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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서 경략설의 문제점
게시물ID : history_818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tetraisol
추천 : 4
조회수 : 1389회
댓글수 : 5개
등록시간 : 2013/03/24 18:12:39

휴대폰으로 작성하느라 느리기도 하고 또 전력이 모자라기도 해서 잠시 멈추었다가 이렇게 컴퓨터를 잡은 기회가 생겨 풍림화산2님과의 대화를 바탕으로 다시 정리 해볼까 합니다.


우선적으로 서로간의 의견을 정리해보자면 풍림화산2님은 요서 경략설을 백제 출신인들이 주요 관직에 등용되었고 또 원정군의 형식으로 요서지역에 출정하였다 라고 정리하고 계시며 저는 요서 경략설은 그 자체로 말이 안되며 사무역을 행하는 상인들이 몇몇이 신라방과 같이 모인 정도가 전부일것이다 라는 주장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자 그럼 긍정론의 논거를 반론해보자면


첫째로 최치원의 글입니다.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기에는 강한 군사가 백만 명이나 되어 남으로 오(吳), 월(越)을 침범하고, 북으로 유(幽), 연(燕), 제(齊), 노(魯)를 뒤흔들어 중국의 커다란 고민거리가 되었다.


이 것만 본다면 분명 고구려와 백제가 중국을 공략한게 맞습니다.


그러나 글의 전문을 보면 내용은 전혀 달라집니다.


伏聞 東海之外有三國 其名馬韓·卞韓·辰韓 馬韓則高麗 卞韓則百濟 辰韓則新羅也 高麗·百濟 全盛之時 强兵百萬 南侵吳·越 北撓幽燕·齊·魯 爲中國巨蠹 


엎드려 듣건대 동쪽 바다 밖에 삼국이 있었으니 그 이름은 마한, 변한, 진한이었습니다. 마한은 고려, 변한은 백제, 진한은 신라가 되었습니다. 고려와 백제는 전성시에 강한 군사가 백만이어서 남으로는 오(吳), 월(越)의 나라를 침입하였고, 북으로는 유주(幽州)의 연(燕)과 제(齊), 노(魯)나라를 휘어 잡아 중국의 커다란 위협이 되었습니다.


최치원의 말을 문자 그대로 빌자면 동쪽 바다 건너 삼국이 있는데 그 밑에 오와 월 북으로는 연과 제 노 등이 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이 글은 말 그대로 객관적인 역사를 기술했다기 보다는 이렇게 강성했던 고려와 백제가 지금은 어떤가를 속된말로 까는 이른바 외교적 발언에 가깝다는것을 짐작할수 있습니다,


그것은 아래의 내용을 보면 기정 사실이나 다를바 없어집니다.


臣謹按渤海之源流也,句驪未滅之時,本為疣贅部落。靺鞨之屬,實繁有徒,是名粟末小蕃,嘗逐句驪內徙。其首領乞四羽及大祚榮等,至武后臨朝之際,自營州作孽而逃,輒據荒丘,始稱振國。時有句驪遺燼,勿吉雜流,梟音則嘯聚白山,鴟義則喧張黑水。始與契丹濟惡,旋與突厥通謀。萬里耨苗,累拒渡遼之轍;十年食葚,晚陳降漢之旗。 


신이 삼가 살펴보건대 발해의 원류는 구려가 아직 멸망되지 않았을 때에 원래 사마귀같은 더부살이 부락의 말갈 족속으로 아주 많았는데 이것이 속말소번으로서 항상 구려에 종속되여 왔습니다. 


그 들의 수령 걸사비우와 대조영이 무후가 집권할 시기에 영주에서 죄를 짓고 황야에 달아나 거하면서 처음 진국이라 칭하였습니다. 당시 구려의 살아 남은 무리로서 물길의 잡류들입니다. 올빼미 같이 울부짓으며 백산에 모였고 올빼미같은 무리들이 흑수까지 떠들석하게 하였습니다. 처음에 거란들과 손을 잡아 악을 행하고 또 이어서 돌궐과 통모하였습니다. 


