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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 -식민지근대화론
게시물ID : history_1636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pei
추천 : 4/5
조회수 : 1334회
댓글수 : 9개
등록시간 : 2014/06/15 09:51:24
열심히 반대만 누르시지 말고
이글에 반박하세요
그 많던 바ㄴ박들은 안하시고
살짝 반대만 누르고 또르르...

 오만한 식민지근대화론,그 실증적 오류를 파헤치다   박수현(민족문제연구소 편찬실장)       2005년 찍은 해창갑문 모습. 이영훈 교수는 일제가 이 갑문을 설치하면서 김제만경평야 유역이 쓸 만한 경작지로 바뀌었다고 주장한다.  허수열 교수는 해창갑문이 1942년 준공됐다는 사실을 밝히며 그렇다면 일제시기 내내 이곳은 버려진 땅이었을 것이라고 반박한다. (한길사 제공)  식민지근대화론이 국내에 소개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중반 이후였고, 본격적인 논쟁은 1990년대에 들어서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역사학계에서는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들의 주장을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였다. 식민지근대화론은 역사학계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던 ‘내재적 발전론’과 ‘수탈론’에 반대해 안병직, 이영훈을 중심으로 한 경제사 전공자들이 들고 나온 시각이었다. 이들은 조선사회의 내재적 자본주의화 가능성, 즉 ‘내재적 발전론’을 부정하고 한국 근대는 서구 근대의 수용과 이식을 통해 발전의 계기를 맞았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식민지시기를 ‘수탈론’, 즉 ‘수탈과 저항’의 관점으로만 파악하는 역사학계의 기본 인식을 비판하고, ‘개발’의 측면도 인정해야 한다는 이른바 ‘수탈과 개발’을 강조했다.   식민지근대화론의 대두는 그 근거나 논리의 타당성 여부에 상관없이 그동안 틀에 박힌 연구방법론과 인식론에 안주하던 역사학계에 큰 자극제가 되었고, 특히 식민지시기 연구자들에게는 패러다임의 전환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이들의 주장은 ‘수탈’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개발’의 측면도 함께 봐야 한다는 것이었고, 한국 자본주의의 발전이라는 큰 틀 속에서 ‘개발’에 한국인도 주체적으로 참여했다는 점을 부각시켜야 한다는 논지였다. 이들 또한 자신들의 주장을 ‘식민지수탈-개발론’으로 칭했다. 하지만 정작 이들의 연구는 통계에 매몰되어 ‘개발’만을 부각하는 편향성을 드러냈으며, 이 또한 일본인자본 위주의 ‘개발’로서 조선인자본의 억제와 차별이라는 본질은 놓치고 있었다. 그 결과 이들의 주장은 처음부터 식민지미화론으로 귀결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 우려가 현실로 나타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또 이들의 학문적 주장이 정치적 지향성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도 쉽게 확인되었다. 김대중 정권에 이어 노무현 정권이 들어서자 위기의식을 느낀 보수층의 대변자로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은 이른바 ‘뉴라이트’의 선봉장이 되었고, 식민지근대화론은 역사의 흐름에 역행하는 보수 기득권층을 옹호하는 논리로 변질되었다. ‘수탈과 개발’은 ‘수탈’이 사라진 ‘개발’만이 남았고, 일제의 개발에 한국인들도 주체적으로 참여함으로써 한국 자본주의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는 주장은 일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한국인 자본가들을 옹호하고 이들을 대한민국 발전의 영웅으로 미화하는 논리로 변질되고, 식민지시대 한국인 관료들도 근대화의 기초를 닦았다는 억설로까지 확산되었다.   