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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를 공부한 사람들에게는 매우 익숙한 일본어 표현 중에 「카치구미(勝ち組)」와 「마케구미(負け組)」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말 그대로 옮기자면 「승자조」와 「패자조」이지만, 일반적으로 「사회적 승자」와 「사회적 패자」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90년대 이후 사회적 격차가 커지면서 널리 쓰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단어의 유래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더군요. 이 카치구미・마케구미의 어원은 조금 어두운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1945년에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2차세계대전이 종식되고, 일본은 패전국으로 미군에 의해 만들어진 연합국최고사령부(GHQ)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본의 반대편에 있던 남미 지역에서 살고 있는 일본인 이민자 사회에서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일본이 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일본이 패전했다는 정보는 모두 유언비어에 불과하며 일본은 전쟁에서 승리한 전승국이라고 믿는 사람들. 이러한 「전승사관」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통칭 「카치구미(勝ち組)」라고 불렀습니다.
카치구미는 남미 전역에 넓게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브라질, 아르헨티나, 페루를 비롯해서 하와이까지, 일본인이 다수 이주했던 지역에서는 매우 일반적으로 퍼져 있던 생각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브라질의 「카치구미」는 그 수에서도, 이후에 벌어진 여러 사건들로 인해서도 역사적으로 많은 과제와 교훈을 남겼습니다. 전쟁 종료 후 브라질에서 살고 있는 일본인의 90% 이상이 일본이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믿고 있었다고 할 정도로 그 사태는 심각했습니다.
전쟁 당시 브라질에는 약 30만명의 일본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 대부분은 브라질 내의 일본인 사회를 중심으로 교류를 했고, 대부분이 농장을 운영하거나 그러한 농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 대부분은 현지인들과 교류가 적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브라질은 연합군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일본인들은 많은 행동의 제약을 받아야 했습니다. 미국에서는 전쟁 시기에 일본인들을 집단 수용소에서 관리했는데요. 미국 정도로 심하지는 않았지만, 남미에서도 일본인은 적국의 국민들로서 사회로부터 고립되어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일본인들 대부분이 현지어인 포르투칼어를 구사할 수 없었고, 말을 할 수 있는 사람 중에도 포르투칼어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기 때문에 현지의 신문에서 보도하는 내용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연유로 인해서 브라질의 일본인 이민자 사회는 극도로 편협하고 제한된 정보만이 유통되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주 정보원으로 삼은 것이 당시 일본의 라디오 방송입니다. 일본은 이 시절에도 단파 라디오 방송을 했는데, 전쟁 당시 일본에서 흘려보내는 라디오 방송은 대본영이 조작한 허위 정보들이었습니다. 그나마도 이것을 그다지 성능이 좋지 못한 단파 라디오로 청취하다보니 제대로 듣지 못한 내용은 상당 부분이 창작으로 채워지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정보들은 주로 삐라 형태로 제작되어 일본인 이민자 사회에서 유통되었습니다.
특히 전쟁 말기인 1945년 7월에 결성된 「신도연맹(臣道連盟)」은 이러한 왜곡된 조국(일본)의 정보를 전파하는 정보탑 역할을 했는데요. 이들이 뿌린 당시의 삐라의 내용을 보면 이런식입니다.
・ 미국의 8배의 파괴력을 가진 일본의 원자폭탄으로 오키나와에 집결한 미군 군함 400척을 괴멸
・ 일본의 고주파 폭탄으로 인해 오키나와에 집결한 미군 15만명을 15분만에 격파
・ 일본군이 발사한 구형의 불꽃을 뿜는 병기에 의해 미국민 3650만명 사망
・ 소련, 중국이 무조건 항복. 맥아더를 포로로 잡아들여, 영미 태평양함대가 무장해제
・ 일본군함 30척이 하와이에 입항. 미대통령은 일본이 지명
일본이 원자탄을 보유하고, 고주파폭탄이라는 미래병기를 보유하고 있는데다가, 일본이 미국에 들어와서 미국 대통령까지 정해주었군요. 황당한 내용이지만, 정보가 제한되어 있던 브라질의 일본인 이민 사회에서는 이러한 정보를 진짜로 믿는 사람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러한 황당한 정보 유포의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신도연맹」은 한때 최대 12만명에 이르는 회원을 보유하고 있을 정도로 브라질의 일본인 이민 사회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인 이민자들 중에도 일본이 전쟁에서 패배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지식인층으로 현지언어인 포르투칼어를 자유롭게 구사하고, 현지의 신문도 자유롭게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일본인 이민 사회의 10%에 미치지 못했던 소수파였습니다. 이들을 「마케구미(負け組)」라고 불렀습니다.