만리 벌판에서 농사를 짓다 여러 차례 요수를 건너 사마귀가 앞발을 들어 수레를 막 듯, 제 분수도 모르고 무모하게 중국에 덤볐습니다. 10년 동안 남의 은혜를 입어 오다 뒤늦게서야 중국에 항복하는 깃발을 쳐 들었습니다. 


初建邑居,來憑鄰援,其酋長大祚榮始授臣蕃第五品大阿餐之秩;先天二年方受大朝寵命,封為渤海郡王。 


그들이 처음 거처할 고을을 세우고 이웃으로서 접하고자 왔기에 그 추장 대조영에게 비로소 제5품 벼슬인 대아찬을 주었습니다. 그 뒤, 선천 2년(713)에 이르러 비로소 큰 나라의 총명을 받아 발해군왕으로 봉해졌던 것입니다.


두번째로 삼국사기입니다.


十年 魏遣兵來伐 爲我所敗


10년(서기 488), 위(魏)나라가 병사를 보내 쳐들어왔으나 우리에게 패하였다. 


그럴듯 합니다만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쳐들어 온 적을 격퇴했다 라는 글은 맞으나 어디서 어떻게 그리고 이후의 처분은 어떠했는가는 전혀 기술되어 있지 않습니다.


즉 전공을 기록한 글은 맞으나 이것이 요서 경략의 증거가 되기에는 부족한게 사실입니다.



세번째로 남조의 사서들입니다.


이 부분은 간단하게만 써주셔서 언급하신 양서와 양직공도를 비릇하여 제가 몇개 찾아보았습니다.


其後 高驪略有遼東 百濟略有遼西 百濟所治 謂之晋平郡 晋平縣

그뒤 고려는 요동을 경략하여 차지하고, 백제는 요서를 경략하여 차지하였다. 백제가 다스린 곳을 진평군 진평현이라 이른다. 

송서 97권 동이열전 백제


晉世句驪旣略有遼東 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地矣 自置百濟郡

진나라 시대, 구려가 앞서 요동을 경략하여 차지하자, 백제도 요서 진평 2군의 땅을 점거하여 차지하고 스스로 백제군을 설치하였다. 

양서 54권 동이열전 백제


晉末 駒麗畧有遼東 樂浪亦有遼西晉平縣

진나라 말기, 구려가 요동을 경략하여 차지하자, 낙랑도 요서 진평현을 차지하였다.  , 양직공도 백제국사




304~439년의 5호16국시대


남조의 사서들은 말이 조금 깁니다. 남조의 사서만 본다면 요서경략설이 맞습니다. 그러나 옳다고 믿기는 다소 어렵습니다.


그 이유 첫번째는 북조 계열의 사서에는 요서 경략에 관한 단 한 글자도 나오지 않습니다,


영토적인 침탈은 물론이거니와 백제의 원정이나 당시로서는 정말 지금도 그렇겠지만 대단하고 놀라운 일인 외국인을 요직에 기용한다는 사실까지도 말이지요,


이게 어떤 문제인가 보자면 원래 살던 사람들도 모르는 역사가 매일 멱살 잡이 하던 옆나라 외국인에게 저술되어 버린것입니다. 


가령 380년에 유주에 부락이 반란을 일으켜 유주를 휩쓰는데 이 를 토벌하기 위해서 동래에서 바다른 건너 공격한 일이 기록에 있습니다 


또 이 반란군의 주요한 인물이던 평규 라는 인물은 당시 그들의 세력권을 언급하는 발언을 하는데,


연 전체를 점거하여 동해에 이르렀고 북으로는 오환과 선비를 총괄하고 동으로 구려와 백제를 끌어들인다 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산둥반도와 요서지역은 백제와는 전혀 무관한 지역이라는 겁니다,


