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친 자와 다이아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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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한 마법부여로도 할 수 있는 일은 무궁무진하다. 나는 내 말을 분석해 자동으로 글씨가 써지는 마법을 내 일지에 걸어두었다. 다음에 내가 거기에 대고 말할 땐 알아서 그 문자가 저 먼 곳에 있는 트와일라잇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복잡한 절차 없이 딱 한 가지 마법만 걸어두었는데도 말이다.
.. 생각해보니 그다지 머나먼 곳은 아니군. 캔털롯은 숲에서 별로 떨어지지도 않은 곳에 있었다. 그저 숲과 산에 가려서... 솔직히 말하자면 숲과 산은 경사나 험준함만으로 따져봤을 때 별로 방해는 되지 않았다. 그 안에 들어가 있는 것들이 문제였었지. 본론으로 돌아가서 여기에서 캔털롯은 맑은 날씨에 숲 경계선 쪽에 나가서 보면 거기서 제일 높은 첨탑이 선선히 보일 정도로 가까운 곳에 있었다.
"언니가 전에 말씀하신대로 해 봤는데요."
트와일라잇이 말했다. 따지고 보면 '트와일라잇이 글을 썼다' 고 해야 맞는 말이겠지만, 사실 이제는 그냥 말을 했다라고 해도 상관없을 것이다. 내가 걸어둔 마법은 그 역으로도 작용했으므로, 트와일라잇이 일지에 필기를 해서 내게 전달될 때마다 음성이 나왔던 것이다. 아직 트와일라잇의 목소리는 몰랐으므로 그냥 내 목소리를 썼다.
처음엔 그냥 쌍방향 음성 통신 마법을 뚫어보려고 했었으나, 그러려면 환영마법에 엄청난 조예가 필요했던 고로, 이정도로 만족하기로 했다.
"그래. 그게 막 폭발하진 않던?"
나는 트와일라잇에게 간단한 주문에 추가 마력을 불어넣어 증폭하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전에 세워둔 가설과 도서관에서 발견한 클로버 필사본(클로버는 저명한 고대의 마법사로, 복잡한 주문에 의지하기보단 여러 가지 기본 주문들을 확대 응용하는 방법을 발견해낸 걸로 유명하다. 당대에서 제일가는 마법사를 뽑자면 꼭 들어가는 마법사중 하나다) 을 참고하여 발전시킨 나만의 비법이었다. 하지만 주문이 간단하다고 꼭 증폭이 쉽지만은 않았다. 마력을 높게 부여하면 부여할수록, 원래 주문 대신 화염구급의 폭발이 일어날 확률도 높았기 때문이었다.
"아뇨.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주문을 안정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마력은 5퍼센트 정도만 더 부여했으니까요."
나는 인상을 구기고는 방 저편에 있는 책을 보며 말했다.
"겨우 5퍼센트?"
나는 머릿속으로 계산을 해 보았다. 그런지 마법 이론이나 계산에 관해선 그다지 빠삭하지는 않았다. 차라리 트와일라잇이 그 쪽에 관해서는 나보다 더 밝았고, 그건 2년간의 펜팔을 통해 검증된 사실이었다. 하지만 트와일라잇이 이론파라면 나는 실전파였다. 백독이 불여일행. 이게 내 마생 모토였다.
"참 나. 그렇게 코딱지같이 마력을 넣어서 뭘 하려구! 50에서 60퍼센트 정도 넣어도 괜찮다고 내가 분명 이야기 했잖아!"
"더 이상 넣기가 좀 그런걸요. 안전하지가 않잖아요."
안전 따위가 어쩌고 저째? 나는 지금 읽고 있었던 책을 덮었다.
"트와일라잇. 내가 누누히 말하는데.. 네가 지금 네 한계까지 밀어붙이지 않는다면 네 한계를 알아낼 수도 없고 결코 그걸 초월할 수도 없다니까.."
나는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내가 네 나이였을 땐 어땠는지 알아? 공주가 날 산에 데려가서는 주문을 안전하게 다루는 법을 빡세게 훈련시켰다고.."
'내가 네 나이였을떈..'무슨 꼬부랑 노마가 왕년자랑 하는 것도 아니고.. 나는 지금까지 옆에 쌓아왔던 책들을 마력으로 집어 들었다. 바로바로 치우기가 귀찮았던 것이다. 외딴 곳에서 혼자 살면 누구나 기벽이 하나쯤은 생기게 된다.
"공주님 하니까 생각났는데, 공주님이 새들 아라비아를 외교 차 방문하실 일이 생기셨더라고요."
무뚝뚝하고 억양 없는 목소리가 아무리 내 목소리라지만 영 거슬린다. 다양한 억양이 나오도록 주문을 좀 조정해야 되려나..
"그래서 공주님이 제게 휴가를 주신다고 계속 그러시더라구요. 그래서 기왕 나온 김에 휴가 때 언니를 직접 보러 좀 가보려구요."
의외의 폭탄선언에 나는 들고 있던 책무더기를 깡그리 놓쳤고 그 아래 깔려버렸다. 허우적거리면서 나는 큰 소리로 외쳤다..
"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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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풋! 글믄 결국 오라고 하신 겁니꺼?"
애플잭이 코웃음 치며 하는 말에, 나는 골을 내면서 루퍼트인지 제카네이프인지 라고 이름이 붙여진 사과나무에 몸을 기댔다. 아. 이름은 내가 붙인 거 아니다. 화염술사는 불 잘 붙는 물건에 정을 붙여서는 안 되는 법이다.
"들어봐. 내가 진짜 거절을 할 수가 없었다니까."
나는 애플잭을 도와 헛간에 수레를 마력으로 밀어 넣으며 말했다. 사과랑 연관 안 된 그냥 힘든 일은 마력을 써도 별 상관없는 모양이었다. 마력으로 사과를 따 준다고 했을 땐 지 사과에 마법 건다고 눈치를 줬던 주제에...
"아주 오려고 처음부터 작정을 한 모양이더라. 아예 계획표 사본까지 떼서 내게 보내주더라니까?"
"언니, 언니.. 마녀 치고는 아들에게 억수로 잘해주는 거 아입니꺼?"
절반 정도만 사실이었다. 애플블룸이 나한테 염동력으로 날마차를 태워달라고 했을 때나 사과 맛을 초콜릿 케익 맛으로 바꿔달라고 했을 땐 딱 잘라 거절했었으니까.
"혹시 좋은 말로 꼬셔다가 잡아서 구워 묵을라고 하는 거 아입니꺼?"
나는 인상을 살짝 구겼다.
