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9일, 어느 해나 다름없는 8월 29일이 되었다. 8월 29일을 제대로 기억하는 분은 얼마나 될까? 바로 오늘이 어떤 날인가를 기억하는 분이 얼마나 될지 헤아려보지 않았고 통계도 내보지 않았으며, 표본 추출도 하지 않았으니 정확한 해답을 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달력에도 표기가 없고 일반 시중의 수첩에도 대체로 기재가 없는 것은 현대사회가 바쁘게 돌아가다 보니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치욕의 날을 되새겨 보고 싶지 않은 탓인지 모른다.
[편집자주] 본 캐스트에 사용된 한일 합방, 한일 합병 등의 용어는 일제가 조선의 국권을 침탈하면서 자신들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사용한 말이며, 경술국치, 일제강점기가 올바른 표현입니다. 과거 신문 기사에 해당 용어가 사용되었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인용된 점 미리 양해 부탁드립니다.
경술국치, 치욕의 사건
한일 합방 때 친일파 매수 전문 공개 한일합방 당시 일본의 친일파 매수과정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조선 통감부와 일본정부 간에 오고 간 전문 290통이 공개됐다. 일본국립공문서관에서 입수한 마사타케 통감과 다로 총리대신이 한일합방과 관련 주고받은 전문 가운데는 순종에게 한일합방조약 서명을 강요한 윤덕영의 매수과정을 나타내는 내용이 들어 있다. 데라우치 통감이 내각 총리 대신에게 보낸 8월 20, 21일자 전문에는 순종의 계비 윤씨의 백부이자 시종원경의 직위에 있는 윤덕영에게 50만원을 지급한다는 내용과 협력자들에 대해 3천만원의 범위 내에서 임시 은사금을..
국치일에 공개된 치욕의 탁자 한일 합방조약이 이루어진 구 통감부 회의실에 놓였던 탁자, 의자 등 비품이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입수, 국치일인 29일 상오 공개됐다. 1910년 8월 22일 대한제국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과 일제통감 데라우찌 사이에 이루어진 한일 합방조약은 이날 공개된 탁자 위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나라를 빼앗긴 설움을 다시 한번 새롭게 했다. 이날 공개된 비품은 조약을 서명한 가로88㎝ 세로1백28㎝ 크기의 탁자 1개와 대형 소파 2개, 소형 의자 5개, 찬장, 테이블 위 천장에 달려있던 전등 유리 갓 등이다. 기사원문: 1977. 8. 29 [경향신문]
'한일병합 무효' 증명할 사료들
을사조약은 한·일 국왕 비준 없었다 제국주의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 한국을 반식민지화 한 을사5조약이 고종의 비준도 없는 국제법상 불법 조약이었음이 확인됐다. 한국독립운동사를 정리중인 윤병석 교수(인하대)는 지난 1월말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이 공개한 을사5조약 일건문서를 조사한 결과 대한제국을 일본보호국으로 전락시킨 을사5조약은 친일주구였던 박제순(외부대신)과 일본특명전권대사 임권조의 도장만이 찍힌 한문과 일문으로 된 2통의 문서만이 있을 뿐 고종과 목인(일본천황)이 이 조약을 인정한 비준서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기사원문: 1984. 2. 13 [경향신문]
"을사조약 무효" 고종 친서 발견 1905년 대한제국과 일본 간의 을사보호조약은 국제법적으로 무효임을 선언한 고종 황제의 친서가 작성된지 87년만에 처음으로 미국 뉴욕 컬럼비아대학의 귀중도서 및 수고 도서관에서 발견됐다. 가로 30㎝ 세로40㎝ 정도 크기의 이 고종 친서는 을사보호조약이 강제 체결된 지 7개월 뒤인 1906년 6월 22일에 일본과 청국을 제외한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오스트리아 헝가리 이탈리아 벨기에 등9개국 국가 원수들에게 발송하기 위해 작성된 것으로 최근 서울대 김기석 교수 에 의해 발굴됐다. 기사원문: 1993. 10. 24 [동아일보]
순종 황제 칙유 조작 가능성 한일합방의 불가피성을 간곡한 문체로 표현한 순종황제의 칙유와 합방의 정당성을 강변하고 있는 데라우치 총독의 유고는 양태진씨가 최근 발견.. (중략) 특히 순종황제의 칙유는 전통 한지가 아닌 일본식 양지에 목판본으로 찍어 옥새를 날인한 것으로 일인들의 조작 가능성이 높다는게 양씨의 지적이다. 양씨에 따르면 을사오적을 비롯한 합방지지세력과 일본인들이 순종황제를 위협, 자신들이 작성한 포고문에 옥새를 찍게했거나 아니면 옥새를위조해 칙유자체를 조작했을것으로 판단하고있다.
