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
그는 의인이자 부자였다.
신 앞에 떳떳했고 사람들 앞에 겸손했다.
하지만 어느날 갑자기 자신의 전 재산과 모든 자식들을 잃어버리고, 몸은 욕창에 걸려 더러워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아내는 그런 그의 모습에 넌더리를 내며 떠나 버렸다.
그 소식을 듣고 찾아온 친구들은 욥이 신 앞에 잘못했기에 벌을 받은 것이라며 그에게 회개하라고 다그쳤다.
그는 억울했을 것이다.
자신은 신 앞에 잘못한 것이 없었다. 사람들에게 해를 끼친적도 없었다.
그는 강력하게 자신의 무고를 주장하고 억울함을 토로했다.
하지만 그의 친구들은 그를 믿지 않았다.
언젠가 어디선가 너 자신이 기억하지도 못한 시간과 장소에서 넌 잘못을 저질렀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왜 이런 고통을 받겠니?
마음 속 깊숙한 곳에 숨기지 말고, 사람들 앞에 고백하고 회개하라.
그리하면 신이 너를 구원하리라...
욥의 이야기에는 많은 상징과 은유가 들어있다.
재산과 자식을 잃은 슬픔, 몸이 겪어내야 하는 고통, 사랑했던 아내가 떠난 후의 고독, 믿었던 친구들이 오히려 자신을 질책하는 억울함...
그러면서 슬금슬금 이런 생각을 들게 한다.
과연 신은 존재하는가?
과연 존재한다면 왜 인간의 슬픔과 고통에 나몰라라 하는가?
그럴 거면 왜 인간을 만들었는가?
이거 처음부터 신이 없었던 게 아닐까?
욥의 이야기 마지막에 서로 설전을 벌이는 욥과 친구들 앞에 신이 나타나 일갈하는 장면은 이에 대한 신학적인 답이라 할 수 있다.
니들이 도대체 나에 대해 뭘 아느냐? 내가 이 세계를 만든 이유, 니들을 만든 이유나 아느냐?
내가 그걸 니들한테 말해줄 의무라도 있느냐?
니들의 생로병사 희노애락은 다 내 손안에 있다.
재산을 잃었으니, 자식을 잃었으니, 아내를 잃었으니, 친구를 잃었으니
니가 죄를 지은거고, 죄를 지은거니 벌을 받은 거라고?
원인과 결과의 인과율? 그따구 순환논리에 내가 얽매여야 하나?
니가 죄를 지었다고 내가 기계처럼 널 벌줘야 하나?
니가 덕을 쌓았다고 내가 로봇처럼 널 부자로 만들어줘야 하나?
다 내맘대로다.
내가 짱이다.
내가 짱인 세상에 니들을 만들고 살게 해주었느니 그저 감사해라.
슬플 때나 기쁠 때나, 고통스러울 때나 괴로울 때나 쉬지 말고 감사해라.
넌 그러라고 만든 거다.
(음...멋지다. 신이라면 이정도 스케일은 되야지... 메트릭스에 따라 사는 센님 같은 신이라면 왠지 김빠지지 않겠나?)
돌아보면, 이 모든 일의 발단은 악마가 신에게 찾아가 욥을 거론하며 내기를 벌였기 때문이다.
욥에게 닥친 불행은 그가 원해서 된 것도, 권선징악이나 인과응보 때문도 아니었다.
욥과 아무런 상관도 없이 욥은 그저 당했던 것이다.
불교가 공수래 공수거라면 기독교는 신수래 신수거다.
모든 것이 신으로 시작해 신으로 끝난다.
무신론은 아마 이 때문에 종교가 싫을 게다. 내가 주인이 아니라니... 내가 누굴 섬겨야 한다니...
하지만 라캉이 말하듯 나는 내가 아니다. 어차피 나도 나의 주인일 수는 없는 게다.
하긴... 신을 믿든 안믿든 무슨상관인가?
인간은 신을 믿던지 안믿던지 상관없이 자신이 서 있는 곳에서 자신을 중심으로 자신만의 진리, 자신만의 기준을 만들어내고 그에 맞춰 살아간다.
내가 잘했으니 성공하고 내가 못했으니 실패했다고 믿으며 살아간다.
신과 상관없이 자신만의 진리와 기준을 가지고 거기에 맞춰 길흉화복을 따지고 있는 게다.
프로타고라스가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고 말하기 전부터 인간은 언제나 자신을 중심으로 살아왔다.
오죽하면 예수가 세상에 와서 한 일이 인간들이 신의 이름으로 만들어낸 계율들부터 폐기하는 일이었겠는가?
