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죽음과 하이데거 그리고 현실
게시물ID : phil_812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레고맨
추천 : 3
조회수 : 658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4/02/03 02:53:18
오늘도 일요일 오후에 느긋하게 방에서 뒹굴거나, 오유에 글을 남기려 했다.
하지만 오늘 아침 갑작스럽게 어느 어르신의 부고를 듣게 되었고,
지금 난 논산까지 내려갔다 올라오느라 녹초가 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쓰는 건
논산까지 내려갔다 올라오는 내내 내 머리속을 맴돈 단어 죽음과 죽음하면 떠오르는 철학자 하이데거 때문이다.
그렇다. 하이데거...
모국인 독일에서조차 우스개소리로 하이데거의 책이 언제 독일어로 번역되느냐고 되물을 정도로 어렵다던 그 하이데거...
 
그의 사상을 조금만 간략히 요약해 보자.
 
그는 인간을 현존재 또는 세계-내-존재로 정의한다.
쉽게 말해 인간은 이 세상에 '내 던져진' 존재, 즉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 세상에 태어나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 누구도 자신의 국적, 고향, 부모, 형제, 성별, 생년월일을 선택할 수 없다.
빈부격차, 지위고하, 주위환경, 시대상황 등은 내 맘대로 결정할 수 있는 조건이 아니다.
황제조차 파도를 멈추게 할 수는 없다.
인간은 그저 태어났기에 살아가고, 살아있기에 죽어갈 뿐이다.
인간은 그저 이 세계 속(세계-내)에 '내 던져진' 존재이자 '내 던져진' 세계 속에서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존재에 불과하다.
 
이러한 존재방식을 '여기에-있음'이라 하는데,
어떤 것을 잃어버리게 놔두다. 포기하다. 알아보다. 시도하다. 제작하다. 등의 방식으로 나타난다.
즉 단순히 주어진 대로 살아갈 수도 있지만, 주어진 것을 극복하며 살아갈 수도 있는 것이다.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인간은 이 세계를 살아간다는 점에서 이 세계에 '처해 있는' 존재이자,
자신의 존재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점에서 '탓이 있는' 존재라는 점이다.
이때 자신의 이러한 존재방식을 이해한 것을 '본래적'이라 하고 주어진 대로만 사는 것을 '비본래적'이라 한다.
 
문제는 인간이 이 세상에 내 던져지길 원하지 않았다 해도,
어쨌든 이 세계에 내 던져진 이상, 이 세계와 어떤 방식으로든 관계를 맺으며 살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지구라는 환경... 물, 불, 흙, 공기 없이 살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인간은 물을 마시기도 하고 물에 휩쓸리기도 한다.
불로 고기를 굽기도 하고 불에 타기도 한다.
흙을 밟고 서기도 하고 흙으로 토기를 만들기도 하며 흙에 깔려 죽기도 한다.
공기를 마시기도 하지만, 바람을 빌려 풍차를 돌리고 범선을 조종하기도 한다.
물, 불, 훍, 공기가 지닌 특성에 따라, 그 특성에 맞춰 이용해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자신과 '더불어 있는' 세계 속에서, 이 세계가 제공하는 방식대로 살아가야 한다.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대로 살아간다. 비본래적으로 살기를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의 모습을 '그들'이라 지칭하는데, 쉽게 말해 현대사회의 '대중'을 의미한다.
이들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타자과 '거리감'을 줄이기 위해,
즉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나 자신과 함께 사는 공동체 구성원들을 이해하고 그들과 '평준화'되기 위해
마치 어린왕자에 나오는 어른들처럼 '잡담'을 나누며 살아간다.
이 세상을 어떻게 이해할지, 어떻게 다룰지에 대한 생각을 서로 공유하는 것이다.
이러한 삶은 '공공성'을 약속한다. 나와 너의 생각이 똑같아지는 세상, 내가 소외될 필요가 없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공공성 속에서는 내가 '나'일 필요도 없기에 나에 대한 책임까지도 함께 사라져 버리고 만다.
타인의 기준에 맞춰 살다 정작 자기 자신의 삶은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익명성에 나를 맡기는 삶...
이러한 '몰입', 즉 '빠져 있음'의 삶은 안전하고 편안한 삶이다.
달콤하기에 빠져 나오기 싫은 아침의 단잠 같은 삶...
매트릭스의 네오가 빨간약 먹을래 파란약 먹을래 다그쳐도 침대 안에서 뭉그적대게 만드는 삶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그들'이 제정신을 차리게 되는 순간이 찾아온다.
일상에 몰입해 살아가는 삶... 영원히 지속될 것 같은 삶에도 불과하고... 결국 모든 삶에는 끝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더 이상 '그들'이 될 수 없는 순간, 즉 죽음이 찾아오는 것이다.
 