"뭐? 망아지 잡아먹고 싶으면 굳이 그럴 필요 없이 저기 애플블룸을 잡아먹으면 되는데. 마침 내 가마솥 사이즈에도 딱 맞게 자랐겠다."
"모.. 정 언니가 드시고 싶다니 드리기는 드리겠는데예...쁠룸이 쟈는 묵을만한게 못 될낍니더. 배탈 심하게 나실텐데예."
나는 그 농담에 실없이 웃고 말았다.
"하.. 네 손님 대접은 정말 알아 줘야겠네.. 그래서 말인데.."
발굽을 살짝 흔들며 나는 말을 이었다.
"그 손님 대접 말인데.. 어떻게 하는 건지 좀 알려줬으면 좋겠는걸. 그러니까... 오래된 성의 폐허에서 같이 즐겁고 보람찬 시간을 보내는 방법이라던가.."
"흠.. 뭐니 뭐니 해도 손님맞이엔 일단 첫인상이 중요한거 아입니꺼? 일단 진흙탕에 구른 것 같은 그 꼴부터 좀 정돈하는 게 좋겠심더. 마을에 웬 암말 하나가 마을에 패션숍인지 뭐시깽인지를 열었다는데, 망토 하나 새로 장만할 겸 해서 가보시는 게 어떻겠심꺼? 언니 망토가 아주 울 할매 걸레짝처럼 생겨서 하는 말입니더."
나는 내 망토를 내려다보았다. 원래 검은색이었던 망토는 거의 회색에서 먼지 묻은 갈색으로 색이 탈색되고 있었고, 스미스 할머니의 반짇고리에서 아무렇게나 꺼낸 각종 색깔의 실로 누덕누덕 수선이 되어 있어서 분명 영 좋지 않은 꼴이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입어왔던 옷이었고, 이 망토를 걸칠 때가 제일 편했다.... 물론 적당한 다른 옷이 아예 없었기도 했거니와...
"흠... 돈도 좀 남아있겠다....."
숲에서 사냥과 채집 생활을 해 먹고 살았기 때문에 돈은 거의 쓸 일이 없었다. 셀레스티아가 준 절연금이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있으니까 말 다했지. 그래. 전에 내가 추적 마법을 해제한 그 돈들 말이다.
"좋아. 거기가 어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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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이 옷가게라기 보단 무슨 치렁치렁하게 장식된 놀이공원 놀이기구처럼 생겨먹었던 탓에, 나 혼자 정보 없이 찾았으면 절대 못 찾을 뻔 했다. 회전목마라.. 설마 무슨 본디지 의상 같은 걸 취급하는 곳은 아니겠지.. 나는 트와일라잇에게 멋지게 보이고 싶었지(혹은 최소한 그냥 길거리 노숙자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을 뿐이지.)성적으로 유혹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설마 무슨 본디지 의상 같은 걸 취급하는 곳은 아니겠지.. 나는 트와일라잇에게 멋지게 보이고 싶었지(혹은 최소한 그냥 길거리 노숙자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을 뿐이지.)성적으로 유혹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나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의상실의 문을 두드렸다. 두드리자마자 동시에 문이 파란색 마력으로 열리더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순식간에 가게 안으로 끌려 들어가고 있었다.
흰색 털가죽의 유니콘이 재깍 내 앞으로 달려왔다. 아마도 손님이 들어오기만을 바라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 흥미롭군..
"회전목마 의상실에 온 걸 환영합니다! 시크하고, 유니크하고, 매그니피크한 의상들만 전문으로 취급하는 곳이죠!"
강한 캔털롯 억양이라.. 좋지 않았다. 만약에 진짜배기 캔털롯 출생이라면 내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언제까지나 진짜였을 때 이야기다. 저 포니가 억지로 고고한 캔털롯 억양을 쓰는 것을 나는 간파할 수 있었다.
"그..그래?... 저기.. 내가 필요한 게-"
"헉?!"
그 유니콘은 내 구질구질한 행색을 보고 꽤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어머! 자기! 망토가 대체 왜 이 모양이에요?"
내가 망토에 대해 뭐라고 설명하기도 전에, 그 유니콘은 내 망토를 훌러덩 벗겨버렸다.
"도대체 그동안 무슨 일을 당했기에.."
그러더니 채간 망토를 조명이 달린 거울 쪽에 요리조리 비춰보기 시작했다.
나는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6년간 숲속에서 지냈다 왜? 그리고 말 좀 가려해줄래? 물론 무지 낡았긴 한데, 나한테는 소중한 의미가 담긴 옷이거든 그거?"
그 유니콘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죄.. 죄송해요. "
내 망토를 내려놓으며 유니콘은 말을 이었다.
"혹시 수선하시려고 온 건가요? 어쩌지..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겠는데요.. 물론 떨어진 곳을 꿰매고 다시 염색할 수도 있긴 하지만.. 처음처럼 되돌리기는 살짝 힘들겠는데요 이거.."
"그럴 줄 알았지... 수선도 수선이지만, 하나 더 새로 장만해볼 생각인데.."
흰색 유니콘은 내 갈기를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간간히 내 얼굴에 난 흉터도 곁눈질로 보는 것 같았다.
"다른 부분도 좀 관리를 하셔야겠네요. 세상에.. 제 학교 동창인 과수원 하는 포니보다도 더 꼬질꼬질하신데.."
"설마 애플잭 말하는 거야? 하긴.. 비슷한 나이또래로 보이더라...."
"걔랑 아는 사이였어요?"
그 유니콘은 놀란 눈치였다.
"걔가 제 말 많이 해요? 물론 그렇겠죠! 저 래리티를 한 번 보고 잊어버릴 포니는 아무도 없을 테니까요! 저는 학교에서 가장 눈부시게 아름답고 스타일리쉬한 포니였거든요!"
".........대충 비슷해. 애초에 여긴 걔 추천 때문에 여기 온 거였으니까.."
그 말을 듣자 래리티는 매우 기뻐하는 것 같았다. 그 '가짜'캔털롯 억양만 제외하면 예전에 내가 다녔던 자질 있는 유니콘을 위한 학교의 학생들은 보는 것 같아 기분이 좀 그랬다. 칭찬에 목을 매는데다가 관심병 기질이라니... 하긴, 나도 쟤 나이 때는 그랬었으니 일종의 동족 혐오일는지도 모르겠다.
"걔가 웬일로 딱 맞는 추천을 했네요!"
래리티가 내 주변을 방방 뛰어다니며 말했다.
"자. 그나저나 뭐 하러 오셨나요? 기능성을 살린 옷이 필요하신가요?"
"그게..."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거 영 어색하구만.. 하지만 애플잭이 전에 나한테 원하는 게 있으면 에둘러 말하기보단 그냥 있는 데로 말하는 게 좋다는 조언을 해 준 바가 있었다.
