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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평사 운동 (5)
게시물ID : history_1644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Lemonade
추천 : 4
조회수 : 393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4/06/19 10:30:33
경제와 역사적 배경을 보았으니 사회적으로 어떠한가를 빼놓을 수는 없는 일이겠지요.

1910년 ‘한일합방’을 계기로 완전히 식민지 체제로 재편된 조선은 다양한 형태로 그 저항이 이어지게 됩니다. 1910년대의 민족운동은 부르조아지 민족주의자가 중심을 이루는데, 이들이 주도한 1910년대의 민족운동은 크게 세 방향으로 전개되었습니다, 먼저 1910년대에는 각종 단체들에 의해 국내외에서 반일정치활동의 성격을 띠는 다양한 형태의 투쟁이 전개되었습니다. 

이 단체들의 구성원은 척사적 유생에서부터 혁신유생, 애국적 자산가, 중소상공인, 근대적 지식인, 소부르조아지, 청년학생, 종교계 인사 등 다양하였고, 정치의식에서도 근왕주의적 복벽주의에서부터 근대적 공화주의에까지 다양하였지요. 그리고 활동에서도 군자금 모집, 악질지주·부호·친일파의 처단과 같은 테러활동을 통한 시위, 격문배포, 교육을 통한 반일 선전활동과 독립군의 양성 등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무장투쟁노선이 있었습니다. 이 노선을 따르던 세력으로는 국내에서는 소규모 유격전을 벌이던 잔여 의병세력이 있었고, 국외에서는간도나 연해주로 기지를 옮겨 무장활동을 벌이거나 무장을 준비하던 다양한 단체들이 있었습니다만 국내의 잔여 의병세력은 1914년을 경계로 소멸의 길을 걷게 되었고, 국외의 단체들은 군자금 모집과 무기확보를 위한 국내 진공작전이나 헌병·경찰기관의 습격, 청년들을 상대로 한 계몽과 교육, 군사훈련 등의 활동을 벌여 나가게 됩니다. 이러한 활동은 1910년대 후반에 들어 일제의 탄압이 가중되자, 그 기반을 잃고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지요. 

마지막으로 무장투쟁이나 반일정치활동과는 활동영역 형태가 전혀 다르지만 1910년대에 국내외에서 전개된 민족교육운동과 각종 문화운동도 민족운동의 한 흐름이라고 할수 있는데. 민족교육운동은 민족적 기풍을 가진 사립학교·서당·야학 등지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문화운동은 역사·지리·국문연구 등의 학술연구·문예창작·언론출판사업 등을 통해 민족문화를 수호하고 민족의식을 심화시켜나갔습니다.이러한 활동은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일정하게 민족의식을 심어주었고, 많은 사람에게 반일적인 자주독립의식을 선전하는 과정에서 일정하게 작용하였는데 이는 반봉건사상과 근대사상을 고취하는 기반이었습니다.

이러한 1910년대 문화 계몽 운동과 3·1운동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1920년대 초반의 이른바 문화 운동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1920년대 초반의 문화운동이란 당시의 청년회운동·신교육운동·물산장려운동 등 문화적·경제적 실력양성운동을 총칭하는 것으로 창립기 형평사는 이 운동에 일정하게 영향을 받았다고 볼수 있습니다. 한편 3·1운동은 우리의 민족운동사에서 분수령을 형성하게 되는데 3·1운동은 초기 단계에서는 지식인·종교계 인사·학생들을 중심으로 수행되었으나, 점차 운동이 진행될수록 토지조합사업 등으로 말미암아 일제의 직접적인 수탈의 대상이었던 기층민중의 민중운동이 민족해방운동의 전면에, 진정한 역사발전의 주체로서 등장하게 됩니다.

또한 사회내부에서는 식민지 민족문제와 계급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지도이념으로 사회주의 사상이 1920년대 초에 들어서 선진적인 청년·학생들에게 적극적으로 수용되어 여러 사상단체의 조직활동을 통하여 대중적인 지지기반을 확보해 나갔지요.