우리는 그렇게 우리만의 우물 속에 들어앉아 부처님 손바닥 안의 손오공처럼 살아가고 있다.
(인본주의자는 둘로 구분되어야 한다.
신의 이름이라도 내세워 자신이 세상의 주인이 되려는 자와,
미욱하고 나약한 자기자신과 마주해 인간으로서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려는 자)
욥의 이야기는 우리가, 즉 인간이 이 세계의 중심인가? 기준인가를 묻고 있다.
우리가 믿고 있는 인과응보, 원인과 결과의 인과율이 과연 합당한가? 당위적인가? 절대적인가?를 묻고 있다.
우리가 만들어낸 우리의 문명, 지식에 대한 한없는 신뢰... 그 오만함을 내려놓으라는 거다.
물론 그 다음에는 우리의 주인인 신을 섬기라는 거지만...
여기서 신이 있네 없네를 따지지는 말자.
진정한 인본주의자라면, 인간의 한계를 아는자라면, 그는 이에 대한 답을 유보할 수밖에 없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절대적으로 믿을 수 있는 것,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불가지론도 믿음의 한 형태 아니냐는 어이없는 반문은 하지말자. 불가지론은 그저 솔직해지려는 태도일 뿐이다.)
당신들 중 신을 만나본 적 있는가?
맘 속으로 느꼈어요... 기도했더니 필요한게 해결되었어요 식의 자기최면술 같은 만남 말고, 객관적인 만남 말이다.
내가 알기로는 확인컨데 결코 없다.
신은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신문이나 잡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카메라나 마이크 앞에 서서 인터뷰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신의 부재를 증명하지 못하는 이상, 인간이 완벽해지지 못하는 이상... 신이 없다고도 확신할 수 없다.
인간을 뛰어넘는 존재가 인간이 싫어져서 안 만나주는 건지도 모르지 않는가?
나를 뛰어넘는 존재가 있네 없네를 (그를 뛰어넘을 수 없는) 내가 증명한다는 건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우리의 능력으로는 영원히 그 답을 알 수 없는 거다.
그럼에도 신의 부재를 주장하는 무신론은 또다른 믿음, 즉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믿음에 불과하다.
신의 부재를 증명하지 못하는 주장은 가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과학적을 입증되었다고 믿는 사람에게는 과학의 한계를 상기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욥의 이야기는 신학적 관점이 다다를 수 있는 궁극의 지점이지만, 솔직히 신에 대한 믿음을 약화시킨다.
내가 잘하든 못하든, 내가 무엇을 원하든 원하지 않든 신의 뜻대로라면,
신의 뜻에 따라 성공할 수도 실패할 수도, 기쁠 수도 슬플 수도 있다면,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면 굳이 뭘 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그렇다. 나도 나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내맘대로 할 수 없는 것에는 관심없는 평범한 사람에 불과하다.)
물론 좋은 점도 있다.
사업 잘 되게 해주세요. 아들 병 낫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다
사업 실패하고 아들 잃으면 신을 저주하고 떠나는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되는데, 그런 헛짓은 하지 않게 된다.
바라는 게 없으니 실망할 일도 없는 게다.
하지만
사람이 사는데 바라는 게 아예 없을 리는 없다.
나도 지금 당장이라도 울며불며 매달리고 싶은게 한 둘이 아니다. 살기 졸라 힘들다.
그러나 신을 본적도 없는데... 그저 존재하게 해 준거 자체로 감사하라는 말도 믿기 힘들기는 마찬가지인지라
그저 지금처럼 미적미적 지내게 된다.
바라는건 많지만 믿지는 못하는 거다.
그래서인지 되면 좋고 아님 말고 정도로 지내게 된다. 늘 불안해하고, 신경만 곤두선채로 말이다.
하지만 후회스럽진 안다. 믿음이란 것에 날 내던지지 않고 내 정신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하고 있지 않은가?
사실 믿을 만한 근거도 없이 신을 믿고 찬양하라는 말... 그건 말 정말 그대로 '믿음'이다.
확신할 수 없는 곳에 나를 던지는 일이다. 신학적으로 말하는 기적에 가까운 일일 게다.
그건 지가 하고 싶어야 할 수 있는 일이지, 누가 옆에서 뭐란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래서 오늘도 교회 한 자락에서 졸다가 돌아왔다.
혹시 모르니 천국 한 귀퉁이에 거적대기라고 펴고 눕자는 심보인 게다.
어느 소심한 불가지론자의 일요일이 또 이렇게 흘러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