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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 대한 정의
게시물ID : phil_823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레고맨
추천 : 1
조회수 : 677회
댓글수 : 8개
등록시간 : 2014/02/12 23:07:33
인간과 비인간을 구분하는 방법은 여러가지다.
 
이성을 지니고 있다.
손을 사용할 수 있다.
도구를 만들 수 있다.
죽음을 이해할 수 있다.
예술을 창작할 수 있다.
 
등등은 손쉬운 방법이다.
그리고 간단한 만큼... 쉽게 반박당한다.
 
이성을 지니고 있다. -간혹 돌고래보다 지능이 낮은 인간도 볼 수 있다.
손을 사용할 수 있다. -원숭이도 손을 사용한다. 사고로 손이 절단된 사람은 사람이 아닌가?
도구를 만들 수 있다. -비버는 댐도 만든다. 젓가락질도 못하는 사람 꽤 많다.
죽음을 이해할 수 있다. -코끼리도 다른 코끼리의 죽음을 슬퍼한다. 뇌에 손상을 입으면 죽음은 커녕 똥오줌도 구별 못한다.
예술을 창작할 수 있다. -아마존의 어느 새는 자신의 둥지를 아름답게 치장한다. 예술을 창작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는 인간도 많다.
 
이를 치기어린 장난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이들 정의가 뜻하는 바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어쨋든 정의가 완벽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지 않은가?
사실 정의의 문제는 정의를 구성하는 문장요소, 즉 단어들에 대한 정의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도구를 만들 수 있다'는 주장에서 어디까지를 도구로 볼 것인가?
즉 포크래인이나 삽을 도구로 볼 것인가, 등산하기 위해 집어든 나뭇가지도 도구로 볼 것인가에 따라
침팬지가 만든 도구를 도구에 포함시킬 수도 있고 포함시키지 않을 수도 있다.
 
이렇게 보면 정의가 문제가 아니라, 정의를 구성하는 문장요소, 즉 단어를 어떤 기준으로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가 더 큰 문제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문제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끊임없이 이어진다.
'도구를 만들 수 있다'에서 도구를 정의하기 위해 '도구란 일에 쓰이는 여러가지 연장이다라'고 정의하면
다시 일이란 무엇인가를 묻게 되고, '일이란 무엇을 하기 위해 몸을 쓰는 것이다'라고 정의하게 되는 식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도구는 그게 아니네, 일은 저게 아니네, 내가 옳네 니가 옳네 하는 식으로 서로 따지고 쌈박질을 하게 되면서
원래의 목적은 어디론가 사라지곤 한다.
정의란... 결국 이러한 과정에서 승리한 개념일 뿐이다.
정의란 진리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우리의 주장, 진리에 대한 생각의 표현에 불과한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가장 날카롭게 지적한 철학자가 푸코다.
그는 인간이 18세기에 나타났다고 지적한다. (대충 이런 뜻인데... 정확하게는 기억나지 않는다--;;)
물론 누군가는 인간이 18세기부터 나타났다면 그전에는 인간이 없었단 말인가?라고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인간이 18세기에 뿅~ 나타났다는 게 아니라, 지금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인간이라는 개념이 18세기부터 형성되었다는 의미다.
인간은 몇백만년 전부터 존재해왔지만, 인간이란 이것이다. 혹은 저것이다라고 정의하게 된 것은 18세기부터라는 것이다.
 
18세기...
가장 대표적인 예가 헤겔이다.
그는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통해 인간을 정의한다.
주인은 주인이 되기를 결심했기에 주인이 되었고, 노예는 노예가 되기를 결심했기에 노예가 되었다는 말...
이는 인간은 인간이 되기를 결심할 때 인간이 될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하지만 인간이라는 개념을 통해 인간을 정의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인간이라는 개념이 없었다고 해서 아프리카나 아메리카의 인간이 인간이 아니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들과 다른 인간개념을 가지고 있던 동양은 그들의 개념에 비추어볼 때 인간이 아니었던 걸까?
 
존재는 존재 그 자체로 존재하지만, 해석에 따라 다양하게 정의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지금 현재의 인간 개념과 18세기 유럽의 인간개념은 매우 달랐다.
우선 여자, 아이는 온전한 인간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흑인은 동물과 가까운 다른 종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황인종은 17세기만 해도 그들보다 우수한 환상의 종족으로 여겨졌지만,
인도와 중국이 그들의 식민지가 되면서 매우 열등하고 미개한 종족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지금의 인간개념은 인종차별에 대한 수백년에 걸친 피억압자들의 저항으로 형성된 개념에 불과하다.
그리고 미래에는 지금과 또 다른 인간개념이 형성될 것이다.
 
인간을 완벽하게 정의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에게 인간은 완벽하게 정의할 수 있는 존재라기보다
오히려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그 모습이 달라지는 존재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인간을 완벽하게 정의할 수 있다는 생각... 인간의 확실성은 사실 신기루에 불과하다.
일례로 베르그손은 기억을 통해 인간의 인간됨을 정의한다. 간단히 말해 나라는 존재는 내가 나임을 기억하기에 나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아니어도 마찬가지다. 내가 나임을 기억할 수만 있다면 가능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은하철도999의 철이는 기계인간이 되기 위해 우주를 여행하는데, 여기서 인간과 기계는 단지 단백질덩어리와 금속기계라는 차이밖에 없다.
이는 '블레이드 러너'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생각할 수 있기에 스스로를 인간으로 여긴다.
기억이라는 기준에 부합한다면, 이들은 인간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당신은 이러한 범주를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사실 로봇에 대한 불안은 (프랑켄슈타인 이후) 인간이 인간보다 강력한 존재를 만들어내고 그들에게 지배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나왔다.
인간에 대한 기준 때문이 아니라, 이들에 대한 불안이 이들을 비인간으로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을 로봇으로 정의할 것인가 인간으로 정의할 것인가는 사실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이들을 보는 우리의 관점,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가 더 중요하다.
이들을 보는 우리의 관점이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려주기 때문, 즉 우리가 누구인지를 정의해 주기 때문이다.
 
