실 이들의 주 과제는 세월호가 아닙니다. 단지 세월호 참사를 통해 드러난 이 대한민국이라는, 이 나라의 문제점들에 근본적으로 도전하는 데 더 주목적이 있습니다. 세월호는 그 분노를 촉발시키는 계기였습니다만, 도착점으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이들이 다루는 주제는 세월호에 관련된 부정 뿐 아니라 국정원 여론조작 사건, 공영방송에 대한 언론탄압 등의 정치,사회적인 부정 전체에 걸쳐 있습니다. <책임>이 아니라 <퇴진>인 이유도, 부정선거를 저지르고 당선된 정부에는 정당성이 없으니, 이미 <책임>의 문제를 넘어서 있다는 관점이 드러나 있지요.
다루는 범위의 차이일 뿐, 사실 온건파와 강경파는 나눠져 서로 싸울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온건파의 요구대로 공정하고 투명하게 특검이 실시되고 특별법이 제정된다 하여, 국정원의 여론 조작 사건이나 계속 되어왔던 정부의 언론 탄압같은 주제에 관심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세월호 참사에 책임이 있는 자들 역시 증거가 없어지기 전 하루빨리 처벌되어야 하는 건 마찬가지고요. 지금 이 시간에, 어디까지, 어디에 집중을 하느냐의 차이일 뿐, 사실 이 둘의 목적은 같습니다. 결국은 다 같이 진정으로 공정하고 믿을 수 있는 정치를, 사회를, 대한민국을 만들자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현재 이 둘은 싸우고 있습니다. 온건파는 강경파에게 '참사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마라' 내지는 '선동꾼'이라 부르고, 강경파는 온건파를 보고 '저래서 뭐가 바뀌겠느냐', '정말 중요한 걸 모른다'며 비웃습니다. 여러분들은 분명 여태까지 세월호에 더 집중하거나(온건), 또는 정치와 사회의 정의를 적극적으로 실현하는 데 더 집중하거나(강경) 하나를 택해 인터넷에 댓글을 달고 집회에 나가고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눴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세월호에 대한 조사만 잘 이뤄진다면 부정선거든 언론탄압이든 신경쓰지 않겠다!"라고 하지 않는 이상, 세월호가 해결되면 그로 인해 드러난 우리 사회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고 자연스럽게 강경파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가 올 것입니다. 때문에 이 둘이 다른 것이 아니며, 단지 다루는 범위의 문제, 시간의 문제, 우선 순위를 정하는 문제일 수밖에 없다고 저는 주장하고 있는 겁니다.
사실 온건-강경이라는 단어를 제가 쓰기는 했습니다만, 이 분류 자체가 웃기다고 생각합니다. 세월호의 의혹을 밝히는 데 더 주안점을 두는 분들이 모였다 하더라도, '청와대로 행진합시다!'라고 외쳐 '불법집회'라는 딱지를 받고 해산 내지 연행되고, 이에 대한 전단지를 돌리고, 수위 높은 발언들을 한다면 그게 강경파이고, 설령 박근혜 퇴진을 외치더라도 조용히 촛불만 밝히고 간다면 그게 온건파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제부터 저는 '온건'과 '강경'이란 단어를 단지 집회의 수위를 가리키는 용어로만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여러분들이 결국 언젠가는 세월호로 인해 가진 분노와 슬픔을 우리 사회 전체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행동으로 옮기리라는 가정 하에, 더 넓은 범위를 염두에 두고 이 글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2. 지금, 어떤 집회가 필요한가
우리가 ㅡ 적어도 우리 중 누군가는, 그리고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ㅡ 행동해야 한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데 현재 시위는, 안전한 시위와 연행될 위험이 존재하는 시위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습니다. 누군가는 우리가 정의를 요구하면서 법을 어긴다면 모순이므로 법을 지키는 한도 내에서 저항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다른 누군가는 그런 시위는 아무런 효과도 없으며, 그건 시위가 아니라 문화제나 다름없고 정작 들어야 할 사람들은 무서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어떤 시위의 방법을 쓰든, 우리는 책임 있는 자들이 우리의 힘을 두려워 할 수 있는 시위를 해야 하겠죠. 그것이 그들에 의해 '불법'이라 규정되든, '합법적'이라 판단되든, 그들이 신경쓰는 시위를 적어도 누군가는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 모든 분노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80년대의 시위는 과연 그 당시에 합법적이었습니까? 우리가 분명 평화로운 시위를 했는데도 불구 저들이 계속 탄압하고, 그 탄압의 강도를 더해간다면, 바로 저들이 두려워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법을 떠나 정말로 효과가 있는 집회의 필연성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시민이라면 법을 어겨서는 안 된다'고, '악법도 법이다'라고 말하는 이들에게, 저는 <시민 불복종>이라는 개념을 내놓으려고 합니다.