국내에서 사회주의자의 단체가 조직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921년 초부터였는데 1922년 2월 동우회선언을 계기로 이후부터 사회주의 단체들의 조직활동이 활성화되었습니다. 서울청년회를 비롯하여 1922년 1월 신생활사·무산자동지회, 1923년 5월 토요회, 1923년 7월 신사상연구회, 1923년 10월 건설사, 1924년 8월 조선노동당 등이 대표적인 단체에 속하게 되는데 이러한 사회주의 사상단체 활동은 1922년과 1923년을 계기로 대단히 활발해졌고 그 속에서의 사상적인 분파, 즉 서울계와 화요계 그리고 북풍회계로 분화되었습니다.

이러한 3·1운동 이후 문화통치라는 기만적인 일제 통치방식의 변화를 이용한 여러 합법운동이 전개되었는데. 표 1에서 보듯이 전국적으로 각종 사회운동 단체들이 다양한 목적을 내걸고 조직되어 농민·노동·청년·학생·여성 등 대중운동을 지도해 나가게됩니다.

〈표 1〉1920년 초반 사회운동단체
연도  민족주의  사회주의  노동단체  농민단체  청년단체  소년단체  합계 
1920   11 33   251 1 296
1921   18 90 3 446 14 571
1922   19 81 23 488 25 596
1923   55 111 107 584 43 900
1924 1 86 91 112 742 81 1,113
1925 1 83 128 126 847 127 1,312
※ 조선총독부 경무국, 『最近における朝鮮治安狀況』, 1933, 168~169쪽.

위의 표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1920년대 전반기 가장 큰 조직기반을 갖추고 있던 것은 청년 운동 
 이었습니다.

1920년대 초반 우후죽순처럼 결성된 전국의 수많은 청년단체는 1923년경을 기점으로 하여 다수가 사회주의적인 청년단체로 탈바꿈하였고 1924년에는 조선청년청동맹으로 집결하였습니다. 이들 청년단체는 청년의 조직화와 계급의식의 고취를 목표로 하였고, 그 구성원들은 각 지방의 노동운동·농민운동 단체에도 참여하여 이들을 지도하였지요.

노동단체의 경우, 19세기 말엽 이전부터 임금노동이 형성되면서 임금노동자의 조직이 자연발생적으로 전국 각지에서 생겨났는데. 당시의 자료에 의하면 1900년대에서 1920년에 이르기까지 전국 각지에서 조직되었던 노동단체의 수는 50여 개에 이르고 있는데, 이중에서 1920년 이전에 조직된 단체는 30여 개에 달하였습니다.

이러한 노동단체는 1920년 4월 11일 최초의 전국적인 노동운동 결성체인 조선노동공제회로 결집하였으며 이어서 1920년 5월 2일에는 노동자의 상호부조와 노사협조를 내걸고 조선노동대회가 결성되었으며, 1922년 10월에는 노동조합연합체로서 조선노동연맹회가 결성되었습니다.

032_003.jpg

<형평운동에 많은 영향을 준 조선노동공제회 창립총회 기사입니다.>

이 같이 1920년대 초기에 전국적인 노동단체로서 조선노동공제회·조선노동대회·조선노동연맹회가 결성되어 노동자의 계급적 자각을 요구함과 동시에 조직적 훈련을 쌓는다는 의미에서 커다란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이 시기부터 노동자는 ‘이전의 그들이 아니라 자신들의 권리를 자각하고 투쟁에 나서는 하나의 역량으로 변화’하고 있었습니다. 다음 인용문은 이러한 변화를 식민지배층의 시각에서 보고 있는 내용입니다..

