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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근대화 론에 관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게시물ID : history_1635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Lemonade
추천 : 6/11
조회수 : 503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4/06/14 22:02:11
사실 이제 껏 답글로 한 이야기에 불과하고 역사 게시판의 아니 오유의 지식인님들에 비하자면 한줌 모래알 같은 생각이지만 술이 좀 들어가 용기가 생긴 틈을 노려 이런 저런 생각을 일전의 이야기를 토대로 글을 남겨봅니다.

우선적으로 식민지 근대화론은 어느 답정너 분이 말씀하신대로 일본을 처 빠는 이야기이고 친일인가 하면 그건 아닙니다, 요즘 친일의 정의가 바뀌었다면 모를까 일본의 수탈과 착취를 인정하고 그 메커니즘 마저 연구하는 것을 친일이라 볼수는 없겠지요, 물론 전쟁 범죄 등도 인정합니다,

사문난적 적인 시각이 아니라면 한번 읽어보시면 좋겠는데 이영훈이나 갑자기 이름이 생각 안나는데 그 분들이 바라보는 식민지 근대화론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령 도요타 재단의 지원을 받아 나온 우리나라의 최초의 식민지 근대화론의 연구 결과를 집합시킨 근대 조선 수리 조합 연구도 그러합니다, 무능한 일제를 비판하고 능동적이며 효율적으로 변화해 나가는 자영업자를 조명하고 있습니다.

뭐 뉴라이트가 만들어지고 연구가 시작된게 아니라 그 반대 그러니까 딱히 위장을 하고 있었다기보다는 그러한 연구를 하다 뉴라이트로 넘어가 상태가 좀 안좋아지신 것이니 당연한 문제일수 있겠지요.

이게 중요한게 아니라 그렇다면 식민지 근대화론이 무엇이냐 하면 주장하는 학자나 놀랍게도 경제학적 접근 방법과 역사적 접근 및 해석 방법의 차이에 따라 수없이 갈려버릴수 밖에 없는, 갑론 을박이 진행될수 밖에 없는 그런 이론들에 따라서 좀 다르기는 합니다만 기본적으로 근대화 라는 그러한 현상의 기본적인 포석은 모두 한반도가 일제의 식민지였던 시절에 깔리게 되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며 이론들에따라 조금씩 다릅니다만 역시 그럼 그 것을 대체 어떠한 시각과 방식으로 바라보아야 하는가를 이야기 들하고 있습니다,

자 그럼 내용을 좀 더 들어가보자면 이러한 식민지 근대화는 경제적 접근에 있어 수혜자가 우리나라 사람들이 아니라는 점에서 비판이 나올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인 경제적 발전의 정도는 근대화 라는 총체적 현상의 극히 작은 일부만을 차지할 뿐이지 그 것이 곧 근대화의 척도는 아닙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자본주의화와 산업화 그 자체가 아니라, 그러한 변화와 함께 내지는 그러한 변화로 인해 찾아오는 총체적인 구조적 변화를 일컫는 것입니다.

가령 아일랜드를 생각해보면 이해가 쉬울지 모르겠습니다, 아일랜드는 1840년 경 대기근을 통하여 인구 중 100만 명 가까이가 흉작으로 인한 굶주림, 그리고 영양실조로 인해 찾아온 질병과 전염병으로 굶어죽습니다. 또 다른 인구 100~150만 명은 이 대재앙을 피해 아일랜드섬을 '탈출'해서 미국으로 이민을 갑니다. 

아일랜드의 내부의 사회적 인프라는 실질적으로 붕괴되고, 이제까지 수백여년간 영국의 그늘 아래 머물러왔고 40여년을 영국과의 합방아래 살아오던 아일랜드인들 사이에서 아일랜드 민족주의가 용솟음치고, 섬 전체가 불온한 상태에 빠지고, 폭동과 반란, 독립운동 속출합니다. 과연 아일랜드는 근대화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지독한 참상을 겪은 것일까요?

아닙니다, 근대화는 이루어 졌습니다, 아일랜드는 대영제국의 속령으로써 좋든 싫든 잉글랜드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고 런던을 중심으로 둥글게 산업도시들이 포진한 잉글랜드 지방과 같은 수준의 산업화와 공업화를 이루지는 못했다고 해도, 대영제국의 일부이자 브리튼 본섬과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곳으로써 잉글랜드의 산업적, 경제적, 제도적 발전상에 많은 영향을 받게 됩니다.

