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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에 나오는 킬방원의 왕되고서의 굴욕.
게시물ID : freeboard_76693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팔라딘
추천 : 0
조회수 : 413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4/06/06 20:39:30
이방원하면 조선3대왕으로 태종이라는 묘호와 

용의눈물...저는 유동근이 떠오르네요. 강력한 중앙집권을 꾀했고 토사구팽과 외척제거 사병혁파시킨

평생을 왕이 신하보다 권력이 강해야한다고 믿고 그리고 실천한 사람인데, 그래서 이방원의 실록을 찾아보다가

눈이 가는 사례가 몇개 있어 여기에 적어봅니다. 강력한 왕권의 주인공 태종.. 하지만 그에게도 늘 강한것만은 아니었는데,

먼저 중국 그당시에 황제는 영락제였습니다. 영락제하면 자금성을 최초로 만들고 수도를 남경에서 북경으로 옮긴 유명한 황제죠.

특히 이시대 조선에게 사대를 강요하여 말 여자를 많이 바쳤는데, 당시 중국조정에서 조선의 왕은 어느정도 위치였냐를 알 수 있는 사례로 태종8년기사에

물러나온 뒤에 이무(李茂)가 이현(李玄)을 시켜 예부 상서(禮部尙書) 정사(鄭賜)와 조공(趙羾)에게 말하기를,태조 황제(太祖皇帝)께서 우리 나라에 관복(冠服)을 주신 조서(詔書)에, ‘국왕(國王)의 1품(品)은 중조(中朝) 3품(品)에 준한다.’ 하시었고, 신미년에 고려(高麗) 세자(世子) 정성군(定城君)이 입조(入朝)하였을 때에 위차(位次)가 육부 상서(六部尙書) 다음에 있었는데, 지금 우리 세자(世子)로 하여금 조정 반열[朝列]에 끼이지 못하고 9품(品) 밖에 있게 하여 야인(野人)·달자(㺚子)와 섞여 있게 하였으니, 원컨대, 폐하(陛下)께 아뢰 주시오.”
- 먼저 당시 우리나라 조선국왕은 중국에서는 3품이군요. 세자는 9품인 걸 알 수 있네요.
훗날 이순신이 명수군도독 정1품직함을 받아서 선조가 화났다는 말도 있는데, 만약 그랬다면 화낼만 하네요.

  임금이 황제가 준 물건을 받고 나니, 황엄이 선유 성지(宣諭聖旨)를 전하기를,원제(元帝) 자손(子孫)이 귀순(歸順)한 자도 있고 귀순하지 않은 자도 있는데, 귀순하지 않은 자는 짐이 평정하고자 한다. 조선의 말이 비록 체대는 작으나 쓸 만하니, 왕은 보내라.”하였다. 선유(宣諭)가 끝나니, 황엄이 곧 말을 바칠 수효를 물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감히 힘을 다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임금이 태평관(太平館)에 가서 사신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임금이 황엄(黃儼)에게 이르기를, “황제의 은혜가 이미 중하니, 감히 말 1만 필을 바치겠습니다.”
-명칙사 황엄이 영락황제가 원나라 잔존을 쓸어야하는데 말을 달라고 하는 영락제의 말에 감히 하겠다고 합니다. 당시
1만필이면 엄청날텐데 여튼 하겠다고 합니다.


 임금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모화루(慕華樓)에서 영접하였다. 사신(使臣)이 경복궁(景福宮)에 이르러 칙서(勅書)를 선포하였다. 칙서에 이르기를,
조선 국왕 이(李)【휘(諱).】에게 칙(勅)하노라. 취(取)해 보낸 말 3천 필은 이미 계속해 도착하였다. 지금 왕에게 화은(花銀) 40개(箇), 매개(每箇)의 중량(重量)이 25냥(兩) 합계 1천 냥과 저사(紵絲) 50필(匹), 소선라(素線羅) 50필(匹), 숙견(熟絹) 1백 필(匹)을 내려 준다하였다. 임금이 칙서(勅書)에 절하고 나서, 서계(西階)로 올라가 사신 앞에 나아가서 꿇어앉았다. 황엄이 성지(聖旨)를 선유(宣諭)하기를,“네가 조선국(朝鮮國)에 가서 국왕(國王)에게 말하여, 잘 생긴 여자(女子)가 있으면 몇 명을 간택(揀擇)해 데리고 오라.”하였다. 임금이 고두(叩頭)하고 말하였다.
“어찌 감히 마음을 다해 명령을 받들지 않겠습니까?”
-태종8년엔 또 여자를 내놓으라는 영락제의 명령에 이래서 조선여자를 좋아하나봅니다.
이번에도 사신의 칙서에 무릎까지 꿇고 감히 하겠습니다. 이모습을 우리나라 신하들이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요??
아무리 왕이라고 해도 황제에겐 어쩔 수 없나? 이생각을 하려나요?

