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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선 팬이긴한데.... (스크롤의 압박.. 심합니다.)
게시물ID : sisa_820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개론
추천 : 2/7
조회수 : 455회
댓글수 : 7개
등록시간 : 2004/07/25 01:09:06
내가 좋아하는 김희선과 이 김희선은 다른 사람이네요...

뭔가... 속시원한 답을 아시는분???

"이외에도 김 의원이 기억하고 있는 김학규 장군에 대한 기억도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김 의원의 기억에 남아있는 김 장군은 6.25 이후 1년 남짓의 기간인데, 형무소에서 출소한 60년부터 67년까지의 활동은 전혀 기억에 없다는 것이다. 김 의원은 기자회견에서 '조부와 부친 모두 일찍 타계해서 김 장군이 김 의원 및 그 모친과 함께 살며 보살폈다'면서 '김 의원이 김 장군의 병수발을 드는 등 친조부나 다름 없었다'고 설명해 실제 같이 산 기간은 얼마되지 않는데 어떻게 이렇게 말할 수 있느냐 하는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http://www.upkorea.net/view/common.asp?s_articleID=2004724124831_030000000000.html&sort1=3


윗글의 "김의원이 김 장군의 병수발을 드는 등 친조부나 다름 없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다음의 의문이 생깁니다....

먼저, 6.25 이후 1년 남짓한 기간의 기억인데, 그 기간에 병수발을 들 정도로 김장군은

건강이 좋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1953년 전쟁이 끝난 후 다시 이승만 정권에 

의해 검거되어 4.19 직후 풀려난 뒤 한독당 재건위를 조직하고 그 대표로 취임하였다가 

962년 건국공로훈장을 받고 1967년 사망한다."라고 합니다. 

53년에 전쟁이 끝났으니... 김의원이 병수발을 1년동안 했다면 54년부터 60년까지 

복역을 하셨다는 이야기인데... 과연..... 그 당시의 행형체계가 병수발을 받던 분이

6년여의 복역기간동안 건강을 유지할수 있었을까요????  감기몸살도 아니고, 일년간

병수발을 했다면, 아니 한달이라도 했다면 그 당시의 사정으로 봐서는 상당한 

병으로 봐야 할겁니다. 그런데, 검거되어 6년여의 복역생활을 했다니...????

김장군이 워낙 건강체질이어서 일년간, 혹은 한달간에 걸친 병수발로 완전히 

건강해지셨다고 가정한다면... (당신을 가정의로 지정합니다~~~~~~~~ 썰렁 개그... ^^;;)

또하나의 의문이 생깁니다....

김의원이 김장군의 부인인 오광심여사에 대한 기억이 없다는 것이죠....

그런데,  김장군의 부인 오광심여사는, 아래 내용에 나오는 1976년에 돌아가셨고  

김장군은 1967년 돌아가셨습니다. 

김장군의 병수발을 했다는 김의원은 어떻게 김장군의 부인인 오여사에 대한 기억이 

없을수가 있을까요????? 오여사는 김장군이 625 후 수원에서 은거할 당시. 이승만 정권에

의해 다시 검거되기 전까지..., 서울과 경기도 일원에 계셨다고 합니다. 김의원이 그렇게 

열씨미(^^;;) 김장군의 병수발을 들때 부인인 오여사는 한번도 안왔을까요??????????

오여사도 보통분은 아니었습니다. 오광심 여사도 김학규 장군처럼 활동을 왕성히 한 

독립지사이며, 광복군 제3지대의 선전책임자 역할을 한 분이었습니다. 

결국엔 건국 공로훈장이 추서되기까지했답니다. 그런데도 기억에 없다니....

혹시, 오여사가 남편이 아파서 병수발을 받아야 하는데도 한번 얼굴도 비추지 않은 그런

여자라 김의원의 기억에 없는건가요?????

궁금한것 투성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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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upkorea.net/view/common.asp?s_articleID=20047221666_030000000000.html&sort1=3

김희선 의원 가계와 관련한 의혹과 진실 

[업코리아 2004-07-22 16:46] 


본관이 다른 사람이 할아버지가 될 수 있는가? 

네티즌들 사이에서 갑작스레 김희선 의원 가계도와 관련한 의혹이 번지고 있다. 그것은 지금까지 기정사실로 여겨졌던 김 의원이 광복군 김학규 장군의 손녀라는 것에 의문이 일면서 부터다.

