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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 발단은 대구, 발전은 고려대
게시물ID : history_82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포크숟가락
추천 : 1
조회수 : 778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1/04/19 14:47:59
4.19 혁명 - 60. 2.28 대구 학생 시위 - 60. 3.15 부정선거 - 60. 3.15 마산의거 - 60. 4.18 고대 시위 - 60.4.19 시민혁명 발발 - 60.4.25 교수단 데모 - 60.4.26 이승만 대통령 하야 - 60.7.29 제 5 대 국회의원 선거 - 60.8.13 제 2 공화국의 탄생 4.19혁명의 최초의 도화선은 60년 2월 28일 대구에서 불붙여졌다. 민주당 정부통령후보의 대구 유세일인 28일은 일요일이었는데 대구시내 모든 초중고학생은 당국의 지시로 등교를 강요당했다. 그것은 야당의 선거 유세장에 학생들이 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으므로 대구고교와 경북고교 학생이 “학생을 정치에 이용하지 마라”고 외치면서 마침내 데모를 벌였다. 이어 3월1일 서울, 대전, 수원에서, 8일 대전, 12일,13일 부산 서울에서 계속적인 학생 데모가 일어났다. 학생들의 구호도 “처음에는 구속학생 석방하라”, “학생을 정치 도구화하지 마라”는 등이었으나, 점차 정치적인 구호로 바뀌어 “학생은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뭉치자”, “부정선거를 묵인하는 자는 자유로운 조국에서 삶을 포기한 자다”라는 등의 부정선거 규탄의 방향으로 바뀌어갔다. 3월15일 선거 당일에는 마산에서 학생들이 데모를 벌였고, 자유당의 작태를 목격한 시민들도 선거포기선언을 한 민주당 당사 주변에 모여“협잡선거 물리치자”고 외치면서 학생 데모에 합류하였다. 경찰과 자유당의 정치폭력배들의 무자비한 제지로 많은 사상자와 행방불명자가 속출하였으며, 갖가지 풍문은 마산시민들을 극도로 흥분시켰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4월 11일, 그 동안 행방불명이 된 마산상고생 김주열이 눈에 최류탄이 박힌 채 무참하게 살해된 시체로 바다에서 발견되자 전국의 학생들과 국민들의 흥분은 극에 달하였다. 4.19혁명 진행과정 (1) 제 1차 마산봉기(3월 15일) 3월 15일의 마산 학생시위는 경찰의 발포로 많은 사상자를 내었다. 이날 민주당에서는 선거를 포기한다는 선언이 나왔고, 오후 3시에는 수천 명의 시민,학생이 '협잡선거물리치자'며 시위에 돌입, 괴한들로부터 곤봉세례를 받으며 투석전을 전개하여 마침내 제1차 마산봉기 의 화약고가 터졌다. (2) 제 2차 마산봉기(4월 11일) 제1차 사건 때 행방 불명되었던 마산상고생 김주열 군의 무참히 학살된 시체가 때마침 해안에서 낚시꾼에 의해 걸려 나왔을 때 학생과 시민의 분노를 극도에 달했다. 학생들은 교문을 나서 '학살 경관 처단', '재선거','살인범 처단' 등을 외치며 자못 험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3) 고대생 피습 사건(4월 18일) 18일 고대생들이 국회의사당 앞에서 질서 정연한 시위를 마치고 귀가하던 중 종로 4가에서 5.60명의 괴한으로부터 기습을 받고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민심은 완전히 정부로부터 돌아서고 말았다. (4) 경무대 진출, 계엄령선포( 4월 19일) 19일 수천 명의 학생, 시민이 경무대 앞까지 진출하여 '이승만은 물러가라'고 외치며 연좌 시위를 하자, 하오 1시를 기해 서울 일원에 경비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하오 4시에는 부산· 대구·광주 등 4개 도시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하오 5시에는 비상 계엄으로 바뀌면서, 경무대 앞의 발포로 시작된 충돌로 183명의 사망자와 6,259명의 부상자가 속출하였다. (5) 이승만대통령 하야(4월 26일) 25일 하오 5시 45분 전국 27개 대학의 교수 300여명은 "4.19에 쓰러져간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계엄하의 삼엄한 경비를 뚫고 평화적 시위를 감행, 시가를 행진하였다. 교수단의 시위는 이제까지의 학생시위에 이은 정부의 마지막 단안을 촉구하는 데 결정적인 일격이었다. 26일 상오 10시 이대통령은 비로소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 고 성명을 발표했다. 이승만과 자유당 독재 12년의 장기 집권이 이제 막을 내린 것이다. 학생들이 흘린 피가 헛되지 않고 혁명은 성취된 것이다. 혁명의 여운은 이기붕 일가족의 자살 과 이박사의 망명이란 또 하나의 사건으로 이어지고 새로운 허 정 과도내각의 성립으로 일단 막을 내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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