"펜팔로 사귄 친구가 있는데 말야. 이번이 처음으로 직접 만나는 거거든? 좋은 첫 인상을 주고 싶어서 그런데 해줄 수 있겠어?"
래리티의 눈이 심상치 않게 희번뜩거렸다. 무서울 정도였다. 마치 먹이를 노리는 매의 눈빛과 비슷했다고나 할까.
"옷뿐만 아니라 몸단장도 좀 하셔야 겠는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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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캔털롯에서 자라났다. 과장 좀 보태서 밖에 나가면 한 10초 만에 귀족을 볼 수 있는 곳이었다. 그곳의 귀족들은 갈기와 털가죽, 발굽과 뿔을 관리하기 위해 온갖 패션 상품들을 개발했다. 그리고 나는 소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포니'의 문하에 있었던지라, 공주가 고용한 관리사들에게 여러 가지 메이크업용 용품들로 관리를 받아 본 적이 꽤 있었다.
하지만... 세상에, 그 셀레스티아의 관리사들이 쌓아놓은 다채로운 패션 용품들이 초라하게 보이는 날이 다 올 줄이야..
"자! 이 제품을 쓰면 금방 갈기에 탄력이 되살아날 거예요!"
내 의견은 물어보지도 않고 래리티는 막무가내로 나를 샤워실로 끌고 가 내 갈기를 감겨주고 있었다. 난 그냥 그대로 두기로 했다. 래리티는 뻐기는 것만큼이나 실력은 있어보였고, 그리고 글쎄.. 오랜만에 관리를 받는 것도 기분이 썩 괜찮았기 때문이었다고 말해두자.
"뜨거운 물로 씻는 것도 오랜만인걸."
래리티는 비누거품이 인 물로 내 얼굴을 씻겨주고 있었다. 그거 진짜 기분이 매우 매우 좋았다. 씻은 물이 시커먼 구정물이 된 탓에 물을 한번 갈아야했는데도 나는 마냥 기분이 좋았다. 털 관리가 귀찮아서 안 한지가 좀.... 아니 꽤 됐었던 모양이다.
"어유 언니. 갈기도 좀 잘라야겠고, 발굽 주변에 수북이 난 털도 좀 정리를 해야 되겠네요. 언니 완전 숫말처럼 보여요 지금."
"나름대로 야성미가 있어서 좋지 않아? 그나저나 날 보면 거기부터 먼저 볼 포니는 없을 텐데."
"그렇겠네요. 언니의 강렬한 눈빛도 눈빛이지만, 갈기 색도 진짜 멋지니까요!... 아까처럼 먼지투성이만 아니라면 말이지만.."
래리티는 발굽으로 내 두피를 마사지하고 있었다.
"저기.. 내가 뻔히 내 몸의 흉터 말한 거라는 거 잘 알고는 있지?"
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벌써 6년이 지났는데도 흉터는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이젠 굳이 신경 쓰고 싶지도 않았다.
"어머 언니! 세상에는 2가지 유형의 문제가 있는 법이에요! 하나는 해결할 방법이 있는 문제인데, 가령 언니의 관리 안 한 갈기 같은 거요. 그리고 또 한 가지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인데 그건 언니의 흉터를 생각하시면 되겠네요. 세상을 행복하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줄 아세요? 해결할 수 있는 건 속히 해결하고, 해결할 수 없는 건 겸허히 받아들이는 마음을 가지는 거랍니다."
"이미 그러고 있거든."
래리티가 내 갈기를 물에 헹구고 있었으므로, 최대한 움직이지 않으려고 하며 나는 말했다.
"근데 왜 망토로 그 훌륭한 외모를 감추고 다니시는 거죠? 언니 진짜 예쁘신데.. 오랜만에 숫말을 만나게 되시는데 그 미모를 망토로 다 가리면 아깝잖아요."
"숫말이 아니라 암말이고... 그냥 친구 사이거든?"
"아하! 그냥 친구 사이라고요. 그게 맘에 안 들어서 몇 년 만에 꽃단장을 하시는구나아~"
래리티는 짖궃게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아~ 괜찮아요. 그렇게 부끄러우시면 말 안하셔도 상~관 없답니다!"
내 양 뺨이 울그락 붉으락 타오르는 게 느껴졌다.
"그딴 게 아니라 그냥 친구라고 친구! 게다가 한 번도 만난 적 없고!. 갠 그냥.."
나는 맞는 표현을 더듬더듬 생각해보았다.
"내 학생.. 비슷한 애거든. 내가 요새 걔를 원격으로 가르치고 있으니까.."
"어머! 스승과 제자라! 이 무슨 달콤한 금단의 로맨스! "
래리티가 꺼뻑 죽는 시늉을 냈다. 호들갑 떨기론 둘째가라면 서럽다는 블루블러드도 저렇게 호들갑은 안 떨었는데.
"내 말을 곧이곧대로 들어줄 생각도 없지 지금? 하아... 됐다... 언제 끝나는 지나 말해."
"아, 갈기는 조금만 있으면 끝날 거예요. 전체적인 스타일링은 좀 더 걸리겠지만요."
"스타일링 말고, 망토 말야 망토."
속으로 나는 트와일라잇과 언제 만날까 날짜를 가늠해보았다. 하지만 오늘이 언제인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걔가 포니빌로 금요일에 오니까... 한 2일쯤 남았나? 그때까진 제작이 끝나야 되거든"
래리티가 하던 일을 멈추고 화들짝 소리쳤다.
"오늘 목요일인데요? 만약 친구 분이 금요일 온다면, 오늘 내로 다 끝내야 된다는 이야긴데?"
"엇!"
내 얼굴이 살짝 창백해졌다. 래리티는 나를 욕조에서 데리고 나가 내 털을 말려주기 시작했다.
"저기.. 추가 대금을 지불할 테니까, 오늘 내로 재단을 좀 끝내주면 안될까? 으윽... 생각해보니 돈이 그만큼은 없군.. 할 수 없네. 필요한 만큼 몸으로 때울게. 마녀는 수익성이 영 좋은 직업은 아니라서."