북 아일랜드 얼스터를 제외한 나머지 국토의 2/3 정도는 여전히 농지가 대부분이었고, 친영계 아일랜드 지주와 잉글랜드의 부재지주들이 대부분의 아일랜드 인구를 소작농으로 부리고 있었지만, 어쨌든 공식적으로는 아일랜드인들은 대영제국의 공민권의 보호 아래에 있었고, 산업적/금융적 투자가 집중된 북부의 얼스터는 근대적 도시화가 역동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즉, 근대화의 수혜자가 누구인가는 근대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느냐라는 질문과는 하등 상관이 없습니다. 그것은 외부세력에 의해 진행된 근대화 당위성의 문제이지 사실경과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19세기 내내 웨일즈,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잉글랜드는 대영제국의 일부로 분명히 근대화가 된 것이고,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중반까지 한반도는 일본제국의 속령으로써 좋든 싫든 물론 우리야 싫지만 근대국가로 재편성된 일본제국의 구조적 변화에 종속되어 함께 그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지요.

19세기의 아일랜드와 20세기 초의 조선은 상황이 매우 유사합니다. 두 곳 모두 그 주민이 원치않는 강제적인 합병의 결과 보다 큰 제국의 일부로 종속되었고, 두 곳 모두 전적으로 농업위주의 전근대적인 생산관계가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상황에서 자신을 종속시킨 제국의 주도로 진행된 근대화 작업에 노출되었습니다. 그리고, 대영제국이 아일랜드에 진행한 근대화작업의 수혜자가 아일랜드인들이 아니었던 것처럼, 일본제국이 한반도에 수행한 근대화작업의 수혜자는 조선인들이 아니었죠. 

아일랜드인과 조선인은의 삶은 모두 부당한 억압과 착취에 노출되었습니다.그리고, 두 곳의 사람들 모두, 자신의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근대화에서 배제된 것처럼 보이는 일상을 살아가야 했던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두 곳 모두 '속령'의 위치에서 '당해버린' 그 근대화가 좋든 싫든, 앞으로 이룰 근대국민국가의 태동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은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 대체 무엇이 근대화 된것이냐 본다면 가령 독립운동을 생각해볼수 있습니다, 1910 년 강제합병 전후의 단계에서 항일저항운동의 궁극적인 목표는 조선의 독립입니다. 외세를 배격하고, 외국의 사상과 문물이 침입하는 것을 격퇴하여 왕국으로서 조선을 부활시키는 것이 목적이었지요. 

그런데 1920년대를 경계로 항일운동의 성격은 변하기 시작합니다. 더 이상 조선왕조의 부활은 조선인들의 미래의 일부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어느 순간인가, 외세를 격퇴하고 나라를 보전한다는 이념은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목표는 '나라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를 세우는 것'으로 변해버립니다. 자강운동이 시작됩니다. 왕조에 종속된 신민으로서 나라에 충성하여 조선을 되살리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힘을 길러 강한 민족이 되어 독립된 국가를 수립한다는 것이 최종적인 목적으로 변하게 됩니다.

예컨데 자강운동과 함께 수행된 것 중 하나가 신분타파 운동인데, 옛 신분의 양천제의 위계에 따르는 것을 거부하고 모두가 같은 조선국민으로써 자신을 위해, 자기 민족을 위해 독립된 국가로 나아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 있습니다. 또 그와 함께 여성평등 운동도 시작이 됩니다. 이것은 사실 19세기말 조선에서는 뗄 수 없었던 근대적인 사상변화의 중요한 한 걸음을 식민지 시절에야 비로서 뗄 수 있게 되었다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조선의 식민지화와 함께 구체제의 사상과 이념을 수호하던 지배계급이 무너져내린 결과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또한 국산 물산의 소비를 장려하는 운동, 경제적인 자강운동이 부상하는 것 또한 조선말에는 '행상이나 하는 천한 계층'으로 취급받을만한 신흥계급이, 오히려 독립을 위해 가장 중요한 위치 중 하나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의미를 띄게 됩니다. 물론, 이 '민족자본'이라는 것들의 실체는 옛조선의 인민들이 믿었던 것과는 전혀 달랐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격동의 30년대. 이어지는 무장투장과 테러를 통한 노선을 택한 사람들의 이념적 지표에서 이제 조선왕조의 부활 같은 것은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이제 이들은 단순한 '독립' 이상으로, 새로운 국가의 '수립'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임시정부'가 만들어지고, 이들이 내세우는 강령은 확실히, 옛조선이 국가로써 건재할 때와는 전혀 다른 세상을 꿈꾸게 됩니다. 일제의 지배가 이어진지 20년이 넘게 되면서, 일부는 일제에 투항하고, 일부는 저항을 계속하지만, 그 어느 쪽이 되었든간에 '앞으로의 세상'이 전근대적 시대와는 전혀 다른 시대일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과연 조선인들 속에서 무엇이 변한 것일까요?