사실 당시의 일본인 이민 사회에서는 「카치구미」와 「마케구미」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일본이 승전했다고 믿는 사람들은 일본이 패전했다고 믿는 사람들을 매국노라고 불렀고, 일본이 패전했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은 망상에 빠져 있는 다수의 사람들을 「승전사관에 물든 사람들」 정도로 불렀다고 합니다. 이 「카치구미」와 「마케구미」라는 용어는 사실 1940년대 후반에 이들 사이의 항쟁이 심해지며 사상자가 발생하자, 이것을 일본 본국에서 보도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말이었습니다. 「카치구미(勝ち組)」와 「마케구미(負け組)」라는 단어는 이렇게 해서 생겨납니다.
1946년3월7일에 상파울로로부터 460km 떨어진 바스토스 마을에서 산업조합의 이사장이었던 키요베 이쿠타(清部幾太)라는 사람이 살해당합니다. 그는 화장실에 가던 중에 카치구미의 과격분자에 의해서 살해당합니다. 이 때 살해당한 키요베 이쿠타는 일본의 패전을 주장하는 마케구미의 핵심 인물이었습니다. 이것이 카치구미에 의한 마케구미 살인 테러의 신호탄이었습니다. 이후에도 테러행위는 이어져서 카치구미에 의해서 23명의 마케구미 쪽 사람들이 살해당합니다.
이때 살인테러를 실행하는 멤버를 카치구미에서는 「특행대(特行隊, とっこうたい)」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전쟁중에 단파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던 「특공대(特攻隊, とっこうたい)」를 소리만 듣고 문자로 본적이 없었기 때문에 자기들 방식으로 한자를 붙인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브라질 각지에서 마케구미 쪽 사람들을 공격했습니다. 이들은 전쟁중에는 자신들이 조국에 큰 역할을 하지 못했지만, 전쟁이 끝난 지금이라도 애국심을 발휘하겠다는 명분을 갖고 움직였다고 합니다. 당연히 이런 테러행위는 브라질 국내에서도 큰 문제가 되었고, 나중에 브라질과 일본 사이의 커다란 외교문제로 발전하기에 이릅니다.
그러나 왜 유독 카치구미만이 마케구미에 대한 살인 테러를 자행했던 것일까요? 여기에는 아주 뿌리 깊은 증오의 역사가 숨어 있습니다.
일본인의 해외 이주사는 아주 복잡한 이면을 갖고 있습니다. 특히 남미에 이주한 일본인들은 그 수는 많았지만, 상당수가 제대로 된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남미에 이주했던 일본인들 대다수가 거친 육체노동에 종사했습니다. 이들은 대다수가 집단농장에서 살거나 일본인 이민 사회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에 비해서 남미 이민 초기에 넘어왔던 사람들과 현지에서 정규 교육을 받은 이민 2세들, 미국에서 남미로 유입된 이주 이민자들은 충분한 교육을 받았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현지어인 포르투칼어와 영어의 구사에 능숙했습니다. 이들은 당시에 브라질에서 크게 유행했던 향신료 제조 공장을 경영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당시 브라질에는 박하 공장이 많았는데, 이러한 박하공장의 대다수를 일본인이 운영했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일본인 지식층입니다. 당연히 이들의 경제적인 수준은 다수의 일본인 이민자보다 월등히 높았습니다.
