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써둔 글입니다. 최근 생산되고 있는 강신주/자본주의 관련 주제에 덧붙이는 글을 쓰는 중에 이 글을 먼저 올려두어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 올려둡니다.
---------------------------------------------------------------------------------------------------------------------------------
1. 노동과 사유
과거에는 노동하는 자와 사유하는 자가 분리되어 있었다. 노동자는 사유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참된 자유의 실현으로부터 괴리되어 있었다. 사유하는 자는 노동을 통한 구체적 생존 수단의 재생산으로부터, 즉 삶의 조건으로부터 괴리되어 있었다. 근대 이후로 이 둘은 비로소 융합되며 노동이 철학의 영역으로 들어오게 된다. 그 시점은 정확히 산업혁명 (1760~1820)과 그에 수반되는 원시적 자본경제의 시대로, 원시적 자본경제가 처음으로 등장하여 애덤 스미스 (1723~1790)의 국가경제학이 나타난 것도 정확히 같은 시기이며, 칸트로 대표되는 사변철학/의식철학의 흐름을 승계한 헤겔 (1770~1831)이 노동의 개념을 철학에 전면적으로 도입시킨 것도 정확히 같은 시기이다.
이제 인간은 자기 자신의 구체적인 생존의 조건을 자신의 삶 속에서 생산해내는 것에 실질적으로 삶 전체, 곧 생명 전체를 소모하게 되면서, 인간은 노동하는 존재로서 존재하게 되었다. 이러한 생산과 노동이라는 것이 인간의 보편적 자의식으로 편입되어 인간의 본질적 조건으로서 의식되게 된 이상, 노예나 노비, 농노의 노동에 생존의 조건을 철저히 일임한 채 순수하고 추상적인 사색 속에서 영원하고 불멸적인 것에 대한 사유에 임하던 철학의 기조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는 것이다.
2. 과학기술과 노동
그러나 현대 전후의 인간 개념의 이러한 전환만으로 과거와의 차이를 설명하는 것은 불충분하다. 이는 이러한 생산집약적, 노동중심적 존재로서의 인간 개념이 그 자체로 드러내는 역설적 양상 때문이다. 이 모순양상은 이제 인간의 지적 탐구의 주류가 된 과학기술과 인간의 구체적 삶의 조건 사이의 포식적 관계에서 뚜렷하게 관찰된다. 이 관계가 포식적이라는 것은, 과학기술의 실질적 목표의식이 인간을 인간의 조건으로부터 박탈시키는데 봉사하고 있다는 것인데, 이것은 정서의 삭막함 내지는 어떤 전통적/인간적 가치의 상실에 대한 향수로 특징지어지는 기술 비판과는 전혀 다른 의미이다. 단적으로 표현하자면, 과학기술이 인간의 노동력을 점진적으로 은퇴시킴으로써 인간 존재를 점점 무용성으로 전락시킨다는 것이다.
인간의 생존에 봉사하는 구체적 노동은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라 점차 인간노동자가 아닌 인공적 노동자, 즉 기계로 대체되어 가게 되는데, 이렇게 구체적 노동을 인간이 아닌 기계에게 부과시켜 기계가 인간을 대신하여 노동하도록 하는 것은 틀림없이 과학기술 개발의 실질적 목표 중 하나이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인간 노동력의 대체를 넘어, 인간 노동력으로는 불가능한 작업을 실현시키는 것 또한 과학기술의 큰 부분을 담당하며, 이것이 과학기술 개발의 또 다른 실질적 목표이다. 과학기술의 근간을 이루는 이 두가지 목적의식은 이미 그 자체로 인간을 인간의 조건으로부터 박탈시키는 것으로, 전자는 내적으로, 후자는 외적으로 이루어진다. 여기서는 전자에 대해 말하기로 하자.
3. 인간 노동의 박탈
인간이 "노동하는 존재"로서 의식되는 현대의 노동사회에서 기계가 인간의 노동을 대체한다는 것은 거꾸로 말해 인간이 스스로의 가능성이자 본질에 해당하는 노동을 박탈당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진기와 세탁기의 대중화 및 진화는 사진사와 세탁소의 쇠퇴와 몰락을 필연적으로 가져오며, 기존에 전문기술자가 행하던 작업을 자동화된 기계가 담당하게 된다는 것은 그 기술자의 노동력이 더 이상 사회적 필요가 없음을, 더 구체적으로는 그 기술자의 경제적 경쟁력 상실을 의미한다. 인간끼리 노동시장에서 경쟁하는 것과 정확하게 같은 원리로 인간과 기계가 노동시장에서 경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 경쟁에서 밀려난 인간 노동력, 즉 인간들은 여전히 "노동하는 존재"로서의 본질에서 벗어날 수 없는 한에서 스스로의 노동력을 재창출하여 노동시장에 새롭게 뛰어들도록 강요당하며, 그 강요를 수행하는 것은 다시금 정확히 인간의 생존의 조건 - 즉, 노동을 통해서만 먹고 살 수 있다는 바로 그 생존의 조건 - 이다.
이러한 과학기술개발의 진화는 단순한 노동에서 시작해서 점점 더 복잡한 노동으로 거슬러 올라오며, 차례로 단순하고 반복적인 노동을 박탈당한 인간은 기술과 술래잡기를 하게 된다. 즉 인간은, 기술에 아직 추월당하지 않은 충분히 복잡한 수준의 노동에 스스로를 적용시켜야만 노동을 점유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이는 노동인력 전반의 교육 수준이라는 문제와 직결된다. 이 때 보편적으로 요구되는 교육의 정도는 기술이 치고 올라오며 노동시장을 먹어치우는 속도에 맞추어 점차 상향될 수 밖에 없다. 즉 인간은 이제 인간의 조건을 성취하기 위한 노력만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스스로의 생존 조건 자체를 계속해서 재창출하여 혁신해나가도록 요구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은 스스로의 유용성 - 정확히는 사회적/경제적 맥락에서의 유용성이자 경쟁력 - 을 계속해서 재창출해내야만 한다. 새로운 인간의 조건을 끊임없이 창출해냄을 통해 인간 개념을 끊임없이 재정의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러한 현대적 맥락에서의 철학의 요구는, 어떠한 정점을 설정하고 그를 지향해가는 식의 과거의 철학과는 그 어떤 분야에서라도 절대 같을 수가 없는 것으로, 그 근본적 이유는 인간이 어떠한 궁극적 정점 - 이를테면 신성, 덕, 초월성, 이성, 순수사유 등 - 의 대척점으로서 존재하는 것으로 더이상 의식될 수 없고, 오히려 물질적/생명적 차원의 혁신에 쫓기며 술래잡기를 하는, 따라잡히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한발이라도 앞서 도망치려는 존재로 의식되어야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