이제 진짜로 돈을 벌만한 직업을 찾아야 되는 게 아닐까 싶었지만, 아직도 난 그에 걸맞은 기술이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돈을 벌기 위해 식당에서 웨이트리스 일을 하느니 차라리 푼돈을 받더라도 애플잭네를 위해 팀버 울프를 사냥하는 편이 훨씬 나았다. 내가 애플 가족에게서 돈을 받는 건 난 별로 안 좋아했다는 건 제쳐두고서라도 말이다. 애플 가족에게는 남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다. 할머니는 과수원 일을 하시기엔 너무 연로하셨고, 오로지 빅맥만이 농장의 그 고된 일을 소화할 수 있었다. 애플잭도 요새는 다 커서 농장 일에 큰 보탬이 됐지만, 가끔 너무 과로하는 경향이 있었고, 나는 애플잭이 무리하다 다칠까봐 영 불안했으므로, 가만 놔둘 수가 없었다.
...장님이 외눈박이 걱정하는 격이군 이거....
"흠..."
래리티는 생각에 잠긴 것처럼 보였다.
"그나저나 언니가 핑키가 늘 떠들고 다닌 그 그림자 포니였었죠? 아마? 그냥 예전에 자기가 바위 농장 살던 시절 이야기처럼 지어낸 이야기인줄 알았더니.."
래리티는 코웃음을 치면서 말을 덧붙였다.
"바위 농장 이야기야 영 믿음이 안 가지만.... 언니가 바위를 모래알이 될 정도로 부술 수 있다는 소문은 사실인가 봐요?"
"포니 바로 찾았어."
나는 고개를 꼿꼿이 쳐들며 말했다.
"에버프리에서 제일 위험한 괴물이 나거든."
"딱 좋아요. 마침 언니에게 부탁하고 싶은 일이 하나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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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꽃단장하고 나가기 딱 좋은 곳이구만 여기..."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아니꼬운 투로 말했다. 그것도 그럴게, 래리티가 나를 마을 근처 먼지가 날리고 돌들이 널린 황무지로 데려간 것이다. 너른 벌판엔 적잖은 수의 바위와 뻥 뚫린 구멍들이 널려있었다. 그 흙길을 걷고 있자니 아까 깨끗이 씻은 내 발굽은 이미 예전 그 꼬질꼬질한 상태로 돌아와 있었다.
"언니, 목소리 좀 낮춰요! 다른 포니들의 눈에 띄면 안 된단 말이에요!"
래리티가 전형적인 고고한 체 하는 캔털롯 귀족의 어투로 말했다.
"저기 래리티.... 여기 우리들밖에 없거든 지금?"
나는 휑한 허허벌판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긴 마을 밖이니까 더 이상 행마도 없을 거 아냐! 돌이 필요한 무슨 이상한 포니라면 모를까.."
나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나저나 여긴 대체 왜 온 거야? 이유나 좀 말해줄래?"
"돌 때문에요."
나는 짜게 식은 시선으로 래리티를 노려보았다.
"그렇게 보지 마요. 내가 여기 온 건 그냥 돌 때문이 아닌, 다름이 아닌 보석 때문이라고요! 제 재능은 숨겨진 보석을 찾는 거예요. 언제나 땅을 파는 일이 좀 힘들었었는데, 마침 언니가 도와주시기로 했으니 잘 됐네요. 언니 되게 건강미가 넘쳐 보이시던데, 어때요. 육체노동은 좀 자신 있으세요?"
"마법으로 땅을 파는 것도 육체노동의 범주에 들어간다면야 뭐.."
나는 어께를 으쓱 하며 대답했다.
"좋아요! 전문가들끼리 모였으니 일이 잘 풀리겠는걸요?"
래리티의 뿔에 불이 들어왔다. 그러더니 곧 기수를 돌려 다른 방향으로 가기 시작했다. 나보다 한창 어린 포니를 따라가다니 뭔가 바보가 된 기분이었지만, 낫살만 먹은 게 다는 아니지 않은가. 게다가 나는 숲을 거닐다가 갈기 쪽에 나뭇가지가 달라붙은 것도 모르고 그렇게 한 몇 달간 다니다가 오늘에서야 비로소 알았을 정도로, 래리티보다 못한 면은 분명히 있었으므로, 나는 군말 없이 따르기로 했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 만큼 독립적이고 야물지는 않은가 보다.
"그러겠지.. 자알 풀리겠지.."
나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그 후로도 몇 초 동안 계속 걷다가 래리티가 갑자기 멈췄다. 뿔이 아래쪽을 향하고 있었다.
"여기에요."
래리티는 아래쪽에 커다란 X자를 그었다. 나는 래리티에게 폭발 반경에서 벗어날 때까지 물러나보라고 몸짓을 해 보였다. 한 40걸음 정도면 안전할 것이다. 그리고 난 뿔에 마력을 집중해 관통형 화염구를 만들어낸 후 래리티 쪽을 쳐다보았다. 뜨악한 눈치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난 X자 표시된 곳에 화염구를 박아 넣었다. 곧 굉음과 함께 래리티의 의상실 높이정도만한 먼지구름이 일어났다.
"자. 됐지?"
나는 자랑스럽게 내 반불구가 된 쪽 다리로 구덩이의 먼지를 휘휘 저으면서 말했다.
"아마 적어도 한 20보 정도 깊이로 파였을 테니, 보석 찾기도 쉬울 거야 이제."
래리티가 먼지를 뿔 위부터 발끝까지 뒤집어쓴 행색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이래서야 보석을 찾겠어요?!"
"잠깐. 너 분명-"
"이래서는 절대 못 찾죠! 난 몰라.. 죄다 산산조각 났겠네!"
...어쩐지.. 아까 그 먼지구름에 무슨 반짝거리는 가루 같은 게 섞여있더라니..
"모름지기 숙녀라면 말이죠. 절제하는 법을 알아야 되는 법이라구요! 이렇게 막무가내로 뭐든 때려 부수는 게 아니라!!"
"야! 네가 구멍 파달라면서! 난 파 준 죄밖에 없거든?!!"
"안에 있는 보석이 안 상할 만큼 섬세하게 파달라는 거였죠!!"
래리티는 아주 짜증이 난 듯 앞발굽을 동동 구르다가, 더럽혀진 자기 발굽을 보고 화들짝 놀라 황급하게 가방에서 발굽 세정제를 꺼내 부랴부랴 앞발굽을 닦고 있었다. 난 내 인중을 지그시 눌렀다.
"래리티.. 말해두겠는데.... 난 무슨 깔끔한 숙녀 같은 건 전혀 못 되는 포니야. 망할.. 캔털롯에서 살던 시절에도 숙녀 어쩌구랑은 완전 거리가 멀었다구! 난 숙녀가 아니라 마녀야. 뭐든 날려버리는 그런 마녀라고."
나는 구덩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애플잭네를 위해 팀버울프들을 날려버린 적도 있고, 애플잭 친구 중 한 기의 부탁을 받고 낡은 비버 댐을 날려버린적도 있다고. 연구를 위해서는 나 자신도 주저 않고 날려버리는 그런 성질머린데 왜 굳이 숙녀처럼-"
"....땅상어는 날려버린 적 있어요?"
