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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압/팬픽] 시유X세미 - 꿈
게시물ID : animation_23491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bk201
추천 : 3
조회수 : 353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4/05/30 23:26:25
"언니, 정말로 가야만 되는 거야?"

"미안해 세미야. 언니에게는 이루고 싶은 꿈이 있어. 세미가 언니를 이해해 줄 수는 없을까?"

"..싫어"

그것이 나와 시유 언니의 마지막 대화였다. 기댈 곳이 시유 언니 밖에 없었던 나는 시유 언니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 여러가지 노력을
해봤지만 언니의 마음은 변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결국 나와 언니의 관계는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눴던 날 이후로 완전히 틀어져 버리게 되었다. 

몇달 뒤 다른 사람의 입에서 언니가 서울로 상경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몇달이라는 시간 동안 언니에게 쌓여 있던 앙금은 사라졌지만 애정 또한 
식어버린지 오래라 언니의 행보에는 별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1년이 조금 지나서 시유 언니를 TV에서, 그것도 누구나 알 법한 공중파 채널의 가요 프로그램에서 볼 수 있었다. 1년은 낮과 밤을 365번이나 
오가는 긴 시간이지만 육체의 성장을 기대하기에는 꽤나 짧은 시간일 것이다. 하지만 브라운관 속의 언니는 소녀티를 완전히 털어 낸 것도 모자라 보다 
성숙해진 몸매와 목소리로 관객들을 홀리고 있었다. 

오로지 착 붙어 있는 가슴만이 과거의 시유 언니를 떠올리게 했다. 겉으로는 무표정을 유지했지만 마음 속에 티끌 만큼이나 고여 있던 언니에 대한 
감정은 썩어 문드러져 후회와 애증이라는 냄새를 풍겼다. 언니가 내 곁을 떠나려고 했었을 때 좀 더 비참한 모습을 보였더라면 지금의 내가 이런 끔찍한 
감정을 느끼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 날 이후 몇일 동안 언니와 관련된 악몽에 시달렸다. 지금의 언니가 날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상관없이 내 마음 속에 조그맣게 자리잡고 있던 언니는 
어느샌가 눈덩이 굴리듯 커져 날 내려다 보고 있었다. 언니를 붙잡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감과 알게 모르게 느꼈을 열등감이 흘러넘치기 시작한 것이다. 

악몽을 더 이상 꾸지 않게 되자 나는 마음을 다잡았은 동시에 결심을 세웠다. 시유 언니를, 나를 버린 대신 스스로가 꿈꿨던 바를 이룬 언니를 만나보기로 
했다. 물론 지금의 초라한 모습으로 언니를 만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언니와 대등한 위치에서 만나고 싶었다. 아니, 만나야만 했다. 
언니가 나를 버리고 성공한 것과 같이 나 또한 언니가 없더라도 버젓이 혼자 설 수 있는 모습을 보여줘야만 했다. 언니가 성장한 나를 보고 과거의 행동을 
반성하길 바라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오로지 나에 대한 증명과 내 마음 속에 깃들어 있는 언니를 쫓아내기 위해서 였다. 

그렇게 난 성공이란 단어에 병적으로 집착하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재능을 보이는 일이 있으면 무조건 파고들었다. 하지만 그런 행위들도 얼마가지 
않아 그만두었다. 왜 그만 두었냐고 묻는다면 일에 대한 애정이 없기 때문이라고 대답하고 싶다. 예전, 언니는 내게 잘 하는 일에는 자연히 애정이 따르기 
마련이라고 말해줬지만.. 순 거짓말. 그것은 언니한테나 해당되는 얘기였다.  

마지막으로 남은 방법은 공부였다. 가장 흔해빠진 방법이긴 했지만 그만큼 정비례를 잘 따르는 방법, 난 의자에 앉은 다음 난해한 문자들이 나열된 
수학책을 펼쳤다. 처음에는 다소 거부감을 느꼈으나 조금 시간이 지나자 나름 어려워 보이는 문제들도 술술 풀어내는 게 가능해졌다. 이 것도 재능이라면 
재능이겠지만 공부란 재능보다는 노력이 더 중요시 되는 일, 여지껏 포기해 왔던 여러가지의 일들과는 다르게 난 진중하게 공부를, 특히 수학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몇년이 지나서 나는 누가 들어도 대단하다고 여길 만큼의 명문 대학을 장학생의 자격으로 들어갔다. 대학의 정문을 바라보면서 나의 노력이 어느 정도의 
결실을 맺은 것에 대해 큰 성취감을 느꼈다. 하지만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이유는 어디까지나 시유 언니를 대등한 위치에서 만나기 위한 것이었다. 
명문대에 입학했다 했을 지라도 시유 언니 앞에 당당히 서기에는 여전히 부족하기 짝이 없는 위치였다. 