나아가 이들은 역사학계에 전면적인 공세를 펼치며 역사교과서 개편 문제까지 들고 나왔고, 2008년 초 이명박 정권의 출범과 함께 고등학교 한국근현대사 교과서용으로 이른바 ‘대안교과서’를 출간했다. 기존 교과서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좌파적 시각에 입각해 역사적 진실을 왜곡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미래지향적인 역사교육을 위해서는 대한민국의 발전상, 즉 근대화,산업화에 중점을 둔 새로운 교과서가 필요하다는 취지였다. ‘대안교과서’는 학계의 반대로 검인정에 실패했지만 보수정권과 결탁한 이들의 공세는 여전했다. 최근 교육과학기술부의 과거 회귀적이고 반역사적인 역사교육과정과 집필기준 개편안도 그 기저에는 식민지근대화론이 자리 잡고 있다.    이들의 주장대로라면 식민지근대화론은 결국 식민지시기 역사발전의 주역은 일제와 친일파들이었고, 대한민국은 이 토대 위에서 발전했다는 주장과 다름없었다.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으로 대표되는 일본 우익들의 주장, 나아가 식민사관의 내용과도 학문적 외피만 두터워졌을 뿐 별 차이가 없었다. 이들이 주장하는 새로운 역사상, 미래지향적 역사상이란 것도 식민사관에서 주장하는 역사상에 해방 후 독재정권과 산업화 세력을 미화한 역사상을 추가한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론과 실증이라는 학문적 틀이 보강되었을 뿐이다.    모르긴 해도 이들 스스로도 일제가 근대화를 이루어주었고 이 때문에 해방 이후 한국이 발전하게 되었다는 식민사관, 일본 우익의 주장과 식민지근대화론이 궁극적으로 무엇이 다른지에 대해 고민은 했을 것이다. 그리고 수많은 비판도 예상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들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신들의 통계분석과 실증적 연구에 대한 맹신이었다. 식민지근대화론은 정확한 통계분석과 철저한 고증이 바탕이 되었으며, 따라서 자신들의 연구는 ‘역사적 사실(fact)’과 다름없다는 오만함이다. 수 십 년간에 걸쳐 이루어진 역사학계의 성과를 무시하고 한국근현대사를 재단할 수 있다고 본 것도 이 오만함에서 비롯되었다.    오만함은 도를 넘어 역사소설까지 ‘손을 보았다.’ 식민지근대화론의 수장인 이영훈은 2007년 뉴라이트 계간지인 『시대정신』 여름호와 가을호 2회에 걸쳐 “광기 서린 증오의 역사소설가 조정래”, “김제 역사의 본류의 진입 못하고 이방인으로 맴돈 조정래와 무엇을 알고 모르는지 구별조차 못하는 MBC”라는 글을 실었다. 첫 번째 글은 소설 『아리랑』에 대한 최초의 비판 글이고, 두 번째는 첫 번째 글에 대한 MBC의 반론을 재반박한 글이다. 이영훈 비판의 핵심은 『아리랑』의 내용이 ‘역사적 사실’과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리랑』은 작가도 밝혔듯이 식민지시대 고통의 역사와 민중의 애환을 구체적이고 총체적으로 알리기 위한 소설이다.    소설 속에서는 침탈 이전의 평화롭고 풍요로운 김제?만경평야가 그려지고, 수탈과 학살 장면이 등장한다. 이영훈은 소설 속의 김제,만경평야의 실상, 수탈과 학살 장면은 근거가 없거나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며 조목조목 비판하고, 『아리랑』 속의 수많은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과 얼마나 다르고 비틀려 있는지를 일일이 따지기에는 지면이 너무 협소하다고 폄하했다. 일개 소설가가 엄청난 허구의 사실을 당당히 ‘역사적 사실’로 소리친 것은 세상을 우습게 봤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그리고 역사소설가의 직업윤리까지 운운하면서 작가 조정래가 증오와 광기로 좌충우돌 소설을 이끌었다고 주장했다.    가히 신랄한 공격이다. 과연 학술논문이 아닌 문학작품에 대해 역사학의 실증을 문제 삼아 이렇게 매도하는 것이 사리에 맞는 일인가? 한국근현대사 논문 중에 『아리랑』의 내용을 역사적 사실로 간주하고 이를 근거자료로 활용한 논문이 있는가? 