"?....아니? 없는데.."
왜 갑자기 그런 질문을 하지? 래리티는 들고 있던 발굽 세정제 병을 떨어트리고 내 등 뒤를 보고 있었다.
"....내 뒤에 땅상어가 있나 보구나.. 맞지?"
래리티는 뻣뻣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서서히 뒤를 돌아보았다. 거대한 땅상어의 위턱...아니 아래턱... 아이 몰라! 어쨌든 거대한 상어의 아가리가 나를 통째로 집어삼킬 기세로 달려들고 있었다!
상어의 우렁찬 포효소리와 함께 놈의 아가리에서 싸구려 그리폰 뷔페의 잔반통에서나 날 법한 냄새가 풍겨 나왔다. 지금은 잔 생각을 할 틈이 없다!
나는 즉시 놈의 목구멍에 화염구를 날렸다. 갑자기 기습을 당한 탓에 마력 집중을 별로 하지 못했고, 따라서 화염구의 위력은 형편없었지만 땅상어를 잠시 뒤로 물러나게 할 정도는 되었다.
나는 땅으로 드러난 놈의 생김새를 자세히 볼 수 있었다. 화살 모양의 거대한 머리에, 6개의 튼튼한 다리가 몸통에 달려있었다. 딱딱한 껍질은 경비병의 갑옷만큼이나 단단했고, 수 백 기의 포니들의 힘을 합친 것만큼이나 힘도 셌던 까닭에, 땅을 마치 바다처럼 헤엄쳐 다니는 놈이었다.
그런 괴물에게서 난 매우 아슬아슬하게 살아 나온 것이다.
제코라에게서 생존술을 베울 적에, 땅상어에게서 도망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배웠었다. 고대로부터 전래되는 방법에 의하면 한 발굽을 빠르게 다른 쪽 발굽 앞에 두는 식으로 걸으면서, 큰 소리로 자기가 땅상어에게 공격받고 있음을 주변 동물들이나 포니들에게 큰 소리로 알리라는 거였다. 얼핏 보면 그냥 비명 지르면서 도망가라는 이야기나 다를 바가 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본질적으로 차이가 약간 있다나 뭐라나.(그리고 이게 내가 꼴사납게 도망치는 것에 대한 약간의 변명거리 정도는 될 것이다..약간은..)
"뭐 해요? 날려버려요!"
래리티가 나를 앞지르며 황급하게 소리쳤다. 망할 놈의 다친 다리! 쟤를 미끼로 두고 도망칠 수도 없잖아!
"왜! 아까 숙녀는 절제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면서!"
나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래리티의 꼬리를 쫒았다.
"숙녀처럼 얌전히 잡아먹히고 싶은 생각은 없다구요! 마녀의 마법을 좀 부려봐요!"
반박할 수가 없군. 특히나 내가 제일 먼저 잡아먹힐 것 같은 상황에서는 말이다. 땅상어는 위압적으로 땅을 헤엄치며 우리를 바짝 따라잡았다. 나는 필사적으로 학교에서 베운 땅상어의 특성을 생각해내려 했으나, 모두 까먹은 지 오래였다. 실제로 만날 일은 절대 없겠거니 하고 가볍게 넘겼던 것이다.
나는 빠르게 머리를 굴려보았다. 지면 관통형 화염구? 효과가 있긴 하겠지만, 그건 거의 암반에 구멍을 뚫는데 특화된 주문이었지, 생물 공격용에 특화된 주문은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 저 거리에서 무턱대고 화염구를 날렸다간 우리까지 폭발에 휘말리게 된다. 화염 정도라면 괜찮겠지만, 여기는 돌밭이다. 파편 때문에 생기는 위험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래도 순간이동을 써 나만 탈출하고 래리티를 잡아먹히게 놔두는 것 보단 이게 더 낫겠지.. 반불구가 된 다리에서 올라오는 통증과 가쁜 숨을 참아가면서 나는 뿔에 마력을 모았다. 그리곤 기수를 훽 하고 틀어 나와 땅상어의 중간 쯤 되는 거리에 비스듬하게 화염구를 꽃아 넣었다.
난 화염구가 폭발하기 전 래리티를 마력으로 폭발 반경 너머로 급하게 집어던졌다. 얼마 되지 않아 폭발이 일어났고, 충격파에 휩쓸려 내 몸은 공중으로 붕 뜨게 되었다. 무수히 많은 수의 자갈들이 날 때리고 지나갔고, 커다란 돌멩이가 하나 날아와 내 큐티 마크쪽에 직격했다. 이윽고 난 땅바닥에 털썩 떨어졌다. 아파서 신음 소리를 내며 땅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아까 돌멩이를 맞은쪽이 벌써부터 부어오르는 것 같았다.
"못된 망아지 엉덩이에도 뿔난다더니.. 하나 나게 생겼군.."
먼지가 눈에 들어가 나는 눈을 비볐다. 오늘 받을 고통은 이 정도면 족했다. 나는 땅상어가 어떻게 됐는지 보려고 주변을 살폈다. 저 멀리쯤에 피로 가득 찬 웅덩이가 하나 보였다. 역겹기도 해라.. 어쨌든 놈은 두 번 다시 포니 뒤꽁무니를 쫒지는 못 할 것이다.
"언니! 괜찮아요?"
래리티가 내 몸을 흔들었다. 래리티의 발굽이 내 갈기 쪽으로 가는 게 느껴졌다.
"이런.. 피 나잖아요!"
나도 내 머리를 발굽으로 쓸어보았다. 왼쪽 귀 위로 축축한 기운이 느껴졌다.. 최고구만..
"괜찮아.... 이것보다 더 심하게도 다쳐봤거든.."
"전에 더 심하게 다쳤다고 해서 지금 이 모양으로 다쳐도 괜찮은 건 아니잖아요!"
래리티가 나를 호되게 꾸짖었다.
"자. 빨리 일어서요. 일단 상처 난 부위를 씻고, 병원에 가요. 여기서 별로 안 머니까요 머리 다치는 건 결코 웃어넘길만한게-"
"병원은 절대 안 돼."
나는 버럭 외쳤다... 막 지르고 나니 뭔가 좀 과했다 싶었다. 나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다시 말을 시작했다.
"저기...미안... 너한테 화나서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멍청하게 다친 나한테 화가 나서 지금 그러는 거니까.. 진료 기록이 남게 되면 나한테 곤란한 일이 좀 있거든? 그래서 병원은 안 된다는 거야."