사건의 발단은 김 의원 홈페이지와 정치웹진 남프라이즈에서 일어났다. 지난 번 “현 국군장성들은 군부독재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라는 김 의원의 비판에 대해 네티즌들의 비판이 빗발치는 가운데, 어느 한 네티즌이 김 의원의 본관과 김 의원이 할아버지, 또는 작은 할아버지라고 지칭하는 김학규 장군의 본관이 틀리다는 주장을 폈던 것이다. 

김학규 장군은 인터넷을 통해 검색해보면 안동 김씨(야후, 네이버, 드림위즈)로 나오는데, 김 의원의 본관은 열린우리당 총선후보 검색란에 김해 김씨로 나온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김학규 장군과 김 의원은 일가친척이 될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이다. 

갑자기 벌어진 김희선 의원 홈페이지의 진실게임

문제가 제기되자, 네티즌들의 의혹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파만파로 퍼져나갔다. 그 사이 김 의원에게 이에 대한 해명을 바라는 요구도 빗발쳤다. 하지만, 김 의원은 묵묵부답이다. 

그러면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 김 의원과 독립군 김학규 장군과는 어떤 관계일까? 또한 김 의원이 친할아버지, 친아버지의 약력을 광복군 자금책 등으로 기재하며 독립운동을 한 가문임을 항상 자부하고 다녔는데, 이것의 진실은 무엇일까?
김 의원의 주장과 객관적인 자료들을 살펴보며 그 의문을 파헤쳐 나가보도록 하자.

김희선 의원이 밝히는 가계내력과 의문점

김 의원이 밝히는 주요 가계 내력은 “할아버지(김성범-독립군 자금책)와 작은 할아버지(김학규-광복군 3지대장), 그리고 아버지(한독당 청년당원, 김구선생 명으로 천진에서 활동하다 러시아 벨호얀스크 감옥에 투옥, 행방불명)”이다. 

하지만 김 의원이 밝히는 가족사는 해방 직후의 혼란스런 상황 때문인지, 대체로 단편적인 편린들뿐이다. 작은 할아버지 김학규 장군과의 관계는 김구 암살을 전후한 시기와 6.25전쟁 이후 1년 남짓한 기간이 전부다. 주로 김 의원이 평택의 작은 아버지 집에서 살 때 김학규 장군이 골방에 숨어살았다는 기억이다. 

1. 출생지 의문

김 의원은 1943년 만주 봉천 신양에서 태어났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김 의원의 출생지는 김학규 장군과 동일한 평남 평원으로 되어 있다. 스스로 밝힌 출생지조차 틀린 것이다. 이는 1990년 범민족대회 당시 김 의원의 프로필(만주 봉천생)과 총선 후보 출마 출생지(평남 평원)가 다른 것에서도 나타난다.

물론 이것은 출생지와 호적지가 다를 수 있기 때문에 충분히 생겨날 수 있는 문제다. 즉, 출생을 여행 중에 했다고 하더라도, 부모님이 기거하고 있는 쪽으로 출생신고를 하고 이를 출생지로 기술하기 때문에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김 의원이 밝힌 할아버지 김성범(독립군 자금책)의 출생지가 평남 평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김 의원이 말한 할아버지(김성범-독립군 자금책)를 독립기념관 정보에서 검색해보니, 1899년 평북 초산 출생으로 주로 의주 천마산대(일제초기 독립군의 일종)에서 활동하다, 1926년에 검거 투옥되어 1930년에 사형집행 되었다고 기술되어 있다. 

이는 할아버지는 평북으로, 손녀는 평남으로 호적지가 다르다는 것인데, 좀처럼 납득이 가지 않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김 의원이 밝히고 있는 할아버지(김성범)와 독립군(김성범)은 동명이인의 두 인물인가? 하지만, 우리나라 어떤 독립사료에도 김성범이 두 명이라는 기술은 없다.

그럼 김 의원이 작은 할아버지라고 밝힌 김학규 장군은 어떠한가? 독립기념관 자료실에서 김학규 장군을 검색해보면 1900년 평남 평원 출생으로 나와 있다. 그 후 만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를 나오고 동명중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1931년에 독립운동에 투신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즉, 김 의원이 할아버지, 작은 할아버지로 밝힌 독립군 김성범과 김학규 장군은 태어난 출생지가 전혀 다르며, 나이 차이도 11년이나 나고 활동시기와 지역도 전혀 다르다. 