<시민의 불복종>. 헨리 데이비드 소로에 의해 쓰인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시민의 불복종에 대한 책입니다. 소로는 노예 제도와 미국-멕시코 전쟁에 도덕적 정당성이 없다고 보았으며, 따라서 이런 정책을 간접적으로 지원하는 행동인 '인두세' 내는 것을 거부하여 감옥에 갔다가 친척이 몰래 대신 세금을 내주어 풀려난 후 이 책을 집필했습니다. 이 사상은 개인적 양심과 보편적 가치를 법률에 위에 놓습니다. 즉, '정부(가 제정한 법률)이 도덕적 정당성을 갖지 못한다면, 시민은 자신의 양심에 따라 그 법률을 위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위키백과의 정의를 가져오면 '시민 불복종 은 국가의 법이나 정부 내지 지배 권력의 명령 등이 부당하다고 판단했을 때, 이를 공개적으로 거부하는 행위를 말한다.' 고 쓰여 있습니다. 실제로 간디는 이 <시민의 불복종>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고, 아마 가장 유명한 시민 불복종 운동일 비폭력 저항 운동을 조직했습니다. 영국이 식민지배를 받던 인도인들의 저항을 막기 위해 제정한 법률을, 정당성이 없다 여기고 그를 어기는 것도 불사함으로써 저항 운동을 이끌어 낸 것이죠. 소로는 말합니다. 속으로만 정부의 정책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무 소용 없다고. 내가 가만히 침묵하고, 정부가 시키는 대로 착하게 따르고 있는 것은 그 정책을 돕고 있는 것이라고. 책에서 발췌한 다음과 같은 말은 그것을 더욱 뚜렷하게 보여줍니다.
"사람 하나라도 부당하게 잡아 가두는 정부 밑에서, 정의로운 사람이 진정 있어야 할 곳은 감옥이다. 소수가 무력한 것은 다수에게 다소곳이 순응하고 있을 때이다. 그러나 소수가 전력을 다하여 막을 때에 그들은 거역할 수 없는 힘을 갖게 된다. 정의로운 사람들을 모두 감옥에 잡아 가두든가, 아니면 전쟁과 노예제도를 포기하든가의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면, 주 정부는 어떤 쪽을 택할지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시민 불복종의 개념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더 자세히 알고 싶으신 분은 엔하위키에도 설명되어 있으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비폭력이라는 선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당방위를 제외하면, 그 어떤 경우라도 폭력이 용납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비폭력이라는 선 아래에서, 자신의 양심이 닿는 한까지는 우린 모든 방법을 강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행동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까 소크라테스의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을 언급했는데, 이 말은 실제로 소크라테스가 한 말이 아니라, 고대 로마의 법률 격언에서 왔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오히려 법 이상의, 자신의 철학적 원칙과 신념에 따라 의사결정을 할 때들이 있었습니다. 마치 <시민 불복종>이 개인의 양심에 따라, 도덕적 정당성에 따라 법을 넘을 수 있다고 선언하는 것과 같이 말입니다.
3.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렇지만 분명한 건 우리가 행동의 반경을 넓힐 수록, 위험의 수준도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법 이상으로 더 나아가기를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거부하실 수 있습니다. 직장이 있고 먹여살릴 가족이 있는데 무조건 나아가라 요구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니까요. 아마 이 때문에 역사적으로 대학생들이 먼저 거리로 나갈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지요. 또 어떤 분들은 시간적으로 함께 거리로 나갈 기회가 없다고 할지도 모릅니다. 괜찮습니다. 거리로 나가는 것만이 저항의 방법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존재하고 있는 그 자리에서, 여러분들이 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만(여러분은 행동하고 싶어하지 않으신 거니까요), 그러나 행동하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여러분들이 서 있는 바로 거기에서 여러분들이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시면 됩니다. 80년대, 쫓기는 대학생들을 가게에 숨겨주고 씻어낼 물을 날라다 준 가게 주인들, 명동성당에서 농성할 때 도시락을 갖다준 분들, 6월 민주항쟁 때 함께 경적을 울려 준 운전자 분들… 그들은 비록 거리로 나오지는 않았으나 함께 저항한 분들입니다. 여러분들은 잘못되어 있다고 생각하면서 왜 당장, 여러분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할지 모르기 때문입니까? 너무 무력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까?