역사소설은 말 그대로 역사적 사실(fact)과 작가의 풍부한 상상력(fiction)이 결합된 소설이다.    내용 전개상 어느 부분을 ‘fact’로 채울 것이냐 ‘fiction’으로 처리할 것이냐 하는 문제는 작가의 몫이고 능력이다. 물론 역사적 사실에 충실할수록 역사소설로서의 가치는 높아진다. 그러나 소설의 내용이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해서 문학성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며, 또 학문적으로 매도당할 만큼 도덕적 흠결 사유가 되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상식은 이영훈 자신도 모를 리 없다. 그러나 그는 역사소설을 사료가 적어 소설이 거의 작가의 상상력에 의존하는 유형과 사건과 인물이 가까운 과거에 속해 사료가 풍부하게 전하는 유형으로 나누고, 『아리랑』을 후자의 유형으로 보았다. 그리고 후자는 시바 료타로의 『료마가 간다』『언덕 위의 구름』과 같이 치밀한 고증이 필요한데, 조정래의 『아리랑』은 전혀 실증적 요건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이다. 자의적 기준으로 역사소설을 두 부류로 나눈 것도 문제지만, 『아리랑』을 후자의 유형으로 파악해 역사학의 잣대로 평가한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근현대사와 관련한 역사소설은 역사학자, 그것도 실증에 철저한 대가가 아니면 써서는 안 된다. 역사소설은 역사학자의 몫인 셈이다. 지나친 월권이고 오만이다. 역사소설은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을 소재로 하지만 역사학이 아닌 문학의 영역이며, 그 평가기준 또한 학문적 엄밀성보다 문학적 예술성이다.    또한 『아리랑』은 결코 자료 수집과 조사, 역사적 사실을 등한시 한 작품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리랑』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작가가 수많은 자료 조사와 분석을 통해 역사적 사건을 문학적으로 표현하고 해석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작가의 노력이 작품 속에 그대로 녹아들면서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었기 때문이다. 작가는 『아리랑』을 쓰기 위해 자료 수집과 조사에 실로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으며, 특히 사건의 현장이 되는 곳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직접 찾아가 조사하고 증언을 채취했다. 아리랑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작가의 취재수첩은 자료 조사에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집필기간만도 4년 8개월에 달했다. 역사소설로서 이만한 사전 준비와 조사, 심혈을 기울인 작품은 그리 흔치 않다.    이영훈이 『아리랑』을 문제 삼은 이유는 명백하다. 박물관에나 들어가 있어야 할 수탈론이 큰 위세를 떨치며 세상을 활보하고 있다고 본 것이다. 그에 따르면 식민지시기는 수난과 모멸의 시기이긴 했지만 새로운 학습과 성취의 시대, 개발의 시대였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상을 명백한 ‘역사적 사실’로 확신했고, 따라서 수탈론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는 구시대의 유물로 간주했다. 그런데 ‘수탈과 약탈 이야기로 가득 찬’ 『아리랑』이 최고의 역사소설이란 찬사와 함께 엄청난 판매부수를 기록하고 있었고, 그 파급력과 학습효과는 그 어떤 논문이나 학술서도 비교 대상이 되지 못할 정도였다.    이영훈의 입장에서는 그 영향력을 차단하기 위해서, 또 식민지근대화론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아리랑』이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먼 허구라는 점을 밝히는 일이 절실했다. 