하나의 기준이나 정의만으로 인간을 규정하려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혹 그 내적 체계만으로 규정하려는 것도 의미없기는 마찬가지다.
'공각기동대'는 베르그손과 전혀 다른 해석을 내놓는다.
기억이 나의 나됨을 증명해 준다고? 그럼 기억이 조작되면 나의 나됨은 어떻게 될까?
주인공 쿠사나기는 자신을 인격체로 주장하며 망명을 허락해주길 요청하는 인공지능을 쫓는 과정에서
인공지능에 의해 기억이 조작된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자신의 기억을 조작당한 그들은 과연 자신의 정체성과 주체성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인공지능은 자신을 인격체로 주장하지만, 공각기동대는 그를 인간이나 프로그램으로 명확하게 정의하길 거부한다.
그는 새로운 존재, 새로운 현상일 뿐이다.
굳이 이들에 대해 인간인가 아닌가를 논하는 것이 중요할까?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듯이, 존재는 존재고 개념은 개념일 뿐이다.
지금 인간과 비인간에 대한 구별을 논하지만...
만약 오늘 갑자기 외계생명체가 우주선을 타고 나타났다고 치자.
그들은 문어대가리에 곤충의 다리를 하고 있으며, 이성대신 감성으로 소통한다고 치자.
그들을 보면서 그들이 인간인가 비인간인가를 따지는 것이 중요할까? 그들을 새로운 종으로 분류하면 마음이 한결 편안해질까?
인간과 다른 존재들을 향해 이성이 있네 없네, 손이 있네 없네를 따질 수 있을까?
그들에게 인간의 기준은 더 이상 무의미하다. 인간과 다른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언어체계 내에서 이들을 논리적으로 분석해 보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이러한 분석이 현실을 설명해 주지는 못한다.
오히려 이러한 분석은 현실에 대한 오해를 정당화시키는 도구가 될 수 있다.
손이 없으니 인간이 아니고, 문어대가리이니 어류이며, 따라서 같은 인격체로 취급할 이유가 없다고 말할 수 있게 해준다.
마치 흑인은 인간이 아니고 유대인은 사라져야 할 인종이라고 말했듯이 말이다.
존재에 대한 정의는 기준의 문제이고, 기준은 내가 어디에 있느냐, 어떻게 보느냐, 즉 내 관점이 어떤가에 따라 달라진다.
원뿔의 바닥을 보면 원이 보이고 옆면을 보면 삼각형이 보인다.
그리고 인간의 눈은 그 둘을 원론적으로는 동시에 볼 수 없다. 사선으로 보면 둘 다 보이겠지만, 원형 그대로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결국 이 둘을 모두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상을 동원해야 하고, 상상을 동원하면, 이 상상, 즉 이 가설이 맞는지 틀리는지는 현실에 맡길 수밖에 없다.
 
인간에 대한 정의는 허구에 불과하다.
인간을 정의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다. 인간이 스스로 언어에 기대어 자신을 설명하려드는 것이다.
인간은 언어를 사용해 인간을 정의한다. 이때 언어는 언어의 한계 내에서 인간을 정의하게 된다.
예를 들어 내가 정오에 햇빛을 받으며 '햇빛이 따사롭다'고 말하면 누군가는 '햇빛이 따사롭군'하고 생각할 것이다.
나는 언어를 사용해 그에게 나의 경험을 성공적으로 전달한 것이다.
하지만 '햇빛이 따사롭다'는 말이 그 순간의 바람, 향기, 바스락거리는 소리까지 전달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결국 어느 정도는 성공했지만, 또 어느 정도는 실패한 셈이다.
 
이는 언어와 현실 사이의 관계만이 아니라, 언어와 언어 사이에도 나타난다.
한국어의 높임말이나 스페인의 성관사처럼 언어는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한계가 있다.
바람에 스치운다는 말을 스페인어로 번역해 보라. 그 느낌이 완벽하게 제현되겠는가?
언어는 각자 자신만의 표현가능성을 지니고 자신의 체계, 그 한계 내에서 표현할 수 있을 뿐이다.
결국 인간이 언어를 통해 세계를 정의하는 한, 세계에 대한 정의는 언어의 표현가능성을 넘어서지 못하고 만다.
그럼 그 정의가 옳다고 할 수 있을까.
 
정의, 논리... 하지만 그 안에서만 맴돌다보면... 데리다처럼 그 스스로 이중구속에 빠지고 만다. 현실성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정의를, 논리를 따지기전에 과연 무엇을 위해, 무엇을 얻기 위해 정의를 따지고 논리를 따지는지부터 반성해야 한다.
오직 그러한 반성만이... 우리가 누구인지를 정의하고 깨닫게 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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