이후에 태종실록에는 영락제의 여자를 바치라는 내용에 관한 실록이 꽤 많더군요. 아무리 강대국이라지만
이건 깡패국인듯

또 다음사례에는 
지평주사(知平州事) 권문의(權文毅)를 순금사 옥(巡禁司獄)에 가두었다. 처음에 풍해도 순찰사(豐海道巡察使) 여칭(呂稱)이 돌아와서 황엄(黃儼)에게 이르기를,문의(文毅)의 딸의 자색(姿色)이 권집중(權執中)의 딸만 못하지 않다.”고 하였다. 이에 황엄 권씨(權氏)의 절색(絶色)을 구(求)해서 하루 속히 보려고 하는데, 문의가 그 딸이 병이 났다 칭탁하고 시일을 오래 끌며 떠내보내려 하지 않았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지인(知印) 양영발(楊榮發)을 보내어 독촉하니, 문의가 마지못해서 치장(治粧)을 하여 길을 떠나는 체하였다. 영발이 말을 달려 돌아오니, 문의는 마침내 딸을 보내지 않았다. 황엄이 노(怒)하여 말하기를,저와 같은 미관(微官)도 국왕이 제재하지 못하니, 하물며 거가(巨家)·대실(大室)에 미색(美色)이 있다 한들 어찌 내놓으려 하겠는가?”하였다. 임금이 노하여 문의를 가두었다.

- 자신의 여식을 안내놓는 사람들이 늘자 황엄이 저와 같은 미관말직도 하나 못다스리면서 무슨 국왕이냐 이소리를
해대는데, 마음같아서는 사신을 뻥차서 돌려버리고 싶지만 자기 신하를 가둡니다.아마 이방원의 마음도 많이 아팠을 것 같네요. 어쩔 수 없구나하는 마음


임금이 태평관에 가서 사신에게 잔치를 베풀고, 말 두 필씩을 주었다. 황엄(黃儼)·고득(高得) 등이 대궐에 이르러 금강산에 갔다 온 것을 사례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관(館)에 나가 금강산의 경치를 물으려고 하였는데, 지금 천사께서 먼저 왔으니, 마음에 황송하오.
 조천보(曹天寶)가 마음속으로 불평하매, 엄(儼)이 천보에게 마시기를 권하니, 천보가 잔치상을 가리키며 말하기를,“상에 가득한 일흔 두 그릇에 먹을 만한 것이 없다.”하니, 엄(儼)이 말하기를,“국왕께서 성심으로 자네를 대접하는데, 자네가 이런 말을 하니, 견마(犬馬)와 다를 것이 없다.”하였다. 천보가 노하여 말하기를,“나도 역시 황제의 명령을 받고 왔는데, 자네가 어째서 나를 욕하는가?”하고, 사모를 벗어 의 앞에다 던졌다. 이 한참 있다가 말하였다.“이런 사람을 어찌 따질 게 있나?
-태종 5년기사를 보면  황제의 사신은 천사라고도 불리었습니다. Angel? 천자의 사신이니 그렇게 불렸다는 군요.
게다가 태종이 연회를 베푸는데 명사신 한명이 72가지 반찬인데 먹을 것도 없네하면서 지들끼리 싸우네요.


조선왕조실록에서 몇몇사례를 보니 태종의 위치를 알 수 있었습니다. 강력한 왕권을 구축한 이방원이었는데, 당시
동아시아 국제위치에서는 조선도 그저 조선일뿐이구나 생각이 드네요.뭐 누가 왕이 되어도 
당시 명나라는 세계제국이라 저렇게 할 수밖에 없었겠죠. 자존심 상하겠지만 깡패국의 위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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