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1970년대 발생한 아주 재미난 사건에대해 이야기를 해볼까해요.
혹시, 정동행성이라고 아시나요?
정동행성은 고려말, 원나라(몽골)군이 일본을 정벌하기위해 합포(현, 경상남도 마산)지역에 쌓았던 전초기지입니다.
마산이라는 지명은 몽골군이 대부분의 편성이 말이였기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라고 지역역사학자들은 흔히말합니다.
그 이후, 정동행성은 배극렴이가 지은, 합포성이라는곳으로 이전하게됩니다.
정동행성이 공민와에의해 폐쇄된이후 이 합포성은, 고려의 경상우도병마절도사령으로 사용하게됩니다.
매우 역사적,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유적지라고 볼수있습니다.
이런 합포성은 기존의 읍성과는다르게 매우 규모가 컸다라고 볼수있습니다. 경상우도병마절도사령(경상우병영)으로 사용될정도로
행정/군사적 요충의 중심지라고 볼수있습니다.
그이후 이 합포성은 조선전기, 임진왜란 종전까지 경상우도병마 절도사령(경상우병영)으로 계속사용하게됩니다.
임진왜란 종전이후로는, 이 경상우병영이 진주성으로 이전했기때문에 실질적인 군사/행정의 중심역활을 하지못했지만
성벽과 성루등의 성으로써의 기능은 그대로 했던것으로 보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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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사진은 1930년대 일본인이 촬영한 당시의 합포성 사진이며 그 다음 것들은 각 시기별로 촬영된 합포성의 항공사진입니다.
1947년도 사진은 미군이 촬영한 것인데 흐릿하게 보이는 사각형 윤곽이 성지(城址)입니다. 1967년 이후의 사진은 국토지리정보원 보관자료이며 이상길 교수의 도움으로 올렸습니다.
<1930년대 합포성 모습>
<1947년 합포성 일대 항공사진>
<1967년 합포성 일대 항공사진>
<1975년 합포성 일대 항공사진>
<1982년 합포성 일대 항공사진>
<2008년 합포성 일대 항공사진>합포성은 방어상 목적 때문에 해안에 바로 접하지 않고 내륙에 입지하였으며 내성과 외성이 있었다고 합니다.
현재 지명인 '합성동'은 내성 외성을 합했다고 해서 '합성'이 되었다는 설도 있고 '합포성'을 줄여 '합성'이 되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이 성의 구조에 대해서『동국여지승람』창원도호부 관방조에는
「右道兵馬節度使營 在古合浦縣距府十三里 石城周四千二百九十一尺 高十五尺 內有五井 裵克廉築」이라고 하여,
「우도병마절도사영은 옛 합포현에 있으며 창원도호부에서 서쪽으로 13리 거리에 있고 석성(石城)인데 둘레가 4,291척이고 높이는 15척으로서 성안에는 우물이 5개소 있으며 배극렴이 쌓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래 사진은 현재 합성동 어느 주택 담벼락에 남아있는 합포성벽입니다. 정확한 위치는 합성동 155-42번지입니다.
가벼운 현대식 블록 담장을 떠 받치고 있는 오래된 과거의 석축이 내 눈에는 마치 '시간의 낙관(落款)'처럼 보입니다.
합포성 성곽유적 일부가 유형문화재로 남아 이처럼 보존되고 있습니다.
<합포성 성곽 유적>
다음 그림은 대동여지도에 표시된 합포성입니다.
중앙 상부의 원형 표식 안에 '창원'이라 적은 것이 의창동에 있었던 창원읍성이고 그 좌하의 작은 원형 표식 위에 고병영(古兵營)이라고 적은 것이 합포성입니다.
다음 그림은 이상길 교수가 복원한 합포성의 위치를 현재의 지도 위에 표시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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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의 정동행성, 경상우병영 조선전기의 경상우병영으로
사용했을만큼 매우 유적으로써의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곳입니다.
그런데 이 유적지가 1970년대에 산업골자재로 우리손으로 파괴했다라고 말하면 믿으시겠습니까?
우리나라의경우 숱한 외침과 전쟁(임진왜란, 일제강점기, 한국전쟁)으로인해 유적지가 원형 그대로 남아있는경우는 아주 희귀하고 드뭅니다.
경복궁 창덕궁을 비롯 수원화성 석굴암등 대부분이 축대나 성곽만남기고 거의 소실되거나
형체를 알아볼수없게되었다던지 변형이 된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기때문에 이러한 유적물들은 대부분이 현대에 들어와서 사료와 고증을 중심으로 복원과정을 거칩니다.
그런데, 저 합포성의경우 1970년대까지 축대는 물론이거니와 성벽. 성루와성곽,망루,성문,해자등이 고스란히 남아있었습니다.(일제강점기 사진 참조)
군사적인 요충지였지만 진주로 우병영이 옮겨가면서 사용하지않았기때문에 관심이 없었기때문이였겠지요.
또, 한국전쟁도 신기하게도 비켜갔기때문에 복원을한다면 충분히 복원을 할수있는 유적지입니다.
위사진을 보시면아시겠지만 1970년대에 들어오면서 성의 흔적자체가 사라지게됩니다.
1970년대에는 마산에 자유무역지역을 조성하게됩니다.
봉암갯벌을 비롯한 그일대의 갯벌을 매립해서 공단을 조성하는데, 많은양의 흙과 돌같은 건축 골자재들이 필요합니다.
사실 이러한 자재는 꼭 마산이아니더라도, 다른지역에서 공수해올수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정부는 시간과 돈을 절약하기위해 아주 좋은(?)아이디어가 떠올랐나봅니다.
이 합포성을 철거 허물면서 석성이기때문에 이 돌을 이용해 자유무역지역을 매립하는 골자재로 사용한겁니다.
즉, 마산자유무역지역은 대한민국의 산업화와 경제성장의 견인차역활을한 관문공단입니다.
그러나 이 산업화와 경제성장뒤에는 우리손으로 제살을깍아 만든 이러한 유적지가 있었음을 알려주기위해 이 긴글을썻습니다.
고려이후 700년동안 숱한외침과 전쟁에도 살아남은 유적지를 한순간에 무너뜨려버렸지요.
전 이사실을알고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세계2차대전당시 프랑스의 비시정부는 파리 에펠탑을비롯한 유적지가 소실되지않기위해 나치에게 무혈입성하게합니다. 물론 옳은선택이였는가라고는 볼수없지만 대부분의 나라들이 유적지가 소실되지않기위해 매우 많은노력을 기울입니다.
전 후손들에게 무엇을 물려주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위의사진은 합포성일부가 남아있고 합포성지라는이름아래에 보존되고있습니다.
그러나 이 합포성지는 주택가 한가운데를 관통하고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만 내뿜을 뿐입니다.
복원계획이나 유적공원과같은요소가 계획되어있지않기때문에 주민들에게 외면받고 소외받는 불쌍한 유적이 되어버렸습니다.
저는 이만큼 경제성장을 했듯이 현정부가 책임지고 확실히 이 유적지를 복원해주었으면합니다. 얼만큼의 예산이 소모될지는 미지수지만은 후손들에게 물려줄 자산이있는 사회가 되었으면합니다.
긴글읽으주셔서감사합니다.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