그리고 ‘연대기 수준의 사건’, 즉 ‘역사적 사실’조차 왜곡했다는 소설 속의 몇몇 장면을 문제 삼았다. 후술하겠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은 지면을 할애하며 중점적으로 비난한 장면이 김제?만경평야를 묘사한 부분이었다. 김제,만경평야는 우리나라 최대의 곡창지대로서, 수탈 또는 개발의 측면에서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따라 식민지시기 전체의 역사성이 달라질 수도 있는 가장 상징성이 큰 지역이었다. 이영훈은 이 지역이 곡창지대로 변한 것은 일본인들의 개발 때문이라는 점을 들어, 식민지시기가 수탈과 약탈이 아닌 개발과 근대화의 시대였음을 강조했다. 『아리랑』 비판의 핵심은 바로 이 부분이었다. 개발과 근대화, 그리고 일본인의 진취성. 왜 이영훈이 일본 근대화와 군국주의를 미화한 시바 료타로의 『료마가 간다』,『언덕 위의 구름』을 『아리랑』과 비교하며 최고의 역사소설이라고 예찬했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는 이렇게 비아냥거렸다. “세밀한 조사와 물샐 틈 없는 고증은 조정래 소설가에게는 시간낭비일 뿐이다. 어디 조정래 소설가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 있겠는가. 한국의 역사학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한 자락의 바람에 불과하거늘.” 과연 이러한 오만함이 용인될 정도로 식민지근대화론의 실증은 완벽한가? 『아리랑』을 비난한 근거는 과연 세밀한 조사와 물샐 틈 없는 고증으로 이루어진 역사적 사실인가?    허수열의 『일제초기 조선의 농업』은 이에 대한 통렬한 실증적 반박이다. 부제도 “식민지근대화론의 농업개발론을 비판한다”로 달았다. 식민지근대화론에 대한 비판은 역사학계에서도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지만, 저자와 같은 경제사 전공자가 철저한 고증과 분석을 통해 식민지근대화론을 비판한 경우는 극히 드물다. 저자는 6년 전에도 『개발 없는 개발』이란 저술을 통해 식민지근대화론의 허구성을 실증적으로 비판했으며, 그 학술적 공로를 인정받아 ‘임종국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 책은 『개발 없는 개발』의 연속선상에서 일제 초기 농업부분에서의 식민지근대화론을 비판하고 있으며, 특히 이영훈의 『아리랑』비판에 대한 실증적 반박이 핵심을 이루고 있다.    제1장은 농업부문의 식민지근대화론 내용에 대한 비판이다. 농업부문에서 식민지근대화론의 핵심적인 주장은 1911~18년의 농업생산이 1918~29년에 비해 빠르게 증가했다는 것이다. 그 주요 근거는 『한국의 경제성장 1910~1945』(김낙년 엮음)이 정리한 조선의 국내총생산(GDP) 추계다. 이 통계자료에 나타난 식민지시기 농업생산의 성장에 따른 국내총생산의 비약적 증가 추세는 실상 식민지근대화론의 기초적 근거였다. 1910년대 농업생산이 크게 증가했다는 것은 이 통계 중에서 1911~18년의 증가 추세를 근거로 한 것이다.    그런데 1910년대의 통계는 어떻게 파악하느냐에 따라 식민지시기 전체의 경제 평가가 크게 달라질 수도 있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공업이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1932년 이후로서 1920년대 말까지는 농업생산액이 전체 산업생산액에서 차지하는 매우 비중이 높았고, 따라서 1910년대의 농업생산의 통계는 식민지시기 경제성장률 산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만약 1910년대의 통계가 잘못되었다면 그동안 식민지시기 경제성장률이 높았다는 식민지근대화론의 핵심적인 주장도 설 자리가 잃게 된다. 식민지근대화론의 주장은 이 통계에 따른 것이다. 그리고 1910년대에 농업생산이 크게 증가한 원인으로 제1차 세계대전의 호경기에 따른 생산의 급증, 러일전쟁 이후 일본인의 진출에 따른 개간과 각종 수리시설의 발달, 활발한 지목 변환, 우량품종의 보급 등을 들었다.    