물론 인간은 죽기 전까지 자신의 죽음을 경험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다.
죽고 나서는 더 이상 살아있을 수 없으니까... (이 지독한 아이러니...)
그래서인지 보통은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채 살아가게 된다.
하지만 주변 지인들의 죽음을 볼 때, 우리는 자기 자신도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새삼 돌아보게 된다.
지금은 자신이 타인의 죽음을 바라보고 슬퍼하지만, 미래에는 타인이 자신의 죽음을 바라보며 슬퍼할 거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타인의 죽음은 자신의 죽음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리고 자신의 죽음을 떠올렸을 때, 인간은 불안에 빠져들게 된다.
불안은 쉽게 떨쳐버릴 수가 없다.
불안이란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를 때 드는 기분인데,
지금 자신은 자신의 앞날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채, 언젠가는 자신이 죽어야 한다는 사실만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죽는다면 모를까... 살아있는 한 인간은 끊임없이 죽음을 떠올려야 한다.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처럼 공존하고 있다.
물론 살아있다면 죽은 것이 아니고, 죽었다면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살아있다는 것은 언젠가 삶이 끝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더 이상 내가 될 수 없는 시간, 즉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삶이란 자신이 태어난 이후 지금까지 죽음이 아직 찾아오지 않았기에 주어진 시간, 아직 죽지 않았음... 즉 '아직 아님'의 상태에 불과하다.
언제든지 죽을 수 있는데... 아직 죽지 않은 것 뿐이다.
살아있다는 것은 지금 당장 죽을지도 모르는 순간들을 버텨내고 있다는 의미다.
다시 말해 무의미해질 시간을 유의미하게 만들고 있다는 게다.
인간이 죽음과 동시에 자신의 삶도 무의미해지고 만다는 사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내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사실...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지금 현재를 돌아보게 만든다.
그리고 지금 현재를 돌아본 순간, 우리는 아직 아님의 문제가 단지 죽음만의 문제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우리의 삶, 우리의 일상은 언제나 도전의 연속이고 미완의 연속이었다.
도전하고 성취해도 또 다시 새로운 도전과 마주해왔다.
대학에 입학하면 취업이, 취업에 성공하면 결혼이 기다리는 식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유의미하게 만들어왔지만, 그 의미를 완성시킨 적은 없었다.
이런 식이라면 우리는 결국 죽기까지 아무것도 이루어내지 못한 셈이 되고 만다.
아직도 이루어내야 할 것들이 남아있는 부단한 미완의 상태, 아직 아님의 상태에 머물고 마는 것이다.
덕분에 인간은 죽기까지 '비전체적'일 수밖에 없다.
불안이 죽음에 대한 불안을 넘어 내 삶에 대한 불안, 내가 무엇을 이루어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불안으로 나아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는 내가 살아있는 동안, 무엇인가 이루어내야만 하는 것이다.
 
'염려'란 이러한 불안을 넘어 자신의 한계를 어떻게 극복하고 그 삶을 만들어갈 것인가에 대한 궁리이며,
'기투'란 이를 위해 미래를 계획하고 계획에 따라 노력하기를 '결단'하는 것을 의미한다.
 
죽음과 마주한 현존재는 살아있지만, 영원히 살 수는 없는 존재다.
현존재란 단지 자신의 한계, 자신의 불안을 이해하고 자신의 본래적 모습을 찾으려 결단할 수 있는 존재에 불과하다.
죽을 수밖에 없는 현실 속에서 자신이 죽기까지 자신의 삶을 자유롭게 만들어갈 수 있음을 깨닫고 실제로 자신만의 삶을 만들어가는 존재,
'죽음을 향한 자유'를 지닌 존재에 불과한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렇게 자기 자신을 만들어가는 삶, 자기 삶의 의미와 가치를 스스로 찾아가는 삶을 본래적인 삶이라고 보았다.
 
참 아름답다...
인간의 한계와 그 한계를 극복하려는 노력, 삶의 의지를 이렇게 멋드러지게 풀어낸 사람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여기서 언급한 내용은 하이데거 철학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정말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고 무릎을 치게 만든다.
하지만 현실은 이론과 다르게 흘러간다.
 
독일의 대철학자는
그렇게 죽음을 이야기했건만...
현존재가 자신의 본래성을 깨닫게 되는 계기가 죽음임을 그렇게 역설적으로 외쳤건만...
 
논산의 어느 장례식장에서 본 것은
타인의 죽음을 보며 자신의 죽음을 돌아보고 그 죽음에 전율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의 가족과 친지들을 위해 찾아온 사람들...
얼굴이라도 내밀어 인사치례를 해야 하는 사람들...
자신이 낸 부의금이나 자신이 내야 할 부의금을 계산하며 찾아온 사람들... 이었다.
죽음이 실재하고 있던 그곳에 죽은자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하는 사람들은 있어도 정작 죽음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그 누구도 없었다.
(이 무슨 시뮬라시옹적인 상황이란 말인가?)
그 어르신의 장례에 정작 그 어르신은 없었다.
모두 그 어르신과 관계된 자기 자신을 위해... 산 자들이 산 자들을 위해 모여 있었던 게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다시 말해 이론은 이론이고 현실은 현실이다.
 
죽음 앞에서 죽음을 마주하지 못한 채, 평범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그들이 문제였을까?
아님 죽음을 신화화시킨 어느 철학자가, 그의 철학에 한계가 있었던 것일까?
산 자들은 죽음조차 돌아보지 못할 때가 많다.
하지만 그들은 단순한 '그들'이 아니다. '그들'보다 못한 것도 아니요, '그들'보다 나은 것도 아니다.
대철학자에겐 죽음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그들'이겠지만,
그들은 그들만의 기준과 질서 속에서 그들만의 삶을 충실히 살아내고 있었다.
 
대철학자는
모두가 죽음을 돌아볼 것이라고 죽음을 돌아보고도 자신의 본래성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하기 전에...
죽음을 돌아보기도 벅찬... 삶에 치여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부터 봐야 했던 것은 아닐까?
그들에게도 그들만의 실존적 삶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하지 않았을까?
그 무지와 독선, 무관심과 나태함, 습관적이고 무책임한 행동 속에도 진실이 숨어있다는 점을 돌아봐야 했던 것을 아닐까?
무가 존재의 근거라면 역겨운 거짓도 본래적 진리의 근거가 될 수 있다.
어쩌면 그 한계가... 그 실오라기 같이 작은 한계가... 그를 나치 부역자로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망할 건 없다.
그 실오라기 같이 작은 한계가 있기에... 우리는 계속해서 답을 찾기 위해 헤멜 수 있지 않은가?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