내가 몇년 간의 노력에 합당한 보상을 받고 있을 동안 언니가 얼마나 더 거대해 졌는 지를 확인해 보고 다녔다. 대학에 입학하기 전 까지는 공부에 방해가 
되는 TV나 컴퓨터 같은 매체를 일절 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다른 매체를 통해서 시유 언니를 보지 않는다고 해서 승승장구 하던 언니가 갑자기 
떨어질 이유도 없고 말이다. 

"...이게 뭐야"

하지만 내 예상은 크게 빗나갔다. 시유 언니는 날개를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한 채 추락했었다. 이유는 소속사의 부도, 누구에게나 인정 받는 최고의 
가수가 되겠다는 매우 추상적인 꿈이 채무 관계라는 매우 구상적인 문제로 좌절되고 만 것이다. 

이 일은 내가 TV에서 시유 언니를 본지 1년도 채 안되서 터진 일로 사건이 터진 당시에도 딱히 세간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하물며 몇년이 지난 
지금에는 여러 사이트를 샅샅이 뒤져 보아도 시유 언니와 관련된 것을 찾기가 어려웠다.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그나마의 글이 남아 있었는데 내용은 
시유라는 가수가 있었다는, 추억을 되짚어 보는 글이 대부분이었다. 아무리 연예계란 곳이 소비가 빨라 언젠가는 대중에게 잊혀지는 날이 온다지만 
언니는 너무나도 억울한 이유로 이탈자가 되고 말았다. 

나 또한 이 상황의 의도치 않은 피해자가 되고 말았다. 내 노력을 과시해야만 할 대상은 그 가치를 잃어 버렸다. 대체 그 수년 간의 노력의 제대로 된 
보상은 누구에게 받아야만 한단 말인가. 

삶의 갈피를 잃은 나는 여태껏 이뤄 왔던 노력이 무색해질 정도로 멍하고 힘빠진 일상을 보냈다. 낙제점의 연속은 당연히 딸려오는 부속품이었고 끝끝내 
장학생의 자격도 박탈 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통장 잔고에 닥친 등록금은 말라버린 꿈을 찾던 내게 현실을 자각시켜 주었다. 난 과거의 필름들을 구겨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사람은 지금을 사는 것이다, 과거에 매달리는 안일한 행동을 하지 말자는 채찍질과 함께. 

현재는 라온이라는 아이의 과외를 해주면서 등록금으로 쓸 돈을 벌고 있다. 처음 만났을 때는 시도 때도 없이 장난을 치는 것이 참으로 버릇없는
아이라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차츰 흐르면서 이런 행동들 또한  라온이가 내게 보여주는 애정표현이란 것을 깨달았다. 특히 날 수학술사라고 부르며 
재롱을 떠는 모습은 과거의 내가 시유 언니에게 장난을 치던 모습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내 장난을 받아주던 시유 언니의 기분을 십몇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젠 시유 언니와 관련된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라온이의 과외를 마치고 자취방으로 돌아가는 지금과 앞으로 있을 미래를 내 자신에게 투자하기로 했다. 
언니에게 나의 성공한 모습을 보여줘서 스스로의 만족감을 쟁취하자는 것도 마음을 터놓고 토로하자면 나 때문이 아닌 시유 언니를 더욱 의식한 목표였다. 언니도 지금쯤 다른 곳에서 파리해진 꿈을 주전부리 삼으며 살기 보다는 생각보다 안락한 현실 속에서 살아가고 있겠지. 솔직히..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은 걸. 

편의점에 들러 씹는 맛이 좋은 안주거리들과 캔맥주를 몇개 샀다. 예전에는 무시하고 지냈지만 이제는 이런 작은 요소 하나 하나를 삶의 원동력 삼을 수 
있는 어엿한 사회인이 되었다. 오늘 밤에 나올 예능 프로그램은 특히 좋아하는 것으로 안주와 캔맥주를 산 이유도 TV 프로그램과 먹거리의 조화가 내는 
작은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 였다. 지금은 작은 행복에 만족하고 있지만 내겐 길이 깔려 있다. 언젠가는 꿈에 버금갈 정도의 큰 행복을 누리는 일도 가능해 
지겠지. 

"여리다는 것들 모두 싫어 - 여기에는 작은 나 따윈 없어"

"..."

캔맥주와 안주가 든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있던 두 손가락에 순간 힘이 풀렸다. 

"주인공이 되어 날거야 - 자 어서 - 쓸데없는 생각은 버리고" 

어디선가 들어 본것 같은 목소리, 청각의 반응속도는 느렸지만 시각은 정확하게 목소리의 출처를 꿰뚫었다. 

"언니.."