이민 사회에서의 경제적인 격차는 증오와 함께 많은 유언비어를 낳게 되는데, 이 중에서 유독 심했던 것이 박하에 대한 유언비어였습니다. 당시 브라질의 일본인 이민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퍼져 있던 박하에 대한 유언비어를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 박하를 피부에 바르면 피부가 시원 상쾌해진다. 이것과 같은 원리로 미군은 전투기 엔진에 박하를 발라서 엔진을 냉각시켜 성능을 향상 시키고 있다
・ 독일 과학자의 연구에 따르면 박하를 니트로그리세린과 섞으면 다이나마이트의 폭발력이 30배로 증가한다
・ 화염방사기에 박하를 섞으면 화력이 2배로 강해진다
・ 독가스에 박하를 섞으면 방독면을 써도 소용이 없다
・ 브라질에서 생산되는 박하는 대부분이 미군에게 공급되고 있다
지금 들으면 황당해서 믿고 싶어도 믿을 수 없는 조악한 유언비어지만, 정보가 제한되어 있었던 당시 일본인 이민 사회에서는 이러한 유언비어가 사실처럼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이민 사회 내부의 경제적 격차로 인해서 쌓여온 증오심과 합쳐지면서 박하공장을 운영하는 일본인들에 대한 공격적인 성향이 외부로 폭발하게 됩니다. 이 당시 일본인 이민 사회에서는 「박하국적론(薄荷国賊論)」이라는 출판물이 유통되었는데, 이 책은 박하에 대한 여러가지 떠도는 이야기를 취합해 이민 사회 내부의 자본 계층을 매국노로 규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 책을 사상적 근거로 하여 전쟁 말기에는 박하공장에 대한 테러 행위가 횡행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박하공장 테러는 이후 카치구미의 마케구미에 대한 살인 테러로 변질됩니다. 왜냐면 박하공장을 운영하던 지식계층은 모두 일본의 패전을 믿는 마케구미였으니까요.
2차대전이 끝난 뒤, 카치구미들은 8월15일은 「승전기념일」로 정하고 브라질 전국에서 승전기념일 행사를 개최합니다. 마케구미들에게도, 브라질 현지인들에게도, 일본 본토의 사람들에게도 너무나도 바보같은 행동으로 여겨질 행동들이 무려 11년이나 지속됩니다.
외국의 독일, 이탈리아 이민 사회에서도 카치구미 현상과 비슷한 현상은 발생했습니다. 하지만 독일인이나 이탈리아인들은 다양한 정보를 접하면서 자연스럽게 현실을 받아들이고 승전사관은 몇달 가지 못해 소멸했습니다. 그런데 왜 브라질의 일본인 이민 사회에서는 이러한 승전사관이 11년이나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일까요?
여기에는 앞서 소개한 「신도연맹」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떠한 형태로든 사람이 집단을 이루게 되면 조직논리라는 것을 따르게 됩니다. 사이비종교가 쉽게 무너지지 않는 것도 이런 조지논리에 지배를 받는 경향 때문인데요. 신도연맹은 일본인 이민사회를 하나로 묶어 주는 매우 중요한 구심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일본이 승전했다는 주장을 주로 펼치는 단체였던 것이 문제겠죠. 믿고 싶은 것을 믿는 사람들, 그들의 세계에서는 일본은 승전국이며 절대로 미국에게 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카치구미 쪽에서는 「쇼와신문(昭和新聞)」이라는 신문도 창간되었습니다. 쇼와신문은 1949년 8월15일에 창간되어 1955년까지 약 6년 동안이나 발행된 신문입니다. 이 신문의 발행인이자 지속적으로 논문을 발표했던 카와바타 사부로(川畑三郎)는 자신의 논문을 통해서 일본인 이민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성과 함께 다양한 형태의 승전사관을 제시했습니다. 이 사람은 쇼와신문 말기에 가서는 스스로 승전사관을 버리고 카치구미와 마케구미의 화해와 융합에 대해서 설파하게 됩니다.
당시의 카치구미 사람들의 믿음이 얼마나 단단했는가는 다음과 같은 사례가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1951년에 센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체결되면서 브라질에는 일본의 공관이 설치됩니다. 그리고 이곳을 통해서 이민자 사회에 넓게 퍼져 있는 승전사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하게 됩니다. 공관의 관료들이 직접 나서서 주민들을 모아놓고 일본이 패전했고, 지금은 어떤식으로 복구를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사진과 영상을 보여주면서 설득을 했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이 설득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오히려 당시의 카치구미 내부에서는 아마존 밀립 안에 「신일본(新日本)」이라는 브라질 선주 이민자들이 만든 국가가 있는데, 브라질에 설치된 일본 공관은 이 신일본에서 온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믿었다고 합니다.
