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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가 하나의 구속이 되어버리는 과정
게시물ID : phil_818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히읗
추천 : 4
조회수 : 534회
댓글수 : 6개
등록시간 : 2014/02/07 10:57:11
0. 서문

최근 강신주/자본주의와 관련된 논의가 여럿 생산되고 있는데 참가해볼 심산으로 글을 올립니다.

사실 저는 강신주의 책도 강연도 직접적으로 접한 바가 없으며 강신주에 대한 별다른 인식이 없기에 강신주에 대한 평가도 딱히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가 하는 것이 진정한 철학이냐 아니냐, 그가 진정한 철학자냐 아니냐, 혹은 그런 점과 상관없이 태도 자체에 어떤 문제가 있느냐 하는 문제는 따라서 다룰 생각도 없지만 다룰 수도 없으므로 그런 부분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글입니다.

다만 본 게시판에서 재생산된 강신주의 담론 - 주로 자본주의 비판 담론 - 을 토대로 그와 관련된 의견을 개진하고자 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는 강신주 비판이나 분석도 아니고 본 게시판의 담론에 덧붙이는 것 이상의 의미는 없습니다.


1. 자본주의의 근본적 문제

자본주의의 문제가 무엇이냐, 자본주의에 대체 어떤 문제가 있느냐? 하는 질문이 자본주의 비판의 시작점으로 여겨지곤 하는데, 사실 그보다 먼저 대답되어야 할 것은 "자본주의"라는 말로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이는 단순히 단어를 언어적으로 정의하는 문제라기보다는 자본주의라는 것의 범위를 어디까지 볼 것이냐, 라는 개념적 정의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 정의로부터 자본주의라는 것이 어느 차원에서 작동하는지, 어느 차원에 그 근본을 두고 있는지가 설명되며, 자본주의에서 나타나는 문제 역시 그 차원까지로 추적되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가 단지 특정한 경제 체제를 뜻하는 것이라면, 그 경제 체제를 구성하고 규제하는 법률 체계의 내용이 근본 차원일 것이고, 따라서 자본주의의 문제라는 것도 그 법률 체계를 개혁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는 것일 것입니다. 만약 자본주의라는 것이 하나의 이데올로기로서 사회적 산물이라면, 사람들의 사회적 인식을 변화시키고 사회구조를 변화시킴으로써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이러한 관점들을 가진 사람들은 많이 있으며, 실제로 그러한 관점을 기반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옳은가 아닌가는 순수하게 이론만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이론적으로는 아무리 완결성이 있어보여도, 그러한 이론이 현실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옳은 이론이라고 할 수가 없겠죠. 여기서 현실에 부합한다는 것은 과거와 현재만이 아니라 미래에까지 적용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말하자면, 자본주의에 대한 A라는 이론이 있다고 할 때, A라는 이론이 과거의 모든 현상과 현재의 모든 현상을 아귀가 딱 맞아 떨어지게 설명해줄 수 있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앞서 말했듯이 이 A라는 이론으로부터 자본주의의 문제에 대한 특정한 해결책이 도출될 것이며, 이 해결책을 적용시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 해결책은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예측을 기반으로 앞으로의 일을 원하는 바대로 이끌어가고자 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과거/현재가 아닌 미래에 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 분석/비판의 실증적이고 과학적인 측면인 것이죠. 쉽게 말해서, A라는 이론이 "옳다"는 것은 그 해결책이 적용되어서 실제로 문제들을 해결해냈을 때에야 선언할 수 있는 것인 셈입니다.