이렇듯 식민지 시절, 확실히 조선인들은 무엇인가가 근본적으로 변하게 됩니다. 친일에 속하든, 항일에 속하든, 아니면 어느 쪽에도 적극적으로 가담할 수 없이 일상을 살아나갈 수 밖에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든간에, 변해버렸습니다.

그것은 독립을 하여 근대적 민족국가를 이루는 것이 민족으로서 생존하기 위해 절대적인 중요성을 띄게 되는 순간을 조선인들이 맞이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사실에 눈을 뜨기 이전과 눈을 뜬 이후의 차이가 바로 식민지 근대화의 본질을 차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일제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한반도에 깔아놓은 근대적 구조에 예속되어 있으면서도, 그 혜택으로부터 철저히 배제되고 유리된 현실 속에서 조선인들은 더욱 강렬하게 근대적 구조의 필요성에 눈을 뜨게 되었다는 역설입니다. 이것이 바로 식민지 근대화의 실체인 것입니다.

식민지 근대화의 정체는 '일제의 근대화 덕분에 조선인들도 먹고살게 되었다'는 둥, '일제 덕분에 오늘날 한국이 생겨났다'는 둥의 시혜냐, 가해냐? 차원에서의 문제가 아니라, 식민지라는 나락으로 떨어지기 이전까지는 여러가지 이유로 특히, 물리적 기반의 미완성이 큰 부분을 차지하는 이유로구조적인 근대화에 미치지 못한 조선이, 식민지라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경험을 통해 강렬하게 민족주의에 각성함으로써 근대화에 목적적으로, 거의 강박적으로 도달하게 되는 인과의 역전인 것입니다.

보통 근대화라는 것은 '근대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사회체제가 변화하는 그 전체적인 과정이죠. 물리적/경제적 변화로 인해 구체제로써는 봉합할 수 없는 문제들이 발생하고, 그것으로 인해 발생한 사회적 모순들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강렬한 폭력을 통해 구체제를 깨부수든, 아니면 보다 온건하고 지속적인 개혁으로 구체제를 꼬드겨 변화시키든간에 어쨌든 하나의 정석적인 인과관계에 의한 현상입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민족주의가 발생하고, 근대국가이념이나 시민개념이 생겨나고, 민주적 제도가 도입되는 것이죠.식민지 근대화는 그 인과의 역전입니다. 앞서 근대화를 이룩한 국가들의 제국주의적 팽창으로 인해 희생이 된 식민지는 그 상황으로 인해 복합적 모순을 경험합니다. 한 편으로는 독립을 상실하고 외세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어 착취와 수탈의 대상이 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식민지화가 되는 과정에서 자력으로는 아직 깨부술 수 없었던 구체제가 해체되어 버리는 진보적/해방적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식민지 경험이 가혹할 수록 구체제가 사리져버린 이념의 공백을 재빠르게 채우는 것은 엄청나게 가속된 민족주의이고, 자생적으로는 아직 근대화로 나아가기를 기대할 수 없는 물리적, 물질적 기반의 취약성에도 불구하고 식민지인들은 그 의식이 먼저 목적론적으로, 필요에 의해, 생존을 위해 근대화에 도달하게 되는 바, 이것이 바로 식민지 근대화의 요체입니다.이러한 생존적 차원에서 근대화의 필요성에 눈을 떴기 때문에, 이후의 과정은 자연적/자생적인 근대화의 코스를 밟지 않고, 엄청나게 단축되고 축약된 형태로, 가장 우선적으로 필요한 부분들에서 근대화가 계획적이고 인위적이고 집약적으로 이루어지게 되는 그 전체의 과정을 뜻한다는거죠.

그렇기 때문에 식민지 근대화론은 예컨데 엄밀하게 말하자면 "식민지 시절에 근대화가 이루어졌다"는 것에서 그치는게 아니라 "식민지 경험이 어떠한 근대화의 유형을 이끌어냈느냐"로 나아갈수 있는 그러한 이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축약한 사례를 들어보자면 1948년도에 수립된 "대한민국"은 1910년 전에 존재하던 "조선"이 이름만 바뀐 것은 확실히 아니지요. 옛 조선과는 성격이 완전히 다른 나라입니다. 또, 그 때 "대한민국"만이 유일하게 수립된 국가도 아니고말이지요, 그 당시의 "대한민국"과는 다른 형태를 띄고 있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거의 동시에 수립이 됩니다. 이 국가도 옛 조선과는 다릅니다. 

그리고 대한민국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둘 다 "근대국민국가"를 표방하고 있습니다.그렇다면, 아직 근대화가 되기도 전에 독립이 되면 근대국민국가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던걸까요? 그렇다면 적어도 그 사람들은 그 이전부터 근대적사상을 품은 사람들이었다고는 할 수 있겠죠, 그럼 그 이전이라는건 언제를 말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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