2. 출생내력 의문(본관 및 호적관계)

네티즌들은 주로 김 의원의 호적과 김학규 장군의 호적의 불일치를 문제삼고 있다. 즉, 김학규 장군은 본관이 안동이고, 김 의원은 의성, 또는 김해 김씨인데, 어떻게 일가친척이 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열린우리당 총선후보 프로필과 중앙일보 인물 검색 난에는 김 의원의 본관이 김해로 나와있으며,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인물검색 난에는 의성으로 나와있다. 

그래서 필자는 김해 김씨 대종회와 의성 김씨 대종회에서 자료를 찾아보았다. 그랬더니 의성 김씨 역사인물란에 김희선(현 국회의원)으로 기재되어 있었다. 의성 김씨 대종회에 확인을 하니, 기재된 내용이 ‘맞다’는 대답이었다. 

문제는 김 의원이 밝힌 작은 할아버지 김학규 장군의 본관이다. 각종 포털사이트 검색 난에 김학규 장군의 본관은 안동으로 기술되어 있다. 하지만 포털사이트가 틀렸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 보다 확실하게 하기 위해 각 김씨 대종회를 통해 항렬자를 확인해 보았다. 

그랬더니 안동을 本으로 하는 김씨 중에서 경순왕의 아들 김숙승을 시조로 하는 舊안동 김씨에서는 김학규 장군이 쓰는 배울 學이나 벌 奎라는 항렬자를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김선평을 시조로 하는 新안동 김씨 항열자를 찾아봤다. 그랬더니 균(규), 진, 한, 동으로 항렬자의 순서가 나타났다. 김옥균, 김좌진, 김두한, 김을동...이런 식으로 내려가는 것이다. 하지만, 新안동 김씨의 균(규)자 항렬은 음은 같지만, 한자는 圭자로 김학규 장군의 벌 奎와 날랐다.

그래서 이번엔 경주 김씨 항렬자를 찾아보았다. 그랬더니 수은공파 45세에서 배울 學자를 쓰는 항렬이 나타났고, 지금도 경주 김씨 수은공파에선 학자 항렬을 종종 볼 수 있다. 물론 의성 김씨 항렬도 추적해보았다. 그랬더니 의성 김씨 항렬자에서 '벌 奎'자를 쓰는 항렬이 나타났다. 다만 김학규, 김성범이 독립운동가라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다. 의성 김씨 문중은 심산 김창숙 선생등 독립유공자들을 가장 많이 배출할 가문으로 이에 대해 세세하게 밝혀놓고 있는데, 어디에도 김학규, 김성범의 이름을 찾을 수 없었다. 

따라서 김 의원과 김학규 장군이 일가친척이 되기 위해선 의성 김씨 대종회 기록과 각종 포털사이트 검색 정보가 틀렸고 김학규 장군의 이름이 항렬과 상관없이 지어진 것이라야 한다. 이래야만 김 의원과 김학규 장군이 일가친척이 될 길이 열리는 것이다. 

김 의원이 밝힌 기억에서 나타나는 의문

김 의원은 자신의 홈페이지에서 작은 할아버지 김학규 장군에 대한 기억을 언급하였다. 주로 김 의원이 평택의 작은 아버지댁에 기거하고 있을 때 골방에 숨어있던 김학규 장군에 대한 기억과 6.25전쟁 이후 1년 남짓한 기간이다. 

하지만 이것도 추적을 해보니 의심스런 대목이 여러군데 나타난다. 그것은 김학규 장군의 이력을 보면 알 수 있다. 그 양이 많기에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독립기념관의 검색자료에 의하면 김학규 장군은 1931년 동명중학교 교편을 그만두고 광복군에 들어간 뒤 중국 본토와 만주를 오가며 광복군에서 각종 활동을 하다가 광복군 초모(모집)임무를 맡아 51명을 모아 제3지대를 창설하고 지대장이 되었다. 

해방 후 서울에 들어온 김학규 장군은 김구 선생을 따라 한독당을 조직하게 되고 그 당의 조직부장 역할을 맡아 조직을 총괄하게 된다. 그러던 중 홍종만, 안두희 등의 꾐에 빠져 이들이 한독당에 가입할 수 있도록 주선을 하게 된다. 