많은 자본주의 분석/비판이 무력함을 넘어 공허해지는 동시에, 마르크스의 자본주의의 비판이 여전히 유효한 위력을 가지는 것이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입니다. 무력해지는 것은 실제로 그 해결책이라는 것들을 적용시키는데 현실적인 장애물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애초에 적용하기도 힘든 해결책이라는 것이 "옳은" 해결책이라는 것은 다소 이상합니다. 이를테면 부동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해결책으로 모든 사람에게 집을 하나씩 주거나 집이라는 것을 모두 무료로 만들어버리면 된다고 말할 수도 있고, 식량 문제 및 기근을 해결하기 위해 모든 사람이 충분히 먹고도 남을만큼 압도적인 양의 식량을 공급하면 된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현실적으로 적용되기엔 엄청난 장애가 있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현실적인 장애를 고려하지도 극복하지도 못하는 이런 해결책이 "옳은" 해결책이라고는 말할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해결책이 현실적인 제약에 부딪힌다는 자체가 그 해결책의 기반이 되는 이론이 현실적인 요건들을 온전하게 반영/고려하고 있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애초에 제대로 적용도 될 수 없는 해결책은 당연히 성공할 수도 없으며, 성공하지 못하니 무력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애초에 성공도 할 수 없는 해결책이라는 것은 공허할 수 밖에 없는 것이죠.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비판이 힘을 가지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입니다. 위에서 실패하는 해결책들 (그리고 그 기반이 되는 비판/분석들)이 현실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점을 극복하기 위해 마르크스는 가장 근본적이면서 가장 탄탄한 토대까지로 자본주의를 끌고 내려갑니다. 그리고 그 토대는 바로 물질입니다. 따라서 법률 체계나 사람들의 의식의 차원에서 자본주의의 문제가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제약에서 자본주의의 문제가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이 분석이 교묘한 것은 애초에 자본주의라는 체제는 물질적인 제약을 토대로 발생하는 체제라고 분석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물질적인 자원은 한정되어 있고 인간의 욕망은 가변적인데다 충족시키기도 통제하기도 어렵다는 바로 그 갈등에서 자본주의적인 경제 체제가 필연적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죠. 따라서 여러가지 다양한 경제 체제 중에 자본주의가 좀 더 나은 것 혹은 그나마 덜 나쁜 것이라서 자본주의를 지지하고 주장하는 사람들보다 마르크스가 오히려 더욱 강력하게 자본주의를 주장합니다. 마르크스에게 있어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출현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 모두 금욕주의자가 되거나 마술처럼 무한정 자원을 생산해낼 수 있는게 아니고선 말입니다. 즉, 자본주의의 문제와 자본주의의 근본은 정확히 동일한 것입니다. 자본주의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더 이상 자본주의가 필요없는, 더 이상 자본주의가 존재하지 않는 상태를 만든다는 의미이며, 또 그러한 상태에서만 자본주의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2. 행복에서 자유 (자율성)으로

근본적으로, "문제"라는 것은 하나의 "모순"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문제라고 인식할 때 사실 우리는 하나의 모순을 인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세상은 평화로워야 한다"는 가치관을 가졌을 때, 현실이 도통 평화롭지 않고 갈등과 폭력으로 얼룩져 있음을 볼 때 이 현실에 문제가 있다고 인식하게 됩니다. 이 때 이 가치관은 하나의 이상이며, 이 이상과 현실의 불일치가 일단 즉각적으로 경험되는 모순입니다. 그리고 이상과 현실의 불일치는 현실적인 제약으로부터 비롯됩니다. 이를테면, 현실에 실제로 갈등이 존재한다는 것을 넘어서, 현실에서 그러한 갈등이 발생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요인들이 있고, 이 요인들이 서로 모순되는 관계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요인들은 각각 현실적인 요인이므로, 앞서 말한 모순은 더 이상 이상과 현실 간의 모순이 아니라 현실에 내재된 모순인 것입니다.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의 모순을 현실적인 요인, 정확히는 물질적인 요인으로 추적하는 것 역시 이러한 방식을 차용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르크스 역시 어떠한 이상을 전제하고 있을 수 밖에 없으리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추적해서 만나게 되는 마르크스의 이상은 사실 놀랍도록 계몽적입니다. 마르크스에게 이상이 되는 가치, 궁극적으로 현실에 구현되어야 하는 최대의 가치는 다름 아닌 "자유"입니다. 이 자유는 행복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행복하지 못한 채로 자유를 찾는 것은 자신의 비참함을 애써 외면하고 스스로를 위안시키려는 것이라는 점에서 자신을 억압하는 것이고 따라서 진정한 자유일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일단 행복해야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입니다. 또 거꾸로, 아무리 행복하다고 해도 자유롭지 못하다면 자신의 존재를 자신 스스로가 완전히 소유하지 못하는 것이므로 그 행복이 완전한 것일 수 없습니다. 행복 없는 불완전한 자유의 예는 모든 욕구로부터 해방되려는 금욕적인 수행자라면, 자유 없는 불완전한 행복의 예는 모든 욕구를 주인이 충족시켜주는 충실한 노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의 자유는 결국 자율성 (autonomy)를 의미합니다. 자율성이란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의 뜻에 따라 스스로가 결정을 내리는 것입니다. 단순한 표현으로 바꿔서 말하자면, 스스로 생각하라, 스스로의 의지에 따르라, 라는 것이 계몽적인 자유의 개념이며 이것은 칸트에서 강하게 발견되고, 아리스토텔레스 - 플라톤 - 소크라테스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서양철학의 가장 강력한 전통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자율성에는 큰 함정이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 뜻, 결정방식이라는 것이 순수하게 자신의 것이 된다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 지점을 문제 삼은 철학자들은 프랑크푸르트 학파에서 발견되는데, 이들은 여기서 마르크스와 프로이트가 만나게 된다고 봅니다.