래리티가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저기 언니.. 무슨.. 도피 중이신 건가요? 그래도 걱정 마세요. 보통 병원에선 환자 개마정보같은 건 다 비밀에 붙여두니까요. 환자 정보 보호법이라는 건 들어 보셨죠?"
"그래도..안 갈 거야..... 후우.... 미안.."
"그럼.. 최소한 제가 상처라도 좀 보게 해 줘요. 그거라면 상관없죠?"
래리티는 내 털에서 먼지를 약간 털어냈다.
"그냥 긁힌 상처니까 신경 꺼. 그리고 그럴 여유나 있어? 지금 보석 찾아야 되는데."
"아뇨 보석은 나중에 찾아도 돼요."
래리티가 나를 부축해주었다. 약간 어지러웠다. 아마 머리의 부상이 내 생각보다 좀 심각했던 모양이다. 아까는 못 느꼈었지만 슬슬 머리가 울리듯이 아파오고 있었다.
"래리티... 그래도 내가 옷 값 정도는 해 줘야 될 거 아냐.."
"쉿! 조용. 고작 사파이어나 루비를 좀 얻겠다고 다친 포니에게 일을 시킬 수는 없죠. 그리고 옷값이라면 아까 제가 잡아먹힐 뻔 했을 때 구해준 걸로 대신했다고 치세요. 아니.. 그보다 좀 과하려나요."
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후우... 고마워."
사실 별로 고맙지는 않았다. 동정을 받는 것 같아서였고 동정 따윈 딱 질색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큰 망치로 내 골을 때리는 기분이었으므로, 지금 굳이 따질 여력도 나지 않았다.
"음... 정 마음에 걸리신다면 나중에 제 일을 또 도와주시는 게 어떠세요? 그땐 언니 몫도 분배를 해 드릴게요."
래리티는 활짝 웃으며 말을 계속했다.
"제가 찾는 보석들은 대부분 꽤 값을 받는 보석들이니까요. 그리고 언니도 그냥 용돈벌이보다는 더... 안정적으로 버는 일이 필요하지 않으세요? 병원 치료도 마다하실 정도로 터프하신 언니라 식당에서 주문 받는 일은 천성 상 못 하실 것 같고.."
"그거.. 괜찮겠네. 안정적인 벌이가 있어서 나쁠 건 없고.."
"당연하죠!! 언니 같은 준마가 자금난에 허덕이다니, 그게 될 말이에요?"
래리티는 돌아서서 고개를 높게 들었다.
"참! 그리고 굳이 숲에서 사실 필요가 있나요? 제 의상실에 남는 방이 하나 있으니 거기서 지내시는 건 어때요? 만약 마을과 거리가 있는 곳에서 지내고 싶다면 애플잭 네한테 말씀해보시구요"
"아. 그건 괜찮아. 내 소유의 성이 있어서."
그 말을 들은 순간 래리티는 그 자리에서 일시 정지했다.
"아니.. 성이라구요?"
래리티가 나를 희둥그래진 눈으로 돌아보며 물었다.
"그래. 성. 마법으로 오랜 시간 동안 보존되고, 고고학자들이 한평생을 바쳐도 다 연구 못할 고대의 마법서 들이랑 유물들이 넘쳐 나는 고대의 성이지. 에버프리 숲 중앙에 있어."
래리티는 살짝 찌푸리며 나를 보다가, 한숨을 쉬며 돌아섰다.
"우웅.... 거기에 고대의 샴푸나 비누 같은 건 없었던 모양이네요... 만약 관리용 제품들이 필요하시거나, 인테리어 가구들이 필요하시다면.."
"만약 그럴 일이 있으면 너부터 부를 테니까, 일단 여기서 빨리 나가자. 땅상어는 무리지어 다니는 동물이니까 분명 몇 마리 더 이 주변에 있을걸. 게다가 지금 피냄새를 맡았을지도 모른단 말이지."
래리티의 눈이 다시 한 번 커졌다. 곧 황급히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엔 나 몰라라 혼자서만 뛰어가진 않고, 나와 속력을 어느 정도 맞춰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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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파란색이 내 털 색깔에 잘 어울린다는 건 네 사정이지 내 알 바 아냐."
"아니 언니! 무슨 장례식장 가실 일 있어요? 하아... 물론, 한 세기 전에는 블랙이 대중적이었고 모든 용도의 의류에 쓰였다지만, 그건 과거 이야기고 현재의 대세는 원색 계열의 밝은 색이라구요!"
"나 숲에서 살거든!"
나는 짜증 섞인 소리를 냈다.
"밝은 색 옷 입어봤자 뭐 해? 숲 속에선 곧 색도 바래질 테고, 얼룩이 들면 잘 안 질 텐데. 반면 검은색은 약간 때가 껴도 티가 별로 안 난단 말야."
특히나 탄 자국도 티가 안 날 테고 말이다. 나는 거의 화염 면역이었지만, 그게 내 옷까지 그렇다는 건 아니라서..
"그렇....겠죠...."
래리티는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근데 좀...그렇잖아요. 검은색에...무늬도 없는 망토 하나를 해 달라구요?.. 이럴 거면 그냥 기성복 상점에 가시지..."
래리티는 어께를 으쓱거렸다.
"제약이 있어야 창의력이 빛을 발하는 거 아냐? 단순한 망토 하나도 멋지게 못 뽑아내서야 어떻게 파시스트라고 할 수 있겠어?"
나는 질세라 맞받아쳤다.
"패셔니스타지 파시스트는 아니라구요!... 프랑스(Prance)어로 이야기하신 거라면 이야기가 좀 다르지만.."
래리티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턱을 앞발굽으로 두드렸다.
"...언니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네요. 단순한 망토라도 좋은 재료를 쓰고 치수를 잘 맞추기만 한다면.. 아주 패셔너블한 의상이 될 수도 있겠죠."
"그래. 바로 그런 정신이 필요하다니까."
래리티는 전신거울이 3면으로 놓여 있는 곳에 나를 데려갔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영 맘에 들지 않았다. 물론 내 갈기는 몇 년 만에 관리를 받은 덕에 아주 최고의 상태였으나, 내 몸은 여전히 만신창이였기 때문이다. 만티코어가 햘퀴고 지나간 흉터는 여전히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으며, 반 불구가 된 다리는 뭐 두 말 할 것도 없이 여전히 흉하게 뒤틀려 있었다.
그래도 전처럼 비실비실하지는 않았다는 게 그나마 위안점이랄까... 몇 년간 계속 숲을 싸돌아다닌 덕에 제법 보기 좋은 탄탄한 근육이 온 몸에 잡혔다.