정말로 예상치 못한 만남, 난 무의식적으로 한마디를 내뱉고선 그대로 굳어버렸다. 하지만 오감은 여전히 살아 있어서 언니의 모습을 보고 언니의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 언니가 노래를 완창하는 3분이라는 시간 동안 나는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던 필름들을 도로 찾아내어 영사시켜 보았다. 필름은 큰 문제 
없이 영사되었고 그 영사된 필름들을 다시 본 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상에 젖어 들었다. 

"여기 세상에 외치는 걸로써 - 세상에서 빛나게 될거야"

시유 언니는 드디어 입을 다물었다. 박수소리가 들렸다. 몇년 전의 언니가 받았던 박수 소리와 비교하자면 한없이 자그맣지만 언니는 그때 보다도 
정중하게 허리를 90도로 굽혀 몇 안되는 성원들에 대한 감사를 표했다. 언니의 노래에 자신들의 시간을 기꺼이 내줬던 사람들도 노래가 끝나자 각자의 
길을 다시 걷기 시작했다. 언니 앞에 남은 유일한 사람은 나 밖에 없었다. 

"...."

시유 언니는 이제서야 내 얼굴을 보았다. 방금 전 느꼈을 즐거움이 싹 가신 창백한 표정,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언니는 예전 날 상대할 때의 푸근한 
표정을 보이면서 한걸음 한걸음 내가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오랜만이야. 세미야" 

"어.."

그토록 바래왔던 만남이었지만 막상 이런 식으로 마주치게 되니 어떤 말을 먼저 꺼내야 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나는 백지 상태가 된 머리에 간신히 
차선의 답을 써넣은 다음 제출했다.  

"..일단 다른 곳에서 얘기하는 게 어때?" 

그렇게 나는 반쯤 얼이 빠진 상태로 언니를 내가 살고 있는 자취방으로 안내했다. 자취방으로 가는 동안 나와 언니는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못한채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유지해야만 했다. 
나나 언니나 서로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잔뜩일 테지만 언니는 아마 나를 두고 갔을 정도의 큰 포부를 이루지 못한, 스스로가 느낄 자괴감 때문에, 
나는 초라해진 언니에게 어떤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할지를 몰랐기 때문이다. 

"많이 누추하려나..?"

현관 문에 들어서서 겨우 꺼낸 예의상의 한마디.

"아니, 전혀 그렇지 않은 걸" 

언니는 신발장에 올려 놓은 작은 마스코트 인형들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내가 뱉은 말은 예의 또는 가식이 발려진 형식적인 말이었지만 언니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흰색을 띄고 있었다. 
지나온 세월도 똑같을 뿐더러 겪은 시련으로만 따지자면 언니는 평지풍파를 겪은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유 언니는 어떻게 그 때의 순수함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나보다도 현실에 익숙해져서 감정을 숨기는 것에 능숙해진 것일까. 

시유 언니와 나는 탁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탁상 위에는 몇분 전 뚜껑이 따여 김이 빠진 캔맥주 두개와 자질구레한 안주 몇개가 전부였다. 

"정말 오랜만에 만났네"

"응.." 

침묵을 먼저 깬것은 시유 언니였다. 언니는 캔맥주를 입에 가져간 다음 두세모금 들이키더니 쓴소리를 내며 탁상 위에 캔맥주를 탁 소리를 내며 
내려놓았다. 

"그 때는 주스를 마시면서 수다를 떨었는데.. 우리 둘 다 벌써 이렇게 커버렸네" 

"응.." 

내 기계같은 대답에 만족하지 못해서 일까, 언니는 돌연 몸을 내 얼굴 쪽으로 가까이 들이밀더니 내 양볼을 살짝 꼬집었다. 

"ㅇ,언니!" 

난 얼굴을 양방향으로 흔들어 언니의 손을 떨쳐냈다. 옛날에야 언니의 이런 행위들이 그만큼 나를 귀여워 해주는 증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기뻐했지만 
이젠 그런 기분을 거의 느낄 수가 없었다. 언니의 친근한 장난을 웃으며 받아들이지 못한 건 언니가 나를 버렸다는 것에 대한 배신감도 이유라고 할 수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언니의 이런 장난을 받아주지 못 할 나이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좀 긴장이 풀려?" 

"어..?"

언니는 탁상 위에 있던 화장 거울을 들어 내 얼굴을 비춰주었다. 홍조를 띈채로 부풀은 양 볼과 보는 사람으로 하게끔 미소를 짓게할 정도로 귀엽게 
일그러진 미간 (내 입으로 말하기엔 창피한 말이긴 하지만 봤을 때의 느낀 감정을 그대로 말한 것이다), 마치 어린 시절, 시유 언니의 장난에 기분이 상해 
뾰로통해졌던 날 보는 것 같았다. 