3. 자유 (자율성)에서 구속으로 - 자유라는 이름의 신화

이 지점을 문제 삼았던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철학자 중에는 아도르노, 에리히 프롬, 마르쿠제가 있습니다. 이들이 프로이트를 끌어오는 맥락을 거칠게 단순화시켜 말하자면 그 자율성의 근간이 되는 생각과 의지라는 것 자체가 도통 자율적이지가 않을 뿐더러, 자율적일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프로이트는 인간 심리의 가장 근본이 되는 차원을 본능 (instinct) 내지는 충동 (drive)로 설명하였는데, 이것은 우리의 생각이나 의지로 지배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각이나 의지를 지배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생각이나 의지를 애초에 구성하는 근본이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면, 자유 혹은 자율성을 성취하는 것이 스스로의 의지에 따르는 것이라고 할 때, 내가 원하는 것이 B라고 합시다. 그런데 계몽적인 패러다임에서는 내가 그 B를 원한다는 사실 자체는 그저 나에게 주어져 있는 것, 즉 마치 어떤 절대적인 것처럼 여겨집니다. 여기서 내가 B를 원할지 C를 원할지를 내가 의식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일까요? 만약 선택할 수 있다고 친다면, 나는 B와 C 중에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그 선택기준이 또 있어야 하겠죠. 그 선택기준이 D라고 할 때, 이 D는 또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 것일까요? 쇼펜하우어는 이를 두고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바를 할지 말지를 선택할 수는 있지만, 무엇을 원할지를 선택할 수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프로이트는 그렇게 더 이상 비판하고 반성하여 선택할 수 없는 근본적 지점이 생물학적으로 결정되어 있다고 봤고, 이것을 본능/충동의 개념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이를 마르크스의 사회철학과 접목시킨 위의 철학자들은 사회와 문화가 우리의 생각과 의지 자체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게 되는 현상에 주목했습니다. 사회나 문화가 우리의 의식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우리의 의식이 거꾸로 사회와 문화의 산물이며, 그 사회와 문화는 경제적 구조의 산물이고, 경제적 구조의 근원은 물질적 토대에 있다고 보았다는 점에서 마르크스를 계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근본을 단순히 경제구조를 파생시키는 물질성에만 두지 않고, 욕구/충동의 근본이 되는 생물학적 물질성과 결부시켰다는 점에서 프로이트를 접목시킵니다.

우리의 자유와 행복에 목표가 되어주는 그 궁극적인 욕구 자체가 애초에 이렇게 주변환경에 영향을 받는 것이라고 할 때, 주변환경의 문제를 해결하여 주변환경의 제약을 극복했을 때 우리에게 궁극적인 목표가 되어줄 어떤 순수한 이상, 계몽적인 차원의 그런 이상적인 인간상이 남아 있을 것이라는 기대 자체가 무력해지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의 "본성" 자체가 앞서 이야기한 금욕주의자나 노예로 변질되어 버린다면, 대체 자본주의가 "극복되어야 할 것"이라는 생각 자체가 공허해져 버리는 것입니다.