다른 기록을 보자면 


송서(宋書 488 南朝梁 沈約 等) 夷蠻 贊死,弟珍立,遣使貢獻。自稱使持節、都督倭百濟新羅任那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表求除正,詔除安東將軍、倭國王。 


찬이 죽자 아우 진이 임금이 되어 사신을 보내고 공물을 바쳤다. 스스로 사지절 도독 왜, 백제, 신라, 임나, 진한, 모한 육국 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왕이라 불렀다. 표를 올려 바른 벼슬을 내려 달라고 요청했다. 조서를 내려 안동장군 왜국왕에 봉했다. 


二十年,倭國王濟遣使奉獻,復以爲安東將軍、倭國王。二十八年,加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將軍如故。 


443년 왜나라 임금 제가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 다시 제에게 안동장군 왜국왕 벼슬을 주었다. 451년 사지절 도독 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육국 제군사 벼슬을 더하였다. 안동장군은 예전과 같다. 


興死,弟武立,自稱使持節、都督倭百濟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七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 


흥이 죽자 아우 무가 임금이 됐다. 스스로 사지절 도독 왜, 백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칠국 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왕이라고 불렀다. 


順帝升明二年, ... 詔除武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王。 


478년 ... 조서를 내려 무에게 사지절 도독 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육국 제군사 안동대장군 왜왕 벼슬을 주었다.


네, 백제는 일본의 식민지 혹은 그 식민지에 인접한 국가로서 중국에 식민지를 가지고 있었다는 결론이 도출되는 기록이 송서에 나옵니다.


근데 남제서, 양서, 남사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옵니다. 아마 다른 내용과 마찬가지로 송서를 참고로 하지 않았나 추정되는 부분인데


이 내용은 사실 꽤나 유명하기는 합니다, 임나 일본부설, 남선 경영설등의 근거로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내용이 사실일까 한다면 아래 서술하게 될 이유인 기초적인 검증에 따라 역시 신뢰성이 매우 떨어집니다.


결과적으로 남조의 사서를 신뢰성 높은 논거로 제출한다면 선택을 강요받게 되는 것이지요,


임나일본부설, 요서 경략설 같이 믿기 vs 둘 다 포기하기



다음은 반론하는 입장에서 꺼낸 이야기들 입니다.


첫째로 사료입니다.


그 것이 어찌되었던 것 간에 요서 경략설이 사실이라면 그 들은 대규모 군사를 파병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군사시설을 설치하고 군을 주둔시켰거나 혹은 백제 출신자 나 관련인물이 요직에 등용되었다는 이야기이거나 둘 다 일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단 하나의 유물이나 유적도 발굴되지 않고 있습니다. 역사 게시판에서 오고간 이야기를 토대로 본다면 대규모 군사가 주둔한다면 필연적으로 한강 유역의 성곽들이나 만주일대의 성곽들에서 처럼 그 자체나 혹은 일부, 그리고 거기에 거주했을 인물들의 무언가가 나와야 하지만 전무합니다.


이는 중국에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 정도 병력을 그 먼 곳으로 보낸다는 것은 그 만한 이득이 있다는 이야기 이며 그에 따른 막대한 전비와 물자가 지출되었다는 말이며 이러한 원정에 대한 기록이 존재할법하지만 전무합니다, 해당 시기들의 무덤에서 부장품이나 벽화 하나 나오지 않습니다.


백제가 이 정도로 파병을 할 정도라면 의례 가지게 될 국력또한 근초고왕 말년 이례로 성왕의 작은 반짝임 말고는 지속적인 하강세를 취하고 있을뿐입니다.


주요 관직에 등용되었다는 다른 분의 주장 역시 무리이기는 마찬가지 입니다. 개인적인 연구를 제외한다면 여암의 성인 餘가 백제 왕족의 성과 같았다는 것을 빼고는 백제와 연결시켜볼 인물들이 없습니다. 외국인들이 주요 관직에 오른다면 대서 특필할 일이지만 그 수라장이 펼쳐졌던 시기에 백제계 인물들은 단 한명도 등장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두번째로 국력의 격차입니다.