이미 많은 분들이 느끼셨겠지만 이건 결코 진보-보수의 싸움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정상과 비정상, 상식-비상식 간의 싸움입니다. 그 어떤 진정한 보수도 세월호 참사의 과정이, 언론 탄압이, 정부의 부정 선거가 정상적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상식인이라면, 민주주의를 진정으로 받아들인다면 그 어떤 이도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오직 비상식인만이 그렇게 할 뿐입니다. 비록 그 비상식의 힘이 너무 커보여서 무기력하게 느끼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아직도 우리나라에는 상식인이 비상식인보다 훨씬 많다고 저는 믿습니다. 한 10% 정도를 스스로 깨어 있고 남을 깨우치는 탁월한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10%는 비상식인일 것이고, 80%는 아직 어찌할 지 모르는 상식인입니다. 저도, 여러분도 모두 이 80%에 들어 있습니다. 이 80%는 상식인이므로 무엇이 잘못되었고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제대로 된 정보만 있다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이런 정보의 차단을 막기 위해 그토록 진정한 언론의 입을 막고 싶어 하는 것이겠죠). 사실 제가 SNS와 인터넷과 주변에서 끝도 없이 느끼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보가 부족하고 따라서 무언가를 바로잡고자 거리에 나선 사람들에 공감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구호를 외치고 거리로 행진합니다만, 지나가는 사람들은 '왜' 그러는지 알지 못합니다. '왜' 정부가 잘못했는가? '왜' 사람들이 거리로 나서야 하는가? '왜', 대체 '무엇'이 우리나라에 일어나고 있는가? 비상식인들에겐 그 어떤 이야기를 하여도 듣지 않고 바뀌지도 않습니다. 비상식인이니까요. 그러나 국민들, 국민의 대부분, 이 80%에 속하는 상식인들, 그들은 정확한 정보와 설명이 주어지면 함께 저항합니다. '상식'의 편에 섭니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그렇게 부르짖고 거리로 나와 촛불을 켜고 항의하고 연행되어 가는데도 이들의 인식이 바뀌지 않았다면, 그들을 탓할게 아니라 우리를 다시 돌아봐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 감정적으로 치우쳐서, 거리로 나와 뜨겁게 자유를 외치긴 하였으나, 정작 우리와 같은 처지에 있고 우리와 함께 나서야 할 사람들에게 그 이유를 설명하려는 노력은 부족하지 않았습니까? 아니, 어쩌면 우리조차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습니까?
그러니, 거리로 나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고 거리에 나오지 않았더라도 최소한의 상식을 갖추고 저항할 마음을 가지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지금 현 상황에 대한 관심을 잃지 말아주십시오. 정확한 정보를 계속해서 얻으십시오. 그리고 그걸 주변의 다른 사람들에게 제대로 전달해 주십시오. 전단지를 만들어 뿌리고 방송에 나와 이야기하고 인터넷에 글을 퍼나르며 적극적인 메신저 역할을 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적어도 제대로 알고 제대로 말을 하십시오. 그리고 집회자들! 집회에 참가하시는 분들! 집회는 아는 사람들끼리 함께 놀다 오려고 만든 자리가 아님은 물론입니다. 집회시위는 다른 사람들에게 상황을 알리고 그들을 동참하도록 만드는 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집시법에도 시위란 "위력(威力) 또는 기세(氣勢)를 보여, 불특정한 여러 사람의 의견에 영향을 주거나 제압(制壓)을 가하는 행위"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이번에 베를린에서 해외 동포들이 세월호 추모 집회를 할 때, 전단지 400장을 만들었는데 모두 동이 났다고 합니다. 물론 그 400장은 시위를 지켜보고 있던 독일 사람들에게 나눠지는 것이었습니다. 주변에게 알리는 목적이 없는 집회는 집회가 아니라 문화제입니다. 문화제에는 의견이 일치하는 사람들이 모여 서로 이야기를 하다 갑니다. 집회는 어떤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주변 사람들에게 우리를 봐 달라고, 우리 의견을 들어달라고, 그리고 우리 의견이 타당하면 함께 하자고 말하기 위해 모입니다. 우리는 여태까지 시위를 했습니까? 아니면 그저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 촛불을 밝히고 걷다 가는 문화제였습니까?
