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난 김 권사는 기도의 힘으로 삶의 어려운 순간들을 이겨낸다고 했다. 돌아보면 나라가 어려웠던 시기에 초대 주일대사, 외무부장관 등으로 왕성한 외교활동을 펼쳤던 부친의 당당함 또한 할머니의 기도로부터 비롯된 것이라 생각한다고. 김 권사의 조모는 남대문교회 조원통 권사이며 조부는 김해에 첫 성결교회(현재 김해중앙교회)를 세웠던 김병우 장로이다. 출처: 한국 장로신문 http://www.jangro.kr/Jpeople/detail.htm?aid=1328687884&PHPSESSID=acdufkrg 그렇게 부산, 김해지역에 최초의 성결교회를 세울만큼 신실한 기독교 가문이 대한민국의 악질 친일파 집안인데 시간이 지나서 아무도 기억 못할 줄 알고 친일 꼬리표는 지워내고 존경받는 외교관, 신실한 집안으로 재포장 하는게 유머 포인트. 정몽준 의원의 장인 김동조 전 외무장관의 친일의혹 부문은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2001년·창작과비평사)에서 등장한다. 브루스 커밍스는 이 책에서 김동조 전 외무장관을 같은 시기 고승이었던 승려 효봉과 비교해 기술하고 있다. 참고로 조계종 초대 종정과 가야총림 초대 방장을 지낸 효봉은 금강산 신계사에서 석두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으며 스승인 만공스님으로부터 한 번 화두를 들으면 엉덩이 살이 짓무를 때까지 물러서지 않는다하여 ‘절구통 수좌’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오직 수행에만 힘써 불교계 제일의 정진 스님으로 추앙받고 있다. <한국인이 일본에 협력한 훨씬 더 대표적인 예는 김동조(金東祚)의 경우로서, 그는 동족인 한국인을 감시하는 국립경관으로서 인생의 첫발을 내디딘 후, 결코 주저하는 법이 없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일본과 한국 사이를 빈번히 오가며 일본에 징용된 수많은 한국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저항을 일본인들에게 밀고했다. 나중에 일본인들은 그를 승진시켜 한국인들에게 식량과 다른 지급품들을 배급하는 전시 책임자로 삼았다. 1945년 이후 그는 미군정을 위해 역시 한국인들에게 식량과 물품을 배급하는 일을 했다. 이승만이 대통령이 된 후 그는 신설 외무부에 들어가서 차관으로 승진을 했다가 퇴직했다. 그는 1961년 군사 쿠테타 이후 여당과 중앙정보부에 외교고문으로 복귀했다.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협상에 기여한 후 그는 첫 주일 한국대사가 되었다. 대사로 재직하는 동안 “그는 일본 정치가들에게 뇌물을 준 매수꾼으로서 재일한국인 사이에서 악명을 떨쳤다.” 곧(1967) 그는 주미대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몇년 후 그가 미국의회 방문을 준비하면서 1백달러짜리 지폐가 가득 든 봉투들로 서류가방을 채우는 것을 본 고용인이 그 사실을 폭로하는 바람에 큰 물의를 빚었다.> 서울의 모 대학 김모 교수는 “‘세계적인 석학’ 브루스 커밍스가 정몽준 의원 장인이 김동조인 줄 알고 의도적으로 썼겠는가. 충분히 사실적 확인작업을 거친 다음에 김동조를 기술했을 것”이라고 밝힌 뒤 “다른 문제는 일단 접고 김동조씨가 일제치하 때 양곡 배급권을 실제로 갖고 있었다면 뭐(적극적인 친일행위)에 대한 보상차원으로 받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후생성은 본래 내무성에서 분리 독립된 관청이며 전쟁 중에는 징용노무자를 관리하는 데다, 후생성 보험국의 전신이 내무성 사회보험국이라 내무성 채용자를 후생성으로 보내는 등 인사교류가 잦으니 원한다면 그렇게 조치하겠다”다는 것이었다. 그의 권고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중 브루스 커밍스가 기술한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일본과 한국 사이를 빈번히 오가며 일본에 징용된 수많은 한국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저항을 일본인들에게 밀고했다’는 것과 김동조 전 외무장관이 회고한 ‘전쟁 중에는 징용노무자를 관리하는’ 부문과 비교해 보면, ‘일본에 징용된 한국인들의 저항을 밀고했다’는 부문은 차치하더라도 일단 징용 노무자를 관리했다는 것은 서로 공통적으로 맞아떨어진다. <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귀향할 수 있었다. 그 길로 나는 양산 통도사 입구인 신평의 인척집으로 피난, 영어공부에 열중하던 차에 8월 15일 일본 천황의 항복 방송을 들었다. 드디어 환희를 가슴속으로 외쳤으나 일본군이 아직 주둔하고 있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는 상황이라...(중략)> <일본잔재관리 숙청이라는 명목으로 당시 상무과장(경남도청)을 맡고 있던 나를 법제과장으로 보내면서, (중략) 좌천시키는 등 무리한 인사를 하자 모두 사직하고 서울로 떠났다.> <나는 도청에 출근하지 않은 채 동아대학에서 강의를 하다가 대한식량공사(식량영단)로 자리를 옮겨 한동안 근무했다. (중략) 대한식량공사는 일제가 1943년 식량공출을 원활히 하기 위해 식량관리령을 공포하면서 만든 반민반관의 기구인 식량영단의 후신이다. 해방이 되면서 조선생활품회사로 개칭됐다가 1948년 10월 대한식량공사로 다시 이름이 바뀌었다. 정부 수립 이후에도 식량영단, 생필품영단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며 식량과 배급과 관련한 일을 담당하다가, 1950년대 후반 배급제도가 없어지면서 문을 닫았다.> 여기서도 브루스 커밍스가 언급한 부문과 비교해 맞아떨어지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한국인들을 상대로 식량과 물품을 배급한 것. 하지만 시기면에서는 확연히 다르다. 브루스 커밍스가 해방전후에 김동조씨가 이 일을 맡았다고 기술하고 있지만 김동조 전 외무장관은 해방 이후 이 일을 맡은 것으로 돼 있다. 누구의 말이 옳은가. 사실 친일 인사들은 수두룩하다. 다만 감춰져 있을 뿐이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보면 안타깝게도 해방 이후, 아니 그 이후에도 친일파들을 제대로 심판하지 못해 이제는 친일이라는 전력이 역사 속의 진실 속에 파묻혀져 본인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다. 브루스 커밍스의 기술이 사실이라면 김동조 전 외무장관도 이 경우에 속하지 않을까. 서울 중랑구에 사는 권정일씨(29)는 “만일 브루스 커밍스의 저서대로 정몽준 의원의 장인이 친일 인사라면 대권 후보로 나서는 것을 용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한 나라의 대통령 장인이 식민지시대 때 남의 나라에 기생충처럼 빌붙어 자국민들을 고통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면 대통령이 될 자격이 없다”고 덧붙였다. http://ilyosisa.co.kr/SUNDAY/SUN_0350/TM_0303.html 는 사랑의 교회 집사인 정아무개 후보의 와이프 김영명 권사. 아들이 왜 그모양인가 했더니 친일도 당당하다는 가르침을 받은터라 그런 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