"푸흐흐.."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언니도 나를 따라 웃음소리를 천천히 흘렸다. 곧 자취방 안은 잠깐 현실을 내려둔 두 여성의 싱그런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시유 
언니와 나는 서로의 사이를 멀어지게 했던 모든 것들을 잊어버린 채 둘만의 즐거웠던 이야기를 꺼내며 차가웠던 방 안의 분위기를 따뜻하게 데워갔다. 

"그 땐 단순히 네가 우는 걸 달래주려고 한 거 였는데.. 그렇게 듣기 좋았어?"

"응, 그 때 언니의 노래.. 잊을 수가 없는 걸"

"다시 불러줄까?"

"응? 나야 좋긴 한데.. 꽤 오래 전의 일이잖아. 기억할 수 있겠어?"

언니는 방금 딴 캔맥주를 거침없이 해치운 다음 발그레한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런 언니의 시선이 당황스러워 들고 있던 오징어 다리를 
조신하게 입 속으로 집어넣었다. 이윽고 언니는 목을 가다듬는 소리를 내더니 곧장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사랑의 대가로 이별하게 된다해도 - 사랑하는 아이들을 지킬 수 있다면 -그 무엇이라도 그 어떤 대가라도 - 두 형제 모두가 함께할 수만 있다면.."

언제 들어도 싫지 않은 시유 언니의 노랫소리, 맑디 맑은 언니의 목소리에 취기가 섞이니 그것은 그것대로 듣기 좋은 목소리였다. 때가 다르고 장소도 
다른 상황에서의 노랫소리였지만 내가 시유 언니의 노래를 듣고 느끼는 감정은 과거에 느낀 감정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어땠어?"

언니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난 환호성과 박수로 언니의 노랫값을 지불했다.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어" 

"..고마워" 

'예나 지금이나'라는 말이 맘에 걸려서 였을까. 밝은 색채를 보이던 언니의 낯빛이 잠시나마 어두운 빛을 띄더니 다시 밝아지지 못하고 은은한 색채로 
채도를 낮췄다. 난 다시 옛날 얘기를 꺼내서 방금 전의 분위기를 되살리려 했으나 이미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들은 전부 말해버린 상태였다. 시유 언니가 
예전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이상 이 가라앉은 공기를 바꾸는 건 매우 힘들어 보이는 상황이었다. 

"세미야.."

"..왜?"

"어쩌다가 서울로 올라오게 된 거야?" 

사실 대화의 첫주제가 되었어야 마땅한 말, 우린 이제서야 현재의, 현실의 이야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고민했다. 그 동안의 노력이 이 순간을 위해
존재한다 할지라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 나를 반기는 언니에게, 꿈을 이루지 못한채 작아진 언니에게, 어떻게 내 솔직한 생각을 토해낸단 
말인가. 

"그건.." 

결국엔 언니를 향했었던 애매한 애정과 증오 때문에 여기까지 왔다고 말하지 못했다. 내 얘기를 들은 언니는 고개를 묵념하듯 숙였다가 다시 천천히 
들어올렸다. 

"그랬구나. 수학을 좋아해서 여기까지.." 

다소 바보같이 들렸을 대답이었지만 언니는 순순히 믿어주었다. 오래 전서부터 이어져 온, 신뢰를 토대로 한 진실된 믿음인지 배려를 바탕으로 한 거짓된 
믿음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느 쪽이든 좋았다. 언니가 내 말에 의문을 제시하시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럼 앞으로의 꿈은 훌륭한 수학자가 되는 거겠네?"

"ㅇ,응" 

수학이란 학문을 제일 잘 이해함과 동시에 약간의 애착을 가지고 있었지만 수학자를 꿈꿔 본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시유 언니의 좌초를 봐서일까, 
난 애정을 가지고 있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다는 대단한 꿈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아프지도 슬프지도 않은 현실의 흐름에 몸을 맡겨 느리지만 
낙오될 일 없이 천천히 흘러 꿈을 이룬 것에 준하는 현실의 행복에 당도하는 것이 목표였다. 

"지금 과외해주는 애도 날 수학술사라고 부르지 뭐야"

어색한 추임새, 난 필사적으로 긍정적인 마음가짐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나의 근황에 대한 대화가 끝나면 이젠 언니의 차례다. 난 언니를 비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아니, 비참해져 있다는 걸 알지만 적어도 오늘의 기억 만큼은 언니를 동경의 대상이었던 그 때의 언니로 남겨두고 싶었다. 

"...."

"...."

하지만 소원은 소원일 뿐이었다. 침묵을 유지하면 유지할수록 내가 언니의 상태를 알고 있고 언니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해 말하기를 꺼려한다는 
사실을 암묵적으로 가르쳐 주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난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은 다음 그렇게 말하기 싫었던 내용의 말을 억지로 읊었다. 

"언니는.. 요즘.. 어떻게 지내?"