물론 금욕주의자는 성취하기도 어려운데다 그 수도 미미하고, 더더군다나 자본주의에서 금욕주의자는 애초에 경제적으로 무의미한 존재나 마찬가지라는 점에서 별 문제가 안됩니다. 실질적으로 문제가 될 뿐더러 그 스케일도 훨씬 큰 것은 바로 인간 본성의 노예화입니다. 본성 자체가 노예화된 인간에게 완전한 자유/자율성이라는 것은 이상이나 지향할 가치가 아니라 오히려 두려움의 대상입니다. 여기서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자유/자율성은 소극적인 자유 (제약을 받지 않는 자유)보다는 적극적인 자유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자유)에 해당합니다. 남에게 명령받고 간섭받지 않는 자유가 소극적인 자유라면,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자유가 적극적인 자유입니다.

그런데 노예화된 인간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스스로 결정할 능력을 상실해버립니다. 더 큰 집을 원하고, 더 좋은 차를 원하고, 더 멋진 옷을 원하고, 더 아름다운 외모를 원하는 식의 욕망에서부터, 어떤 취미를 가지는지, 어떤 식으로 여흥을 찾는지, 어떤 것에 즐거움을 느끼는지조차 사회적/문화적으로 결정당하는데에 길들여져 있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하고 싶은대로 하라고 해도 무엇을 하고 싶은지 가이드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에리히 프롬의 책 중 <자유로부터의 도피>라는 제목이 이런 지점을 짚고 있습니다. 근대적 개념으로서의 계몽적 자유가 이제 현대인에게는 오히려 하나의 구속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익히 알려졌다시피 자본은 대중의 욕망을 조절하는 것에 몹시 능숙할 뿐더러 나날이 더 능숙해지고 있습니다. 스티브 잡스가 "사람들은 눈 앞에 보여주기 전까지는 자신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른다"고 말한 것은 이런 현대적 자본과 욕망의 관계를 간명하게 포착하고 있습니다. (이는 스티브 잡스의 진정 대단한 능력은 마케팅에 있었다는 점과, 또 그가 얼마나 자본에 가장 깊숙한 지점에 위치했던 인물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흔히 포장되듯 인문학적 가치를 보여주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현대적 자본의 특정한 속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럼에도 여전히 스스로 생각하라, 스스로 판단하라, 스스로의 의지에 따르라, 라는 모토를 외치는 것은 여전히 횡행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이 모토가 낡은 근대적 계몽주의의 패러다임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고, 실제로 그런 차원에 머무는 사람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 모토가 현대적 자본의 하나의 도구이자 무기로 새로 태어난 것이기도 합니다. 자유로워져라! 그리고 네가 자유롭게 하고 싶어할 만한 것들이 여기 이렇게 이렇게 있으니 자유롭게 골라라.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앞서 말한 근대적 계몽주의 패러다임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은 정작 스스로는 이러한 모토가 현대적 자본의 도구가 되어버릴 수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더라도, 기꺼이 그 모토를 재생산함으로써 자기도 모르게 자본에 봉사하고 있는 꼴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쯤되면 이미 파악하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이 모토의 또 다른 이름은 바로 "꿈"입니다. 중세와 근대에서 구원과 천국이 기독교적 이상이자 종교적 신화로 기능했던 것처럼, 행복, 자유, 꿈이라는 것들이 이제 매우 효과적인 자본의 도구가 되어 있는 현대에서는 행복해져라! 자유로워져라! 꿈을 쫓아라! 라는 모토가 현대적인 신화로서 기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도르노는 "계몽은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신화일 뿐이다"라고 <계몽의 변증법>에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종교적 신화와 현대적 신화의 공통점은 바로 "약속"입니다. 종교의 신자가 약속된 낙원을 바라보듯 현대인들은 약속된 꿈을 바라보는 것이며, 바로 그러한 점에서 종교적 패러다임에서의 인간이 신에게 종속된 존재이듯 현대적 패러다임에서의 인간은 자본에 종속된 존재, 자본의 노예로 완전히 거듭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본주의 분석에서 더 이상 통념적인 자본주의 비판과 계몽적 자유에의 호소는 힘을 잃습니다. 첫째로, 더 이상 자본주의는 극복되어야 할 무엇이 아니라 인간 본성에 침투한 것이 되었기 때문이며, 둘째로, 그렇게 침투당한 인간 본성은 근본적으로 노예화되어 버리기 때문에 더 이상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유를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에리히 프롬이 말했듯, "자유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존재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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