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만 11~12세가 영어를 배울 시 발음을 원어민같이 할 수 있는 나이대의 한계라던데...난 딱 그 한계점인 초딩 6학년 때 이민을 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민 온 동네에는 한국사람이 별로 없었고, 따라서 내가 간 학교엔 ESL이 없었고, 난 진짜 맨땅에 헤딩하는 식으로 현지 애들 사이에 섞여서 거의 못 알아듣는 수업으로 영어를 배웠다. 힘들었지만 그만큼 습득이 빨랐고 그 덕인지 현지인들은 내가 직접 말해주지 않는 이상 당연히 2세겠거니 짐작한다. 영어에 토론토 억양이 섞였느니, 너네 캐나다인들은 말끝마다 eh를 붙인다느니 하는 놀림은 좀 받았지만.
그런 현지 영어(?)를 구사하는 내가 딜레마에 빠질 때가 있다. 부모님이나 주위 한국사람들과 대화할 때다. 아무래도 외국에 거주하는 이상 아무리 한국어로 하는 일상 회화에도 영어 단어가 쓰이는 경우가 많은데 현지인들과 대화할 때는 잘만 굴러가던 혀가 이런 상황에서는 딱 굳어 버리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엄마, 나 지금 막 도착했는데 주차할 자리가 없네. 응, 그 보고서는 잘 냈어. 우리 상사가 완벽하다고 칭찬해줬어."란 문장은 흔한 이민 가정 내에선
"엄마 나 지금 막 도착했는데 parking 자리가 없네. 응, 그 report는 잘 냈어. 우리 boss가 perfect하다고 칭찬해줬어."란 문장으로 변질되어 나오기 마련이다. 영어를 일부러 섞는게 아니라 말할 때 저런 단어들을 한국어로 바꾸는게 오히려 더 복잡한 뇌내 과정을 거쳐야 하기에 나오는 말이다. 이민 온 햇수가 길어질 수록 영어 섞임도도 높아진다. 그런데 저기 쓰인 대로 그대로 발음하느냐? 절대 아니다.
"엄마, 나 지금 막 도착했는데 파킹 자리가 없네. 응, 그 리포트는 잘 냈어. 우리 보스 (혹은 조폭같은 뉘앙스를 없애려면 뽀-쓰)가 퍼펙트하다고 칭찬해줬어."라고 발음한다. 그러면 오히려 우리 엄마가 "그래? 펄-펙이래?"라며 혀를 더 굴리신다(...)
나보다 어린 나이에 왔기에 현지 발음을 한국식 발음으로 바꾸는데 미숙한 남동생을 타박도 한다. "야, 엄마한테 apartment랑 cottage사기엔 mortgage가 너무 비싸다고 하면 어떡하니. 지금 아파트랑 코티지사기엔 모기지가 너무 비싸다고 해야지."
...이쯤에서 신빙성 없게 들릴 수 있겠지만 나 현지인들과 대화하면서는 L이랑 R발음을 빼먹지 않고 유창하게 구사한다.
한국 단어를 현지 친구들에게 말할 때도 비슷한 일을 겪는다. "내 동생 최근에 서울 다녀왔어"를 영어로 말하면 "My brother recently visited Seoul"이 되는데, 서울 출신인 나는 어떤 한국인 못지 않게 정확하게 발음할 수 있는 '서울'이란 단어를 '쎄울'내지는 '쏘-ㄹ'이란 양키식 발음으로 굴리게 되는 것이다. 심지어 한국어로 Thank you가 뭐냐고 물어보는 애한테 발음 굴려서 캄쏴함미다라고 내뱉었을 때는 대체 나는 어느 국적의 언어를 구사하는 건가 정신이 혼미해졌었다. 나 분명 한국말 잘하는데! 주위 어른분들이 교포 아이 편하게 해주신다고 하이 하우 아 유라고 인사하셔도 '안녕하세요'라고 예의바르게 대답하는 앤데! 왜! 왜!
난 그래서 발음 갖고 영어의 질을 따지는 사람이 이해가 안 간다. 언어란 모름지기 상대방과의 소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고 상대방이 내 뜻을 얼마나 잘 알아듣느냐가 제일 중요한 것이지 어떻게 발음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내가 엄마한테 perfect를 퍼펙트라고 발음하는 것도, 친구들에게 서울을 Seoul이라고 발음하는 것도 무의식중에 그 발음이 상대가 가장 알아듣기 쉬운 발음이란 인식이 있기에 그런 것일 거다. 발음 걱정 하기 전에 현지인들이 잘 쓰는 어휘나 관용구 하나 더 익히는 것이 영어를 잘 하는 데 훨씬 더 도움이 될 텐데. 솔직히 한국 사람의 영어 발음을 가장 신경쓰는 사람은 다른 한국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