캔맥주를 마시는 척 하면서 고개를 푹 떨궜다. 언니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그냥 술에 취한 척 했으면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을까, 아니야 그래봤자 
맥주인 걸 더욱 쓸데없는 오해를 샀을 거야, 그렇다고 이런 상황이 오기를 바란 것도 아니잖아... 내 속의 두 자아는 방금 전 선택에 대한 신랄한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 

"잘 지내고 있어"

글자로만 보자면 지극히 틀에 맞춰진 대답이었지만 그 글자를 읽는 시유 언니의 억양은 매우 활기찼다. 마치 내일은 무슨 일이 일어날까 기대하는 
어린아이처럼. 

"요즘은 너무 바빠서 탈인 걸" 

난 가까스로 겉으로의 평정을 유지한채 고개를 들었다. 언니의 얼굴에는 한점 근심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바라던 꿈이 두동강 나버린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뭐 하면서 지내는데?"

꽤나 가시 돋힌 대답을 했다. 내가 생각하고 있던 시유 언니의 모습과는 너무 다른 모습에 배신감을 느끼고 말았다. 난 언니가 걸은 길을 따라 걸으면서 
현실에 발을 적시고 이젠 온 몸을 담궜다. 하지만 정작 언니는 여전히 꿈의 주민을 자처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람들이 많은 곳을 찾아가 길거리 라이브를 하고 있어" 

"하루 종일?"

"거의? 생활비가 떨어지면 간단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어"

언니 정도의 노래 실력이라면 어느 누구도 언니의 노래를 싫어하지는 않을 것이고 남은 시간을 이용해 언니만의 취미 혹은 여가를 목적으로 했다면 
이렇게 격렬한 거부감을 느낄 일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언니의 마음 속에 숨어 있던 네버랜드는 날 미치게 만들었다. 

"아직까지도 그 바보같은 꿈을 꾸며 산단 말이야?!"

기어코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취기가 오르긴 했지만 그것과는 별개인 내 밑바닥의 발악이었다. 

"언니 제발 정신 좀 차려!! 이젠 현실을 직시하란 말이야!! 그렇게 꿈에 매달려서 얻는 게 대체 뭔데?!"

언니에게 윽박지르듯 폭언을 내질렀다. 처음으로 드러난 나의 밑바닥은 꽤나 거칠었고 추했다. 언니가 지금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 지는
알 수 없었다. 내 두 눈 속의 언니는 나선 모양으로 배배 꼬여 있었기 때문이다. 

"아~!! 그리고 내가 왜 여기까지 올라왔는지 진짜 이유를 가르쳐 줄까?! 그건.."

분노는 밑바닥도 모자라 그 밑에 묻혀 있던 나의 진심까지 퍼올렸다. 나는 속시원하면서도 자랑스럽게 그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내 두 눈 속의 언니는 점점 기이한 형태로 그 모습을 바꿔갔다. 

"..알겠어?! 난 언니 없이도 성공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여기까지 온 거야!! 근데 언니는..!!"

난 방금 했던 말을 요약해서 다시 외쳤다. 하지만 말끝이 흐려지는 이유는 대체..

"언니는 왜.."

기계가 열을 올리면 그 열을 식혀주는 역할을 맡는 것이 냉각수다. 내 감정을 기계로 친다면 폭주에 가까운 열을 낸 것임에 다름 없고 필시 
냉각수로 열을 식혀 주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내 감정을 식혀주는 냉각수는 차갑기는 커녕 따뜻한 느낌이었다. 

"왜 이렇게 작아진 건데"

양팔 사이에 고개를 파묻고 소리내어 울었다. 꿈을 이루지 못한 언니에 대한 동정인지, 언니를 좇다 현실에 낙오된 내 자신의 신세가 처량해서인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나마 한가지 정확한 것은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은 슬픔이며 이 감정을 배출해내는 방법은 오로지 눈물을 흘린다는 것 
밖에 없었다.  

또 다시 침묵의 시간이 찾아 왔다. 일순의 감정에 휘둘려 마음 속의 응어리를 게워내는데만 집중했던 나는 옷소매의 일부를 탁한 색으로 물들이고 나서야
어떤 짓을 저질렀는 지를 깨달았다. 언니의 기분은 일절 생각치 않은, 마치 어린아이가 때를 쓰는 것과 같은 행동을 보이고 만 것이다. 언니가 알고 있던 
착한 동생 세미는 오늘 부로 죽을 것이 분명했다. 

분명 내 감정을 식힐 냉각수는 흘려보냈다고 생각했지만 내 양 볼에는 또다시 두 줄기의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익숙한 온기가 내 흉부를 둘러씼고 
등에선 구름과도 같은 것이 촘촘한 섬유 구멍 사이를 뚫고피부를 간질였다. 젖을 대로 젖은 소매로 눈가를 비볐다. 그리고 고개를 살며시 들어 언니가 
있는 쪽을 보았다. 언니는 그 자리에 없었다. 흉부를 감싼 온기는 더욱 부드럽게 조여 들어왔다. 