이에 대해 저자는 이들의 1911~18년 통계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반박한다. 1917년까지는 통계가 체계화 되지 않았기 때문에 1910년대 농업통계는 부정확하고 불충분하다는 이유였다. 1910년대 통계가 정확하지 않은 것은 경지나 인구 통계만으로도 쉽게 확인된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1911~18년의 농업의 변화 양상은 1918~29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경지면적이나 재배면적은 산미증식계획 기간인 1920년대에 더 빨리 증가했다는 것이다. 또한 1910년대 농산물 가격이나 개량농법의 보급 등 농업생산이 증가할만한 요인도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결국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이 금과옥조로 여기는 통계 분석은 그 근본인 1910년대부터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토대로 저자는 2~7장에 걸쳐 실증적이고 구체적으로 식민지근대화론의 허구를 파헤쳤다. 핵심은 2장 ‘1910년대 김제·만경평야의 수리시설’과 3장 ‘벽골제’로서, 이영훈이 『아리랑』을 가장 집중적으로 비판한 부분이다. 『아리랑』에서는 일본인들이 진출하기 이전의 김제,만경평야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그 끝이 하늘과 맞닿아 있는 넓디나 넓은 들녘은 어느 누구나 기를 쓰고 걸어도 언제나 제자리에서 헛걸음질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만들었다. 그 벌판은 ‘징게 맹갱 외에밋들’이라고 불리는 김제 만경평야로 곧 호남평야의 일부였다. … 그 초록색 들판은 누구에게나 한없이 넉넉하고 푸짐하면서도 경건하고 겸손한 마음까지 품게 했다.”  이영훈은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공격하며, 형편없던 한국의 농업생산력이 일제의 개발로 크게 향상되었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조정래는 징게 맹갱 외에밋들의 광활함과 풍요로움을 그토록 구성지게 노래하였다.” 그는 일제 초기까지만 해도 이곳은 풍요로운 평야지대가 아니라 광활한 갯벌과 소금기로 풀이 죽어 있는 갯논으로 가득 차 있었다며, 그 실증적 근거로 지도까지 작성했다. 여기에 벽골제 방조제설까지 덧붙여 자신을 주장을 더욱 강화했다. 벽골제가 방조제였다면 둑 아래 김제,만경평야는 갯벌이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결국 이 지역이 비옥한 평야지대로 바뀌게 된 것은 일본인들의 진출과 개발, 즉 수리조합사업 때문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이영훈의 주장이 대부분 부정확한 사실인식에 입각해 있거나 혹은 자의적인 해석으로 가득 차 있는 허구라고 비판했다. 방조제설에 대해서 『삼국사기』,『삼국유사』,『조선왕조실록』,『신증동국여지승람』 등 옛 문헌의 철저한 고증을 통해 벽골제가 방조제가 아닌 엄청난 규모의 저수지였다고 반박했다. 다만 벽골제는 오랜 기간 제방의 일부가 파괴된 상태로 존재했다고 본다. 또한 1910년 무렵 벽골제 아래에는 제언과 보, 수로, 하천의 둑, 해안 방조제 등 재래의 수리시설이 곳곳에 축조되어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곳에는 수많은 촌락이 곳곳에 산재해 있었고, 충분한 농업용수를 공급 받을 수 없어 다소 생산성이 떨어지거나 자주 한발을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다른 지역에 비해 특별히 생산성이 떨어지는 지역은 아니었다는 사실도 입증했다. 즉 일본인이 개발하기 전부터 이 지역은 평야지대였고 수많은 재래의 수리시설이 새로이 수축 또는 보수되면서 활발한 생산 활동이 전개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재래의 농업발전을 과소평가 내지는 무시하고 일본인의 농업개발을 과대평가한 이영훈의 주장, 식민지개발론에 대한 실증적 비판이다.    이어 4~6장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의 호경기, 일본인 주도의 농업개발, 우량품종의 보급 등으로 1910년대 농업생산성이 크게 향상되었다는 식민지근대화론의 주장을 통계자료를 통해 조목조목 반박했다. 