[1995 무라야마 회담] 日총리「침략」인정 일본의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는 15일 종전 50주년에 즈음한 특별담화를 발표,일본의 전쟁이「침략」이었음을 공식 인정하고「통절한 반성의 뜻」을 표명했다. 일본의 총리가 각의결정 형식을 거쳐「침략」이라고 명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무라야마 총리는 "한 시기 국가 정책을 그르쳐 전쟁에의 길을 걷고 국민을 존망의 위기에 빠뜨려 식민지 지배와 침략에 의해 많은 나라, 특히 아시아 여러 나라 분들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다"고 말했다.
[1995 에토장관 망언] 일 각료 또 과거사 망언 무라야마 도미이치 일본총리의 한일합방 관련 발언 파문이 미해결상태로 남아있는 가운데 현직 각료인 에토 다카미 총무처장관이 "식민 시대에 일본이 한국에 좋은 일도 했다" 는 등 과거사 관련 망언을 한 사실이 7일 밝혀졌다. 자민당 출신인 에토장관은 무라야마총리의 발언 파문이 한창 진행되던 지난 10월 11일 기자간담회에서 "한일합방은 강제적인 것으로 무라야마총리의 발언은 잘못된 것"이라고 전제한 뒤 "한일합방을 무효라고 말하기 시작한다면 국제 협정은 성립되지 않는다. 당시 나라가 약해서 당했던 때인만큼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한 것으로 확인됐다.
간 나오토 총리는 각료회의 의결을 거친 이날 담화에서 "100년 전 8월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어 이후 36년에 걸친 식민지 지배가 시작됐다"며 "3·1운동 등의 격렬한 저항에서도 나타났듯이 정치·군사적 배경하에 당시 한국인들은 그 뜻에 반하여 이루어진 식민지 지배에 의해 국가와 문화를 빼앗기고 민족의 자긍심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고 밝혔다. 기사원문: 2010. 8. 11 [동아일보]
청산되지 않은 '친일파' 문제
해방~6공 변신의 명수 "생존 친일파 2500명" '베일 속의 행적' 추적 '옐로 카드' 작성 중. 조선총독부 관보 등 자료기준. 반민족연, '인명사전' 발간 추진 문인·학자·의원에서 역대 대통령까지…
백범 김구선생 암살범 안두희씨(75)가 자신의 배후를 자백하는데만 무려 43년이라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오랜 침묵을 깬 그의 증언조차 위증 투성이라는 사실이 하나하나 드러나고 있다. 암살범 안씨의 배후에 거대한 친일세력이 자리잡고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그 명백한 실체는 아직도 베일속에 가려져 있는 것이 '해방 후 47년'이 지난 오늘의 현실인 것이다. 기사원문: 1992. 4. 25 [경향신문]
"이완용, 말년엔 독립 투사 체포 앞장" 매국노 이완용이 말년에는 독립투사에 대한 변절권고와 일제 경찰의 독립군 투사 생포에도 앞장섰음이 밝혀져 그 악명을 더하고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은 29일 국치일을 맞아 을사오적 신의 괴수 이완용이 광복군 총영장으로 일경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독립투사 오동진 장군의 회유를 음모한 편지를 공개했다. 문제의 편지는 구한말 격동하는 국내외 정세 변화 속에서 친노·친일파로 변신을 거듭하며 나라까지 팔아먹은 이완용이 죽기 1년전에 만주 안동에 거주하던 백성경에게 보낸것으로 오동진 장군과 그 휘하 독립군의 일본 투항을 모의한 내용을 담고있다. 기사원문: 1977. 8. 29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