"미안해 세미야"

언니의 품에 안겨 다시 한번 눈물을 왈칵 쏟았다. 이렇게 눈물을 자부 보여서야 라온이 한테도 제대로 된 선생님이라고 불릴 수도 없겠는 걸. 언니의 작은 
사과는 응어리가 사라져 텅 비어있던 속에 한없이 따뜻한 숨을 불어 넣어 주었다. 언니의 작디 작은 손이 내 머리칼을 천천히 쟁기질했다. 

"그렇게.. 히끅.. 심한 말을 했는데.. 어떻게 웃을 수가 있어? 내가.. 미,밉지 않아?"

한참을 울고 나서 눈물도 심지어는 콧물도 닦지 않은채로 언니를 올려다 보았다. 언니의 미소는 날 떠나지 않았다. 다행이라는 생각보다는 궁금하단
생각이 앞섰다. 내가 언니에게 멋대로 내지른 폭언은 언니에게 있어 충분히 모멸감이 느껴질 내용이었다. 

"네가 한 말 중에서 틀린 말은 하나도 없어.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걸"

언니는 맨손으로 내 눈물과 약간 흐른 콧물을 닦아 주었다. 

"언니.."

"다 맞는 말인 걸 어떡해. 나를 위한 네 마음을 무시했던 내 잘못이 커"  

언니는 개구장이가 장난을 저지르고 나서 자신을 혼내려고 하는 어른에게 변명을 할 때 처럼 혀를 샐쭉 내밀었다. 

"그 때의 나 참 못 됐어. 남은 전혀 생각하지도 않고 내 생각만 잔뜩 했거든. 뭐, 결과는 좋았지만.."

어느샌가 나는 언니의 사타구니에 누워 할머니의 전래동화를 듣는 아이같은 자세로 언니의 독백을 경청하고 있었다. 살짝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일어날려고 해도 언니는 다소곳이 손을 모은 척 하면서 내가 일어나지 못하게 머리를 약하게 짓누르고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일어날 정도의 
세기였지만 언니의 바람도 있거니와 이 정도로 언니와 밀착해 본 것도 간만이란 느낌이 들어 언니의 뜻에 순응해 더 이상 저항하지 않고 고개를 언니의 
허벅지 쪽으로 돌려 언니의 내음을 한껏 맡았다. 

"그렇다고 결과가 또 좋음 뭐 해. 남들과 소통하지도 않고 독선적으로 밀어 붙여서 얻은 결과였는데. 사람들 앞에서는 가수로써 웃었지만 마음 한 구석이 
아린 건 여전했어" 

"..."

"물론 마음 한 구석이 아렸단 얘기는 그 부분을 제외한 다른 곳은 괜찮았다는 얘기야. 다른 사람들에게 느꼈을 죄책감 보다는 꿈을 이뤘다는 기쁨이 더 
컸다면 이해가 될까?" 

언니의 손길은 내 머리칼을 지나 귓볼로 향했다. 얘기하는 동안 손이 심심하기 때문에 한 행동일지도 몰랐으나 그렇다고 말하기에는 언니의 손길은 
너무나도 섬세했다. 기어코 난 순간의 오르가즘을 느껴 언니의 말의 일부분을 듣지 못하고 말았다. 언니는 자신의 손재간이 연인 사이의 애무보다도 
자극적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채 끝내지 못한 자신의 고백을 이어 나갔다. 

"바닥으로 떨어져서야 모두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졌어. 인형 눈을 붙이며 생계를 이어 나가시던 어머니, 이따금씩 노래에 관한 조언을 해주시던 서혁 
아저씨, 그 외에도 여러 사람들이 떠올랐어. 하지만 이 사람들은 적어도 나의 꿈에 조금이나마 성원을 보내주던 사람들이었어" 

시유 언니의 말에 눈꺼풀이 천천히 올라갔다. 

"마지막까지 날 붙잡으려고 했던 세미의 모습이 날 괴롭히기 시작했어. 세미가 날 붙잡으려고 했던 의도가 나쁘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어. 오히려 
순수하고 당연했지. 그렇게나 좋아했던 언니가 자신의 눈 앞에서 사리진다는데 그걸 가만히 보고 있는 게 더 이상하지 않겠어? 하지만 떠나기 전 나는 
세미와의 대화에서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어. 세미의 애정이 약간의 증오로 변모했다는 걸"

언니는 내 머리맡을 자신의 허벅지 근처에 눕혀 두고도 제삼자의 이야기를 하는 듯한 어조를 선보였다. 난 무슨 말이라도 해볼려고 했지만 그새 언니의
손은 내 볼을 횡방향으로 가로질러 입술에 검지 손가락을 살포시 얹었다. 