"얇은 천은.... 험한 곳 많이 다니실 테니 안 되겠고... 양모가 아무래도 괜찮을 것 같긴 한데.. 그것도 물 먹으면 쉽게 상할 테니 그것도 안 되겠고.."
래리티가 여러 가지 천을 마력으로 들어다가 줄자와 함께 내 몸에 대보고 있었다. 나는 가급적 거울을 안 보려고 노력하며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이러는 나를 래리티가 고개를 갸웃 하더니 빤히 쳐다보았다.
"뭐 불편한 거라도 있나요?"
"...없어."
나보다 나이도 어린 포니가 숫제 나를 돌보려고 드는 게 마음에 별로 들지 않았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래리티가 수건으로 찰싹 내 엉덩이를 때렸다.
"거짓말 하지 마세요. 제가 분명 말했죠? 언니는 뛰어난 미모를 가지고 있다구요. 저도 정말 이렇게 의욕이 넘치는 적은 처음이에요. 정말 독특한 매력을 지닌 고객과 만났으니까요. 제가 만난 유니콘 손님들은 대부분 나뭇가지처럼 삐쩍 말라있던가, 혹은 푸짐하게 살이 쪄서 애플잭이 돼지로 착각하고 돼지우리로 몰아넣을 체형을 지닌 손님들뿐이거든요. 그러니까 거울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이야기에요."
나는 그 말에 코웃음을 쳤다. 말을 너무 돌려하는군 쟤...
"그냥 근육질 숫말 비슷한 체형이라고 바로 말 하지 그래?"
"균형 잡힌 몸매라고 하는 게 더 바른말이겠죠?"
래리티가 다른 옷감들을 다시 내 몸에 대 보았다. 그 중 한 옷감이 내 털에 스치자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감각이 들었다.
"방금 그거.. 가죽이었어?"
나는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네. 전 세계 각국의 독특한 옷감들도 약간씩 모아뒀거든요. 가죽은 가공하기도 쉽지 않거니와, 고기를 터부시하는 포니의 생활 습성 때문에 보통 잘 쓰이지 않는 옷감이죠. 만약 가죽이 싫으시면 망토에는 가죽은 안 쓰도록 할게요. 제가 그렇게 자주 쓰는 옷감도 아니지만요."
"괜찮아.. 그저.."
나는 할 말이 빠르게 생각나지 않았다.
"예전 일이 좀 생각난달까.. 내가 망아지일 적 그리폰 대사가 나한테 가죽 재킷을 선물해 준 적이 있거든. 작아서 못 입게 될 때까지 열심히 입고 다녔지.."
나는 슬픈 미소를 지었다.
"그리폰 대사라구요?!"
래리티는 내가 성에서 산다고 했을 때보다 더 충격을 먹은 모양이었다.
나는 속으로 래리티를 재 보았다. 쟨 분명 입이 가벼울 것 같았고 여기는 작은 마을이었다. 아직 대다수의 포니들이 내 이름도 모르고, 아예 내가 여기 있는지도 모른다지만 그래도 조심할 필요는 있었다.
내가 말을 안 할 거라는 걸 또 귀신같이 알아 챈 모양인지, 래리티가 울먹울먹한 눈망울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으윽... 전에 망아지 시절 애플잭에게서 본 눈과 비슷한, 차마 거절하기 힘든 그런 눈망울이었다.
"알았어.... 알았다구... 너, 내신 다른 포니들에게 이야기하고 다니지 마라. 난 원래 셀레스티아의 수제자였어."
"공주님이랑 아는 사이였어요?! 아하! 성에서 사신다는 것부터 설마설마했었는데 공주님이랑 가까운 사이셨나 보구나! 저기, 제 말씀을 공주님께 잘만 해 주신다면 제가 제작한 드레스들을 기꺼이 무료로-"
"진정 좀 해라 좀.."
나는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분명 수제자 '였다'고 했지? 사실 나.. 쫓겨났었어.."
나는 반불구가 된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거의 내 실수 때문에 일어난 높은 곳에서의 길고 고통스러운 추락이었다.
"그래서 에버프리 숲에서 살기로 했어. 다시는 공주를 보고 싶지 않으니까."
".......정말 안 됐네요.. 죄송해요. 제가 너무 캐묻는 것 같아서... 그래도 공주님이랑 같이 지내면서 좋은 일도 있지 않았어요?"
"그러긴 했지."
나는 어께를 으쓱 하면서 대답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뭐.. 나쁘지는 않았어. 고아원에 계속 있는 것보다는 어쨌든 나았으니까. 하지만 내가 언제나 더 높은 목적을 추구할 때마다 공주가 앞길을 가로막는 그런 느낌을 자주 받았지. 공주와는 그렇게 자주 시간을 보낸 것도 아니었어. 그리고 같이 보낼 때면, 공주는 나를 마격을 가진 포니보다는, 시간을 들여 완성하고 있는 작품 비슷한 취급을 했지.....
래리티의 표정이 어두워지는 걸 보며, 나는 재빨리 말을 정정하기로 했다.
"그렇다고 나를 막 대한 건 절대 아니고.... 조금 쌀쌀맞게 거리를 좀 뒀다고나 할까... 그리고 언제나 공주 자신이 정해준 과정만 밟게 했어. 어떨 때는 나한테 과연 선택권이 있나 하는 의문도 들었지."
"그런가요.. 뭐, 선생님들은 대부분 그렇잖아요. 자신이 좋다 싶은 교육 방법만 고집하는 거.."
"그래.. 공주는 일단 '표면상으로는' 내게도 선택권이 있는 것처럼 거짓으로 꾸몄지. 교묘하게 내가 공주가 원하는 일만 하도록 조종을 하면서 말야. 전에 공주가 나한테 '이번엔 수업을 안에서 할까 밖에서 할까' 하고 물은 적이 있었지, 내가 그냥 안에서 수업한다고 하니까 그때 공주는 내게 천문학 수업을 해 주었는데, 밤하늘을 좀 더 알아야 된다는 게 그 이유였어. 하지만 나중에 하인에게 물어보니까 그러더군, 밖에 나간다고 했어도 똑같은 수업을 들었을 거라고 말이야. 결국 내 선택 따윈 허상이었지. 애초에 강제로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었는데.."
래리티는 아무 말이 없었다. 아마도 셀레스티아가 모든 포니들의 생각대로 별로 완벽한 포니가 아니라는 사실을
"나를 마격을 가진 존재로 대해주길 바랬어. 하지만... 난 결국 공주의 애완동물 이였을 뿐이었어.. 맘에 안 드는 짓을 하면 오만상을 찡그리면서 꾸중하고, 맘에 드는 짓을 물어오면 잘했다고 칭찬하는.... 언제나 그런 식이었지. 나한테도 동등한 마격이 있다는 걸 알기나 할까 몰라!"