이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1910년대 급속한 농업생산의 증가는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농업개발도 허구라는 것이다. 농업개발이 본격화 되는 것은 1920년대였다. 7장에서는 조선 후기부터 일제 초기까지의 농업생산의 변화를 고찰해, 식민지근대화론이 조선 말기의 경제적 혼란과 침체를 과장하고 일제시대의 농업개발은 지나치게 확대해석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식민시관의 정체성론과 사실상 다를 바 없다고 주장했다. 8장 맺음말은 식민지근대화론에 대한 총체적인 비판으로서, 이들의 강력한 무기인 통계분석과 실증이란 것이 실상은 오류투성이며 그 원인을 잘못된 통계분석과 자료 해석, 나아가 역사 해석의 문제로 파악했다.    식민지근대화론의 존재 이유는 통계자료 분석과 고증, 즉 실증이다. 이들은 방대한 통계자료를 체계적으로 분석한 결과와 고증을 통해 역사를 재구성했다. 『일제초기 조선의 농업』은 이러한 식민지근대화론의 실증에 대한 문제점과 오류를 구체적으로 지적한 책이다. 저자는 수탈론의 입장에서 식민지근대화론을 비판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식민지근대화론이 가장 강력한 무기로 삼고 있는 철저한 통계분석과 고증을 통해 그 허구성과 문제점을 입증한 것이다. 특히 이 책은 식민지근대화론의 통계 오류에 대한 분석에 중점을 두고 있는데 이는 저자가 한때 식민지근대화론자들과 함께 연구한 경제학자로서 그들의 연구방법론의 특징과 한계를 잘 알고 있는 데서 기인한다. 여기에 수리조합 자료를 비롯해 많은 자료를 수집, 정리, 보강해 『개발 없는 개발』보다 더욱 철저한 실증적 분석을 가했다. 이러한 점에서 이 책은 식민지근대화론 비판에 관한 한 가장 체계적이고 실증적이다. 또한 저자는 실증적 오류에 대한 지적과 함께 역사 해석의 차이를 강조했다.    하지만 이 책에 대한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의 반응은 불 보듯 뻔하다. 지금까지 식민지근대화론에 대한 수많은 비판이 있었지만, 이들의 주장은 독선적인 경향을 버리지 않고 오히려 더 강경해지는 면모를 보이고 있다. 이 책에서 주장한 내용은 이미 6년 전 『개발 없는 개발』에서도 강조된바 있지만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이영훈은 『일제초기 조선의 농업』이 출간된 직후 한 언론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읽어보지는 않았어도 "논쟁할 필요가 없는 사안"이라고 일축했다. 일부 언론에서는 다시 식민지근대화론 논쟁이 불붙는다고 했다. 논쟁이 되겠는가? 이들에게서 초기 잠시 보여주었던 일말의 참신한 문제의식이나 학문적 진지함은 사라진지 오래다.    더욱이 보수 기득권층과 한 배를 타고 뉴라이트의 기치를 높이 쳐들면서 이들의 오만함은 극에 달하고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연구를 만능으로 믿고 있다. 식민지근대화론은 철저한 분석으로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완벽함으로 역사를 재단할 수 있는 ‘도깨비 방망이’인 셈이다. 심지어 역사 해석의 차이조차 인정하지 않고 있다. “역사에 고정불변한 진리는 없다”는 명제조차 이들에게는 공허한 외침에 불과하다. 식민지근대화론은 모든 역사상을 만들 수도 있고 어떠한 역사 해석도 가능하다. 식민지근대화론과 배치되면 연구를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이고 역사를 모르는 것이다. 이들의 눈에는 한국의 역사학자들이 너무 공부를 하지 않는다. 역사소설가 수준 또한 일본에 비해 너무 떨어진다. 오죽하겠는가. 그러나 그들이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교훈이 있다. 역사는 결코 오만함을 용서하지 않는다는 준엄한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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