"무서워 졌어. 세미의 얼굴을 도저히 볼 수가 없었어. 이대로 고향에 돌아가도 다들 위로의 한마디 정도는 해주겠지만 세미는 정반대일 거라고 생각했어. 
자신을 버리고 꿈을 택했다고 생각할 세미에게 초라한 내 모습은 경멸받기에 적당한 모습,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어"

시유 언니는 정확히 과거의 나를 꿰뚫고 있었다. 언니 또한 언니의 마음 속에 있는 나를 의식했던 것이다. 다른 점이 있었다면 언니는 대면이 아닌 회피를 
선택했다. 

"세미에게서 도망치다 보니 자연스레 현실에 익숙해졌어. 아르바이트를 할 때도 있었고 내 특기를 살려 밤무대에서 일하는 것 까지도 해봤어. 밤무대 
일은 겁을 먹어서 금방 관두긴 했지만. 뭐, 어쨌든 지금의 너랑 거의 다를 게 없었어"

언니는 이제서야 날 3인칭이 아닌 1인칭으로 불러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러니까 대략 한달 전. 전단지를 돌리는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우연히 길거리 버스킹을 목격했어. 노래 실력은 솔직히 변변찮았어. 
주위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그다지 많지 않았거든.  그래도 처음으로 버스킹을 볼 기회가 생겼기에 난 당장 해야 할 일을 멈추고 소리가 나는 곳으로 
달려갔어"

언니의 이야기에 나는 점점 빨려 들어갔다. 마치 한편의 드라마 혹은 영화를 보는 기분이었다. 

"버스킹을 하고 있던 그 아이는 풋풋함이 느껴질 정도로 어색한 실력이었지만 그 아이에겐 그런 사항 따위 관계 없었나 봐. 그 아이는 진심으로 즐기고 
있었어, 행위의 숙련도와는 일절 관계 없이 그 행위 자체를 진심으로 좋아했어. 그 아이를 본 이후로 난 다시 꿈을 꿀 수 있게 되었던 거야"  

"크큭, 언니 너무 무리하지마" 

"얘도 참, 이렇게 진부한 얘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이 얘기가 진실이란 증거야. 흠흠! 다시 그 때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꿈을 다시 꾸게 된 나는 하나의 
어줍잖은 이론을 세웠어"

"뭔데?"

은근히 내 질문을 바라는 투여서 말이 끝나자 마자 질문했다. 

"꿈의 도피처가 꼭 현실일 필요는 없다"

"어..?" 

"난 이렇게 생각해. 실제의 노력 혹은 과감한 망상이 꺾여 바닥에 떨어졌다 해도 꼭 바닥을 기어야 할 필요는 없다고 말이야" 

난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내비쳤다. 실제로도 그러했다. 언니는 땀을 흘리며 고민하다 적당한 설명 방법을 생각해 냈는지 내가 누워 있던 
반대 편의 무릎을 탁 쳤다.

"꿈의 크기를 구분짓는 건 옳지 못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말해야 쉽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으니 이해해줘. 우리가 처음 목표로 삼는 꿈은
대개 커다랄 거야.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그 커다란 꿈에 접근해 있을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이 현실에 주저앉아 있을 게 분명해. 그리고 그 주저앉은
사람들의 대부분은 자신이 꿨었던 꿈을 이따금씩 떠올리며 현실만을 바라보며 살 거야. 하지만 절대 그럴 필요는 없어. 우리는 각자가 원한다면 
현실과 타협함으로써 자신이 어린 시절 꿨었던 꿈의 크기를 줄이고 줄여 순수히 자신이 하고픈 일이면서도 현실을 고려한, 자신의 주변에서 부터 이뤄갈
수 있는 꿈을 꿀 수 있는 거야"

이해가 될듯 말듯한 설명에 시유 언니는 드디어 종지부를 크게 찍었다. 

"꿈을 이루지 못했다면 그보다 작은, 하지만 언제든지 올라갈 발판이 마련되어 있는 그런 꿈으로 도망가"

옆에 있었으면서도 간과한 것 같은 사실, 먼 길을 되돌아 온 기분, 나는 언니의 긴긴 설명을 듣고 할 말을 잃어버렸다. 언니는 내 머리를 아래에서 
위로 살짝 들어올리는 시늉을 해 내가 일어서게 만들었다. 약간 생각의 시간을 가졌다. 내 꿈은 시유 언니에 관한 꿈이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이런 꿈이 
언니 가 말한 꿈의 범주 안에 들어가기는 하는 걸까. 

"세미야"

"..?!"

언니는 와락 나를 껴안았다. 기분이 좋으면서도 그 의미를 알 수 없었기에 호기심도 섞여 들어가 애매모호한 기분을 만들었다. 