눈물이 나와 나는 황급히 눈을 비볐다.
"그러다가 더 이상 말을 안 들을 것 같으니, 거리로 내쫒아 버리고...그러다가 여기까지 오게 된 거야."
갑자기 래리티가 나를 와락 껴안아서 나는 흠칫 놀랐다. 래리티의 포옹은 약간 어색했다. 다른 포니들을 껴안을 일이 별로 없어서였겠지. 어쨌든 난 받아들였다. 나는 래리티에게 몸을 기대고 훌쩍거리면서도 울음이 터져 나오지 않도록 갖은 애를 다 썼다.
"제 영혼을 걸고 말할게요. 이 일은 절대 발설하지 않을 거예요."
래리티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림자 포니가 알고 보니 슬픈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는 소문마저도 퍼트리지 않을게요. 약속해요. 언제나 꾸며낸 표정을 얼굴에 달고 살아야 하는 그 고통...저도 익히 알고 있죠. 상류 사회는 간혹 잔혹할 때가 있는 법이거든요.."
래리티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건 저도 아주 잘 알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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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새 망토를 받고 의상실 문을 나섰다. 래리티는 적당한 천을 찾고 적당한 치수를 제자 마자 그 자리에서 바로 천을 알맞게 가위질하고 멋지게 바느질까지 마쳤다. 래리티의 마법은 분명 인상적이었다. 물론 내 마법만큼이나 강력하지는 않았지만, 염동력을 세밀하고 또 광범위한 규모로 다루는 둥 염동력의 조종에 있어서는 거의 최고의 경지에 다다라 있었다. 나도 바느질을 좀 배우긴 했지만 결코 저 정도로 세밀하게 할 수는 없었고, 저렇게 반복적으로 할 수는 없었다. 한다 치더라도 형편없게 옷을 찢어버리는 걸로 끝났다. 내가 보통 스미스 할머니에게 내 망토 수선을 맡기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내 예전 망토는 약간의 수선을 걸친 이후 래리티가 상자에 넣어주었다. 성까지 등자 가방을 메고 갈 때 보니 묘하게 더 무거워진 것 같았다. 무언가가 더 들어가 있는 건가..
아참. 좀 더 편하게 성을 드나들기 위해 성 안에 비전술 표식을 걸어놓았다. 성 안으로 순간이동하기 편하게끔 말이다. 하지만 성 안에 복잡하게 걸린 주문들 때문에, 어쨌든 그 주문의 영역 내에 있는 곳, 즉 성으로 들어가는 다리가지는 걸어가야 했었다. 걸어갈 거리가 줄었다고는 해도 여전히 먼 거리였다. 특히 래리티랑 오늘 그 소란을 겪고 난 다음에는 말이다.
내일 입고 나갈 옷에 행여나 주름이라도 잡힐세라, 나는 망토를 벗어서 잘 개 놓았다. 나는 오래된 벽난로에 불을 넣었다. 장작에는 금방 불이 붙었다.
트와일라잇을 맞이하려면 아직도 청소해야 할 곳이 많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난 청소를 잘 못 한다. 보통 성에 있을 때 내가 어지른 것들은 하인들이 알아서 다 치워줬기 때문이었다. 나는 일단 내가 읽고 나서 난잡하게 늘어놓고 곧 잊어버린 책들부터 정리하기로 했다.
나는 내 등자가방을 집어다가 보통 내 물건들을 놔두는 낡아빠진 찬장 쪽으로 갔다. 복도를 가로질러 있는 쪽에 있는 이 방이 트와일라잇 맞이하기 딱 좋아보였다. 비가 오면 지붕이 좀 샜고, 비를 막기 위해 걸어둔 주문
등자가방 하니 생각나는데, 아까부터 신경 쓰였던 거지만, 래리티가 준 상자가 묘하게 좀 무거웠었다. 나는 상자를 열어보았다. 전에 쓰던 내 망토가 완전 새 것처럼....은 좀 과장이겠고... 어쨌든 전보단 꽤 나은 모양새였다. 닮아빠진 소매들은 전부 기워져있었고, 바랬던 색은 다시 암회색으로 재 염색되어 있었다. 박살이 났던 걸쇠도 수리되었고, 어께 쪽엔 보온을 위한 천이 약간 덧대어져 있었다.
나는 미소를 지었다. 래리티는 단순히 수선을 한 것뿐만이 아니라, 내 예전 망토를 예전보다 훨씬 더 쓸 만하게 만들어주었던 것이다.
망토를 꺼내고도 여전히 상자 안에는 남아있는 게 있었다. 아마도 그것 때문에 상자가 약간 더 무거웠던 것 같았다. 나는 상자 밑바닥에 뭐가 있는지 상자를 내려다보았다.
그건... 가죽 재킷이었다! 어안이 벙벙한 나는 예전 망토를 일단 옆에 놔두고, 황급히 가죽 재킷을 상자에서 꺼냈다. 가죽 재킷 안에서 고상한 필적으로 써진 서명이 된 편지 하나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새로운 친구를 위한 선물이에요. 가죽으로 만든 옷은 보통 천으로 만든 옷에 비해 잘 닮지 않죠. 그 누구보다 언니에게 안성맞춤 인 것 같아서 특별히 재단해 보냅니다. 언제 다시 한 번 들러주세요. 잘 어울리는지 보고 싶네요. - 래리티'
눈물이 앞을 가렸다. 나는 가죽 재킷을 꼭 껴안고 얼굴을 파묻었다. 망아지 시절에 입고 다녔던 옷에서 났던 냄새와 완전 똑같은 냄새였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했었던 시절..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특별한 포니인 줄만 알고 지냈던 그 때가 떠오르는 냄새였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나는 가죽 재킷을 꼭 껴안고 얼굴을 파묻었다. 망아지 시절에 입고 다녔던 옷에서 났던 냄새와 완전 똑같은 냄새였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했었던 시절..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특별한 포니인 줄만 알고 지냈던 그 때가 떠오르는 냄새였다.
나는 재킷을 꼭 껴안은 채로 침대에 누웠다.
내 마생은 진짜 어디부터 잘못됐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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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화는 대망의 트와일라잇 특집 편이군요.
선셋의 가죽 재킷이나 트와일라잇과 일지로 문자를 주고받는 것처럼, 원래 세계의 인간 나오는 평행세계에서 일어났던 일이 이 포니 선셋의 평행세계에서도 비슷하게나마 일어나는 걸 보면 꽤 재밌습니다.
물론 원래 세계보다는 선셋이랑 다들 빨리 엮이게 됐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