카치구미 소동이 오랫동안 지속되는 과정에서 당연히 카치구미 내부에서도 다양한 정보를 접하고 일본의 패전을 인식하게 되는 사람들도 등장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인식파」라고 부릅니다. 이들 인식파에 의해서 대대적인 계몽운동이 전개됩니다. 하지만 카치구미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과격해지고 보수화되었기 때문에 인식파들은 오히려 변절자로 외면 당하는 상황에 처합니다.
카치구미는 1956년 2월에 가서야 공식적으로 그 활동을 종료합니다. 11년이나 이어진 카치구미 소동을 종식 시킨 것은 인식파의 계몽운동도, 일본 정부의 노력도, 브라질 정부의 공권력에 의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카치구미 소동을 종식시킨 장본인은 카치구미의 구성원들이 다양한 사기의 피해를 당하면서 스스로 현실을 인식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카치구미의 믿음은 워낙에 강해서 거의 종교적인 신념에 가까웠습니다. 당연히 이러한 순수성을 이용하려고 하는 사기꾼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그러한 사기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귀국선 사기」와 「구권 사기」입니다.
종전 후 브라질 내에서 일본인들의 사회적인 지위는 그다지 좋지가 않았습니다. 여기에 카치구미 소동까지 겹치면서 일본인들이 브라질에서 살아가는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이에 일본 본토로의 귀국을 주선하는 업자가 등장합니다.
이들 귀국 주선 업자들은 일본 현지까지 가는 여객선의 표를 팔았는데요. 이 여객선 표가 상당한 고가였습니다. 하지만 본토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상당한 수의 이민자들이 표를 구매했고, 이런 표는 당연히 가짜였기 때문에 배는 타지 못하고 돈만 날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이렇게 본토로 귀국을 원하는 사람들을 노리는 사기는 귀국선 티켓 사기만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브라질 이민 사회에서는 일본에서 발행한 지폐가 일반적으로 유통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본 지폐는 일본이 패전하면서 모두 사용할 수 없게 되었고, 일본 본토에서는 이미 신권이 발행되어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구권 지폐는 휴지 조각에 불과했습니다. 그럼에도 귀국선을 타려는 사람들에게 「일본에서 브라질 화폐는 가치가 없어서 손해를 보니 일본 돈을 미리 바꿔가라」며 재산을 전부 처분하도록 하여 휴지조각에 불과한 구권으로 바꿔주는 「구권 사기」가 횡행합니다.
이런 사기꾼들에게 당해서 브라질에서 힘들게 모았던 재산과 토지를 몽땅 날리고 빈털털이가 되는 사람들이 속출합니다. 당연히 모든 재산을 잃고 나서야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일본의 패전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이게 되었겠죠. 이러한 사기 행위의 횡행으로 인해서 1940년대 후반부터 카치구미는 급격히 줄어들어서 1950년대에 이르면 수백명 수준으로 축소됩니다.
하지만 카치구미의 과격파는 1970년대까지 남아 있었고, 1973년에 마지막까지 일본의 승전을 믿던 3그룹의 가족이 일본으로 귀국하게 됩니다. 이때 귀국자 중 한 사람은 보도진 앞에서 「천왕폐하 만세!」를 외친 뒤에 「이렇게 풍요로운 곳이 정말로 전쟁에 진 나라입니까? 역시 일본이 이겼군요.」라고 말하며 마지막까지 그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국뽕의 최종진화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일련의 「브라질 카치구미 소동」은 일본 내에서는 1970년대까지만 해도 상당히 인기가 있는 연구 대상이었다고 하는데요. 지금은 60~70년들의 기억 속에나 남아 있는 옛날 일이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이렇게 어두운 역사 속에서 만들어진 단어가 오늘날 다시 일반적으로 널리 쓰이게 되었다는 것이 시사하는 바는 큽니다. 카치구미・마케구미 항쟁의 본질이 전쟁의 승패에 대한 진실 논쟁이 아닌 가진자와 못가진 자 사이의 계급투쟁이라는 이면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출처 | http://ppss.kr/archives/184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