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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상진의 비디오테이프
게시물ID : sports_1735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로즈마님
추천 : 13
조회수 : 1054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09/10/25 20:35:26

1997년 해태 타이거즈를 우승으로 이끌었던 고 김상진 선수. 1999년 하늘나라로 팀을 옮겼다(사진=KIA)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2년 전인 1997년 10월 25일 잠실구장. 나는 그곳에 있었다. 해태(KIA의 전신)타이거즈와 LG 트윈스의 한국시리즈 5차전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좀체 경기에 집중할 수 없었다. 추위 때문이었다.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목안에 아이스크림 덩어리가 걸려 있는 기분이다. 

 

하지만, 당시 내가 무엇을 했고, 무슨 생각을 했으며 어떻게 살았는지는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다. 12년 전의 오랜 기억은 그저 ‘그곳에 있었다’는 사실과 ‘추웠다’라는 느낌만으로 존재할 뿐이다. 어차피 과거의 기억이란 예전의 집 주소처럼 하루 중 절반은 기억났다가 나머지 절반은 기억나지 않는 법 아닌가. 각설하고.

 

결국, 해태가 우승하고 친구들과 야구장 주변에서 뒤풀이를 했다. 우리는 반으로 나뉘어 해태의 우승에 환호했고, LG의 좌절에 슬퍼했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앞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미래가 해태의 우승처럼 밝고 찬란할 것이라는데 전적으로 의견을 같이했다. 태엽이 풀린 장난감처럼 그때만큼은 ‘취업 준비’라는 짐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한 달 후. 
IMF가 터졌다.

 

그리고 1년 후.
해태가 하위권으로 곤두박질 쳤다. 

 

그리고 4년 후. 
해태가 사라졌다. 영원히…. 

 

해태가 야구연감 속으로 사라지며 우리들의 젊음도 조금씩 빛을 잃어갔다. 해태의 우승처럼 밝고 찬란할 것 같던 우리들의 미래도 실상은 삶의 치열한 전쟁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해태도, 젊음도, 미래도 그 모든 것이 사라졌던 12년 동안 야구팬들은 더는 타이거즈를 강팀으로 생각하지도 않게 됐다. 강하면서도 너그러웠고, 너그러우면서도 매서웠던 그때 그 해태를 기억하는 건 젊은 날의 우리만이었을까.

 

그렇게 12년이 흐르고. 마침내 타이거즈가 ‘V10'를 달성했다. 호흡처럼 빈번했던 한국시리즈의 우승이 이토록 간절할 줄은 타이거즈팬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으리라. 

 

나지완의 한방으로 시리즈가 끝나고 조촐하게 뒤풀이를 했다. 타이거즈의 우승이 기뻐서, 와이번스의 분패가 아쉬워서, 한국시리즈 7차전의 감동이 하도 진해서, 그래서 잔을 들었다. 

 

무엇보다 한 이가 떠올라 내렸던 잔을 다시 들어야만 했다. 그 한 이는 바로 전 해태 투수 고(故) 김상진이었다. 그가 떠올라 갑자기 코가 시큰해지고 어느덧 눈엔 충혈된 달이 떴다. 

 

동행인들을 의식해야 하건만, 순간 나는 넋이 나간 이처럼 그저 한없이 중얼거릴 뿐이었다. 이렇게. 

 

“상진아, 보고 있니? 네가 도와준 거니? 네가 눈 감기 전 유일한 취미가 무엇이었는지 병원관계자에게 들었던 기억이 나. 그 관계자가 그러더구나. ‘김상진 씨가 밤이면 불 꺼진 병실에서 혼자 1997년 한국시리즈 5차전 비디오테이프를 봤다’고. 그것도 하루도 거르지 않고. 그래, 네가 5차전에서 완투승을 거두며 해태의 한국시리즈 우승이 결정됐지. 

그 이야길 듣고 가슴에 금이 갔단다. 그런데 그 병원관계자가 등을 돌리려는 내게 한마디를 더 하더구나. 지금도 그 말이 귀에 생생해. 그때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몰라. 그이가 뭐라고 했느냐고? 이랬어. ‘그 젊은 야구선수가 그랬어요. 자기가 죽기 전에 꼭 팀이 우승했으면 좋겠다고요. 저, 야구를 몰라서 하는 말인데…그 팀 우승했나요?’

 

난 그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어…하지만, 이젠 말할 수 있단다. ‘네, 우승했습니다. 우승했고 말고요. 다시 우승하는데 고작 12년밖에 걸리지 않았어요.’라고. 

 

상진아, 이제 그곳에선 새 비디오테이프로…갈아끼렴”

[출처] 고 김상진의 비디오테이프|작성자 박동희
http://blog.naver.com/dhp1225/12009338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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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기아팬은 아닌데 왠지 읽다가 찡해져서 가지고 와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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