그 후 1949년 안두희에 의해 김구 선생이 피살되자, 이승만 정권은 안두희의 개인범행으로 몰고 가려고 한다. 그에 따라 안두희와 안두희를 입당시킨 김학규 등을 체포하고 군법회의에 회부한다. 안두희와 김학규 장군은 15년형을 선고 받는다.

6.25가 터지자 안두희는 석방되고, 김학규는 석방이 안된 채 서대문형무소에 있다가, 인민군의 서울 진주 이후 풀려나게 된다. 그 후 수원에서 은거하고 있다가, 1953년 전쟁이 끝난 후 다시 이승만 정권에 의해 검거되어 4.19 직후 풀려난 뒤 한독당 재건위를 조직하고 그 대표로 취임하였다가 1962년 건국공로훈장을 받고 1967년 사망한다.

이것이 독립기념관 자료와 김구 암살관련 논문, 그리고 김학규 장군의 회고담을 통해본 독립운동가 김학규의 내력이다. 

김학규 장군의 내력을 보며, 김 의원의 기억과 연관한 의문점은 하나 둘이 아니었다. 먼저 김 의원은 작은 할아버지 김학규 장군과 함께 했던 시간이 투옥 전 잠시, 그리고 6.25 이후 1년 남짓한 기간이라고 말하고 있다. 

첫째 의문은 김학규 장군이 주로 서울에서 활동하였으며, 평택에 내려가 기거한 것은 6.25 이후 서대문 형무소에서 출감하고 난 뒤 수원에서 은거했을 시기가 유일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김 의원의 기억은 아마도 김학규 장군이 잠시 수원에 은거하고 있을 때일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그런데 1960년 형무소 출소이후 김학규 장군은 다시 왕성한 활동을 하다가 1967년 사망하게 되는데, 그에 대한 김 의원의 기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열살 전후의 기억만 있고, 스무살 전후의 기억은 없다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김 의원이 그토록 자랑하고 싶은 작은 할아버지라면 당연히 출소 이후에도 왕래가 있어야 했던 것 아닌가?

둘째 의문은 김학규 장군의 부인과 관련 된 것이다. 김 장군의 부인은 오광심으로 김 장군과 함께 광복군에서 활동하다가 1976년 사망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만약 김 장군이 김 의원의 작은 할아버지라면 오광심 여사는 작은 할머니가 되는 것이다. 오 여사는 남편과는 달리 감옥에 투옥되지 않은 채 서울과 경기도 일원에서 살았다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데도 독립군의 가계를 자랑삼아 이야기하는 김 의원의 어떤 기억에도 작은 할머니에 대한 기억은 없다. 오광심 여사도 김학규 장군처럼 활동을 왕성히 한 독립지사이며, 광복군 제3지대의 선전책임자 역할을 한 사람이다. 건국 공로훈장이 추서되기 까지 했다. 그런 작은 할머니에 대한 기억이 없다니, 그리고 작은 할머니 댁을 한번도 찾지 않았다니 정말 의문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

이렇듯 김 의원의 기억과 김 의원이 밝힌 김학규 장군, 그리고 독립군 김성범 사이의 관계는 의문 투성이다. 출생지와 호적관계, 그리고 그들에 대한 기억까지...

이러한 의문 때문에 네티즌들은 김 의원에게 명확한 해명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총선 후보자로서 그리고 국회의원으로서 자신의 프로필을 속였다면 이는 범죄행위와 다를 바 없고, 선거법 위반이 된다. 따라서 김 의원 스스로 명확한 해명을 통해 세간에 일고 있는 의문에 대해 명명백백히 밝힐 필요가 있다. 

특히 광복군 3지대장 이었던 김학규 장군은 해방이후 불행한 세월을 보냈다. 안두희 등의 꾐에 빠져 자신이 평생을 모시던 김구 선생이 암살되는데 도움을 준 꼴이 되었고, 이로 인해 수감생활까지 하는 고초를 겪었다. 이런 김학규 장군을 위해서라도 의문은 확실히 밝혀져야만 한다. 

과연 김희선 의원은 김학규 장군의 종손녀가 맞는 것일까? 이 의문에 대해 본인의 해명과 계속적인 진실추적이 이뤄져야 하지 않을까?

김진영 (시사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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