"너의 과거를 빼앗아서 정말 미안해. 하지만 이제부터는 나.. 언제든지 네 곁에 있을 거야. 그러니까 이젠 너도 널 위한 꿈을 꿔" 

...세번 씩이나 울면 안되는데, 눈꼬리에 달린 이 물방울을 이슬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까. 

"응, 그럴게. 고마워 시유 언니"

아직 늦지 않았다. 언니도 내 곁에 있다. 이제부터라도 지금까지 내가 그렇게 하고 싶어했지만 숨겨왔던 것들을  내놓아 손질한 다음 주변서부터 하나씩 
쌓아 나가자.

..... 


"안녕하세요. 라온이 어머니" 

"어서 와요. 세미씨"

매주 수요일은 라온이의 과외가 있는 날이다. 시간은 8시 무렵이지만 오늘은 개인적인 사정으로 시간을 두시간 앞당겨 6시에 방문하기로 했다. 라온이는 
아직 놀이터에서 돌아오지 않은 것 같았기에 난 라온이의 어머니와 식탁에 마주 앉아 간단한 담소를 나누었다. 

"그나저나 세미씨 다시 장학금을 받고 있다며? 축하해. 앞으로 있을 수학 석사과정도 잘 해낼 거야"

"고맙습니다"

"우리 라온이도 세미씨 반만큼이라도 공부를 잘하면 좀 좋아.."

"걱정 마세요. 라온이는 제가 확실히 붙잡아 둘테니까요" 

"그럼 세미씨만 믿고 있을 게. 호호"

마침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가 나며 라온이가 집으로 돌아 왔다. 일단 당연한 수순으로 라온이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 벌을 받은 다음 내게도 약간의 
잔소리를 들으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세미 누나는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빨리 온 거에요"

라온이는 툴툴거리며 수학 교재를 펼쳤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약속을 어긴 사람이 빈정거리는 적반하장의 모습이었으나 그 형태가 어린아이 였기에 
되려 그 나이대 특유의 귀여움이을 느낄 수 있었다. 

"오늘 특별히 볼 공연이 있는데 시간이 과외시간이랑 딱 겹치거든" 

"어디서 하는 공연인데요?"

"홍대"

라온이는 잠깐 눈을 빛냈다가 홍대라는 말을 듣고는 실망한듯 푸시식 김이 빠지는 소리를 냈다. 

"난 또 뭐라고.." 

"무시하면 못 써. 공연의 메인 보컬은 내가 아는 사람이야. 사인이라도 가져다 줄까?" 

"됐네요~ 수학술사 누나. 얼른 진도나 나가시죠" 

살짝 놀랐다. 그렇게 뺀질거리던 라온이가 처음으로 공부에 의욕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 대화가 그다지 재미가 없어서 그러는 걸 수도 있었지만
매번 시시콜콜한 대화를 걸던 과거의 라온이와 비교하자면 장족의 발전을 이룬 것이었다. 

"뭘 그런 눈으로 보세요"

"기특해서" 

라온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라온이는 겉으로는 싫어하는 척 하면서도 내 손을 마다하지 않았다. 

"..저 꿈이 생겼어요" 

라온이가 점점 성장하고 있다고 느끼곤 있었지만 지난주의 라온이와 요번주의 라온이는 하늘과 땅 차이가 날 정도로 달라 보였다. 벌써 사춘기가 온 걸까나.

"가르쳐 줄 수 있어?"

라온이는 입을 웅얼거리다 고개를 숙이고선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가르쳐 주고 싶지 않으면 안가르쳐 줘도 돼"

"...누나"

"어..?"

"누나같이 수학을 잘 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나도 시유 언니와 같이 누군가가 닿고 싶어하는 목표가 되어 있었다. 엄연히 말하자면 난 언니 그자체를 원했던 것이었고 라온이는 나를 모델로 한 
미래의 자신을 원한 것이었다. 그래도 라온이의 포부는 내 가슴을 잠깐이나마 먹먹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어.. 미안한데 라온아. 잠깐 다른 얘기를 할 수 있을까?'

"뭔데요?"

"라온이가 품은 꿈에 관한 이야기야"

라온이는 꿈 얘기가 또 나오자 쑥스러운 듯 볼을 붉게 물들였다. 

"지금 당장 이해하지 못해도 좋으니까 누나가 하는 말을 잘 들어줘"

"네.."

언니, 정말 고마워. 언니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었고 이젠 막 꿈을 가진 아이까지 그 꿈을 지킬 수 있도록 만들어 줄 수 있을 것 같아. 

"가장 소중한 사람들 중 한명이 가르쳐 준 얘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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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픽은 언제나 자기만족겸 필력의 향상을 위한 것.. 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이번에 쓴 팬픽은 제가 여태껏 생각하고 있던 것을 담아 봤습니다.
그만큼 흑역사의 농도가 짙어진 느낌도 납니다. 

아무쪼록 긴 글, 재밌게 보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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