풍림화산2님은 백제 < 북위 < 중국 남조 순의 파워 레벨을 주장하시지만 진서에 따르자면 


백제의 근초고왕은 372년 음력 1월과 음력 6월 두번이나 동진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치고 영동장군영낙랑태수領東將軍領樂浪太守라는 작위를 얻어갔습니다.



376년의 중국 


참고로 동진은 척박하기 그지없는 화남지방을 개척하여 마침내 비수대전에서 승리 했을 정도의 강국입니다. 여기서 나온 국가가 바로 송이며 그렇다고 북위가 약하나 본다면 그것도 아닙니다. 말 그대로 수라장이었고 세상은 가위 바위 보가 아니었지요,


세번째로 교차 검증이 그렇게 중요한가?


네 중요합니다, 너무 중요해서 말을 하기가 입 아픈 수준이지요, 교차 검증에서 좀 더 나아가 검증 전체를 통틀어 말해보자면


환단고기를 믿지 못하는 이유도 그래서입니다. 맹목적인 불신론이라고 하시는데 솔직하게 책 그 자체의 지독할만한 문제점을 떠나 내용을 보더라도 불신할수 밖에 없습니다.


다분히 서구적인 근대적인 정치체제를 갖추었으나 율령제는 커녕 관직의 정비조차 되어있지 못하며 국가는 절대왕권을 지향합니다. 그렇다고 정치체제가 서구적인게 맞나 하면 껍데기는 그렇지만 안은 동양적인것을 지향합니다.


그 들의 말 대로라면 철기문명을 자랑했을 국가이나 실상 그 안에서 발굴되는 동시대의 유적지들은 석기 시대를 헤메입니다. 


솔직하게 서울이나 대도시에서 우리가 인터넷하고 티비 보지만 시골에서는 봉화 피우고 소타고 한양가고 하는건 아니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6만년전 설을 보면 남극이나 북극에서 농사짓는다는 이야기가 사실이어야 하는데 이게 말이나 될법한 이야기 입니까?


일본이 멸망한다고 세계에 퍼진 모든 일본의 잔재들이 야구동영상 SOD TOKYO HOT  일거에 사라질수는 없지 않습니까? 


동남아에 그렇게 거대한 쓰나미가 몰아닥쳐도 문명의 잔재는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즉 환국 문명이 사실이라면 최소한 무언가는 남아있어야 하는데 그런데 왜 환단고기가 입이 닳도록 주장하는 그 광대한 영역 그 어디에도 그 엄청난 국가의 잔재가 단 하나도 없을까요? 


왜 그렇게 문화적으로 엄청나게 융성한 국가가 다른 국가에는 영향을 끼치지 못했을뿐더러 단 한글자도 언급이 안될까요?


임나 일본부 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 들이 한반도 남부를 다스렸다는 것을 입증할 만한 유적 유물은 나오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비단 국내를 떠나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의 일로 덕분에 한일 양쪽 학계에서는 손가락질 하는 수준입니다.


요서 경략설이 문제가 되는게 바로 이러한 문제입니다. 사료의 교차검증이라는 매우 기초적인 단계조차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 바탕이 될법한 주장들을 입증할만한 그 어떠한 유적 유물 하나 국내외를 통틀어 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절충안이다 수정안이다 여러 가설이 나오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개인의 연구 이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혼란이 빚어지고 있는것이며, 교과서에 무분별하게 사실인것 처럼 실리는게 문제가 되는것입니다.


풍림화산2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제가 무작정 부정하기 신공으로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의 기본적 요건 조차 아직은 전무한 '가설'이 요서 경략설이라는 겁니다.


그것이 충족되면 왜 교과서에 무분별하게 실리는게 문제가 될것이며 그 것을 믿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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