너무 글이 길어진 것 같습니다. 사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미 나눴듯이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지금 함께 행동하거나 행동하려는 마음을 가진 분들, 그리고 사정상 행동하지 못하더라도 같은 뜻을 가진 분들이 더 이상 나눠지지 말고 함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렸듯, 여러분이 박근혜 퇴진이란 구호를 외치든 박근혜 책임이란 구호를 외치든 결국은 이어져 있으며, 어느 하나가 먼저 해결되어야 하느냐의 차이일 뿐 둘 다 해결해야 하는 문제인 것입니다.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끼리, 안그래도 더욱 뭉쳐서 싸워야 할 판에(저들은 이미 단단히 뭉쳐 있으니까요), 서로 나눠집니까? 둘째로는 <시민 불복종>의 이름 아래 행동하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비폭력이라는 선 안에서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부정을 전부 파헤치기 위해 끝까지 가야 합니다. 정말로 효과가 있는, 그래서 설령 더욱 탄압받을 지라도 정말로 효과가 있는 그런 방법을 써야 하고, 그것은 전적으로 타당합니다. 저는 '모든' 분들에게 이런 불복종을 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마 '우리 중 누군가가' 그런 불복종을 행할 것입니다. 그러나 개인적인 사정으로 그 불복종을 할 수 없는 여러분들은, 적어도 그 '불복종자'들을 음해하고 비난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지난 5월 17일 청와대로 간 몇 백명의 시민들 중 115명이 연행되었습니다. 이 때, '청와대로 가자'고 한 분들을 오유에서도 많이 비난했던 것으로 압니다. 사실 그 비난은 타당합니다. 왜냐면 그 중에서는 자신이 청와대로 가는 것도 모르고 그저 따라가다가 붙잡힌 분들도 계시기 때문이죠. 그러나 그 중에서 정말로 자기의 양심에 따라, 연행도 불사하고 청와대로 가기로 마음먹고 앞섰던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런 분들을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응원하고 곁을 지키진 못할 망정 돌을 던져선 안됩니다. 그 분들이야말로 아마, 양심에 무언가 찔리는 사람들이 제일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존재일 테니까요. 마지막으로, 우리는 제대로 된 정보를 알려야 할 의무도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집회는 뜻이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행진만 하고 오는 행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집회는 법 말마따나 "위력 또는 기세를 보여, 불특정한 여러 사람의 의견에 영향을 주거나 제압을 가하는 행위"입니다. 집회는 '그 집회에 참여한 사람들'이 대상이 아니라, '그 집회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대상입니다. 집회가 끝난 후 질문 시간을 갖는 경우도 볼 수 있는데, 이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아니, 그런 집회가 바람직한 집회입니다. 그러니 집회에 참여하든, 참여하지 않든, 우리는 정확한 정보를 알고 그 정보를 80%의 상식인들에게 전달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실제로 제일 중요한 겁니다.
저도 사실 이 글을 왜 작성하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멋부리고 싶은 마음도 아니고 제가 뭐 특별히 잘난 것도 아닌데요. 제가 쓴 이 말들을 제가 직접 실천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무안할 지경이고, 저도 정확히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헤메고 있고, 제가 정확한 정보를 알고 갖고 있다고 말할 수도 없는 상황인데요. 그래도 써야 할 것 같았습니다. 적어도 제가 생각한 걸 알려야 할 것 같았습니다. 부족한데 길기만 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소로의 말을 하나 더 인용하자면, 소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온몸으로 투표하라. 단지 한 조각의 종이가 아니라 당신의 영향력 전부를 던져라. 소수가 무력한 것은 다수에게 다소곳이 순응하고 있을 때이다. 그때는 이미 소수라고도 할 수 없다.
그러나 소수가 전력을 다해 막을 때 거역할 수 없는 힘을 갖게 된다."
저는 학교에서 다수결의 원칙을 배웠습니다. 다수결의 원칙에, 소수 의견 존중을 약간 곁들이듯이 배웠습니다. 그래서 점점 다수의 의견은 절대적이며, 다수에만 정당성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 말을 들었을 때, 저는 '다수결의 의견'에 곁들인 소수 의견 존중이 아니라, '소수의 양심'을 따라가는 '다수의 의견'임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배운 여성 인권 운동, 흑인 인권 운동, 그 외 여러 운동들, 처음에는 소수 운동이었습니다. '소수의 양심'에서 비롯된 저항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소수가 그저 현실에 순응하지 않고 자기 의견을 굽히지 않고 전력을 다해 저항하였을 때 다수는 그 소리를 들었고, 그 양심이 외침을 들었고, 소수의 양심은 다수의 양심이 되어 지금은 너무나 당연한 우리의 권리가 되었습니다.
너무 막막해보여서, 너무 무기력해서, 자기도 모르게 다수에 순응하고 싶을 때 양심을 되돌아 보십시오. 그 양심이, '이 길이 옳다!'라고 말하고 있다면, 거역하지 마세요. 정말로 강력한 것은 굽히지 않는 그 소수의 양심입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