하류사회, 소위 조선인 노동자의 사상이 변하고 있는 것은 실로 놀랄만한 현상이다. 오늘날 노동자의 상황은 내선인을 불문하고 중류이상의 사람에게도 저항을 한다. 종전대로라면 물론 자신이 머리를 조아리지 않으면 안 되는 일도 지금은 바로 저항하고 대든다고 하는 꼴이 된 것은 금일의 세계사조라고도 말할 수 있겠지만 전혀 잘못된 사상에서 사회문제의 악영향을 받고 있다. 하류사회의 사상이 점차 이러한 방식으로 변해 간다면 참으로 이는 어찌해볼 도리가 없이 심히 우려할 만한 문제라고 생각한다(1920년 9월 전국 도지사 회의석상에서 전라북도지사의 발언요지다.

한편 1920년대 이후 민족해방운동 선상에서 농민층의 계급분화가 가속화되면서 농민운동은 소작쟁의를 중심으로 전개되어 나갑니다. 이 소작쟁의는 1920년부터 일어나 해를 거듭할수록 그 양적인 면에서나 질적인 면에서 확대·심화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소작농민의 항쟁 속에서 여기저기에서 농민단체가 태동하여 나가는데 <표 1>에서 보듯이 1923년을 기점으로 농민단체 조직들은 급증하는 추세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소작인 단체의 효시로는 앞에서 언급했던 1920년 4월에 조직한 조선노동공제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단체는 지도부에 복잡한 요소가 겹쳐 곧 해체되었지만 1922년 발표한 “소작인은 단결하라”라는 선언문을 발표함으로써 소작문제를 사회문제로 부각시킨 것과 본 공제회의 지방지회 특히 광주와 전주지회가 농민조직에 미친 영향으로 한국농민사의 기원을 이룩하였습니다.

여성운동에서도 1920년부터 여성단체는 곳곳에서 조직되는 모습을 보입니다, 1920년에서 1922년 사이에 조선여자교육회·경성여자청년회·조선여자고학생상조회 등 전국 각지에서 29개에 달하는 여성단체가 출현했는데 이 시기의 여성운동은 대개 계몽주의적인 성격으로 야학·강연회·강습회를 통해 여성의 사회참여와 봉사를 촉구하는 수준이었습니다.

1923년에 접어들어 각 부분의 사회운동 내부에 사회주의 경향이 급격하게 확산되면서 여성운동계에도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리하여 사회주의의 이념으로 무장한 여성들은 1924년 5월 “사회진화법칙에 의하여 신사회의 건설과 여성해방운동에 나설 일군의 양성과 훈련”, “여성해방운동에 참가할 여성의 단결”을 내걸고 조선여성동우회를 출범시켰고 이 조선여성동우회는 1927년 근우회가 창립될 때까지 사회주의 여성운동의 전국적인 대중단체로서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이렇듯 1919년 3·1운동 이후 일제의 식민지 정책은 이른바 문화정치로 전환하게 되며, 또 제1차 세계대전이나 러시아혁명 등의 영향과 함께 일반대중은 사회문제 정치문제에 한층 관심을 갖게 되는데 이러한 흐름을 타고 민족해방운동은 노동운동·농민운동 등 부문별 운동속에서 개별적인 문제 해결을 시도하면서 대중적 기반을 확대시켜 나가게 되지요. 

그러한 가운데 일반대중의 일상적 이익옹호와 독립회복을 위한 반제투쟁을 수행하는 것이 공동의 과제로 되어 있었습니다.이러한 시대 상황 아래서 신분차별이라는 봉건유제에 억눌려 신음하고 있던 백정은 자신들의 처지를 타파하는 방법은 스스로의 조직된 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지요.




주석>

>인용문의 출처는 다음과 같습니다, 朝鮮總督府, 道知事會議速記錄, 1920 : 김경일, 일제하 노동운동사, 창작과비평사, 1992, 375쪽에서 재인용. 

>1910년대와 20년대의 문화운동은 다릅니다, 헷갈리실것 같고 또 저도 잘 이해가 안되었던 부분중 하나인데, 20년대는 10년대의 계몽적인 성격을 포함하여 다양한 측면에서 시행된 것이라 보시면 될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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